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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를 미친 여자로 한다고요? 미친 여자가 아니에요, 슬픈 여자인 거예요. (지만지드라마, p.50)

  

     

원문 그대로보다는 “그 여자 미친 여자 아니에요, 슬픈 여자입니다.”로 더 잘 알려진, 이제는 밈처럼 여겨지는 이 문장은 스페인의 작가 ‘후안 마요르가(Juan Mayorga)’의 희곡 『비평가』의 대사다. 읽지 않았더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아마도 『비평가』에서 근래 가장 많이 인용되었을 구절이 아닐까. 자주 인용되더라도 문장이 나온 맥락은 보통 생략되기 마련이다. 나 역시 ‘미친 여자가 아닌 슬픈 여자’라는 문장 자체는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었다. 미친 것처럼 보이는 여성들의 서사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 이면에 슬픔이 숨어있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으며, 정신적 고통을 드러내는 데 보수적인 한국 사회의 경우 특히 더 그랬으니. 그러나 이 문장이 1시간 반이 넘는 연극 속 단 한 문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전체적인 맥락이 궁금해져, 희곡 전체를 찾아 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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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마요르가(Juan Mayorga)’의 희곡 『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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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비평가」(2018) 콘셉트 컷

 

 

『비평가』는 극작가 ‘스카르파’와, 비평가 ‘볼로디아’의 논쟁을 다룬 2인극이다. 여자에 관해 이야기하는 해당 구절은 극중극인 스카르파의 연극에 대해 볼로디아가 비평하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스카르파는 15분간의 기립박수를 받을 만큼 성공적인 초연을 마쳤지만 자신에게 혹평을 남겼었던 볼로디아의 견해를 듣기 위해 그의 집까지 찾아온다. 볼로디아는 제1막의 복싱 선수를 꿈꾸는 소년 ‘에릭’과 그의 스승인 ‘타우베스’가 거의 한 몸으로서 세상에 대항하는 장면까지는 진실을 호흡했으나, 제2막에서 등장한 ‘타우베스의 여자’ 탓에 극이 상투적이고 감정적으로 변했으며 그것은 가짜라고 비평한다. 스카르파는 볼로디아가 보고 이해한 것에 실망한 듯 답하지만, 볼로디아 역시 논쟁을 이어간다.




여자 인물도 가짜


 


난 연극에서 진실을 기대합니다. 우리가 숨기고 있는 것들을 연극이 꺼내 놓지 않는다면 연극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연극도 세상에 가면을 씌우는 일에 전념한다면 연극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지만지드라마, p.53)
 


볼로디아에게 연극이란 진실을 보여주는 장치다. 그의 관점에서 제2막의 여자 인물은 이 시대의 모든 진부한 주제를 늘어놓을 뿐인 가짜에 불과하다. 심지어 스카르파가 여자의 내면을 한 번도 제대로 마주친 적 없을 것이며, “내가 노래할 줄 알면, 살아남으련만.”이라는 대사와 어물쩍한 시선, 정신없는 손의 움직임은 실성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고 비난에 가까운 비판을 남긴다. 스카르파는 이 비평에 대하여 반박한다. 미친 여자가 아니라 슬픈 여자라고. 에릭이 슬픔을 존중하기 때문에, 타우베스의 여자를 뒤쫓아 왔더라도 자신의 분노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고 여자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거라고.


 

그 여자의 입에서 나오지 않은 단어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두 문장마다, 볼로디아는 진실이란 단어를 언급합니다, 하지만 진실이 그 앞에 있어도 그는 알아보지 못합니다. “여자 인물도 가짜.” … 그 여자는 진짜입니다. (지만지드라마, p.69)

 


그토록 볼로디아가 자신의 진짜를 구별하는 육감에 대해 토로했지만, 모든 것은 진실에 기반한 내용이었다. 제1막의 에릭과 타우베스가 서로 주먹을 주고받는 것은 극작가와 비평가, 즉 스카르파와 볼로디아를 은유하는 관계였으며, 제2막의 여자 인물은 그 자체가 ‘볼로디아의 여자’였다. 스카르파는 진실 그 자체를 무대에 올렸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볼로디아는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연극에서 잘못됐다고 판단하는 모든 것을 삶에서 제거해 버릴 수 있다면, 만약 우리가 연극에서 경멸하는 모든 것을 삶에서 제거해 버릴 수 있다면, 무엇이 남게 될까요? 우리가 연극에 엄격하게 요구하는 것들을 삶에는 절대로 요구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연극에는 요구합니다. 진실을, 모든 진실을. 그래서 오늘 밤 우리가 본 작품은 우리 기대를 저버린 것입니다. (지만지드라마, p.72)

 


마지막 씬에서 볼로디아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 집에서 뛰쳐나가고, 스카르파는 홀로 남아 볼로디아 대신 자신의 극에 대한 비평을 남긴다. 연극에서 잘못됐다고 판단하는 ‘가짜’들을 삶에서 전부 없애버릴 수 있다면 볼로디아의 삶에는 무엇이 남게 되는 것일까. 비평가의 부제이자 극중 여자의 대사, ‘내가 노래할 줄 알면 살아남으련만’이 떠오른다. 볼로디아가 가짜라고 본 여자는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했고, 그것이 진실이었다.


 

당신이 날 바라본다면,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거예요. 동이 틀 때까지 지붕들 위에 여자들이 있다는 것을. 어떤 여자들은 추락한다는 것을. 지금 노래하는 여자들만 살아남은 거라는 것을. 내가 노래할 줄 알면, 살아남으련만. (지만지드라마, p.67)

 

 

 

감히 고독이나 조롱거리와 마주하세요



이 상황이 스카르파가 승리했다는 의미가 되지는 않는다. 스카르파는 자신의 연극에 대한 비평을 직접 할 기회가 생겼음에도 볼로디아의 의견을 따른 평론을 한다. 물론 타우베스에게 KO패 당한 극중극 제1막의 에릭은 처음으로 연극을 올리고 볼로디아에게 혹평받은 10년 전의 스카르파를 비유하는 것이겠지만, 결말을 미루어 볼 때 단순히 에릭과 타우베스의 관계에 빗댄 승패 혹은 복수보다는 조금 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로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 현재의 흐름 한가운데 있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여기 있는 사람은 항상 늦는 법입니다. 현재의 흐름에서 벗어나, 감히 고독이나 조롱거리와 마주하세요, 그리고 저항하기 위한 눈을 준비하세요. (지만지드라마, p.73)

 


스카르파는 자기 자신에게 이런 비평을 건넨다. 그러나 나는 이 구절이 어쩌면 볼로디아에게 또한 내뱉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표면적으로는 볼로디아가 스카르파에게 건네는 말처럼 보인다. 그러나 극 내내 스카르파와 볼로디아는 ‘서로를 반영한다’는 은유가 반복되는데,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구절이 조금은 스카르파가 볼로디아에게 하는 말처럼 읽히기도 하지 않는가. 진실을 요구하면서도 정작 진짜 진실을 구분하지는 못한 볼로디아에게.

 

 

 

희곡의 매력을 느끼기 위해



출판사 ‘지만지드라마’의 책에는 후안 마요르가의 산문 「큰 소리로 책을 읽으시는 아버지」가 서문 대신 수록되어 있었다. 글은 후안 마요르가의 아버지가 책을 읽어주시며 글을 가르쳐 주셨다는 데에서 시작해, 책과 희곡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종종 희곡은 읽기가 어렵다고들 한다. 하지만 여럿이 모여 읽으면, 그러니까 사람마다 역할을 나누어 읽으면 덜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지만지드라마, p.x)

 


희곡은 다른 장르에 비하여 입문이 어렵게 느껴지기는 한다. 특히 희곡, 즉 연극의 대본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완성됨과 동시에 연기를 통한 해석의 여지가 함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희곡을 읽을 때 두 번 읽는다. 첫 번째는 머릿속으로 상상하면서 대본을 읽고, 그다음으로는 공개된 영상이나 낭독을 참고하며 다시 읽는다. 그 둘은 확실히 느낌이 다르다. 쉼표와 온점, 억양과 쉬는 숨… 그리고 침묵. 비언어적 표현들도 요소의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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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대사를 외우기 위해 희곡을 읽고 공연을 하게 되면 그 아이는 자연스럽게 ‘포괄적인 독서’를 하게 된다. 단어들의 뜻을 이해하려고 할 뿐만 아니라 문맥의 전후 관계나 배경을 물으면서 등장인물의 욕망, 두려움,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 등에 대해 여러 번 생각하기 때문이다. 독자이자 배우인 아이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 놓여야 하고 그 사람의 생각이나 편견, 꿈과 악몽, 상처와 희망을 떠맡기 때문이다.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하는 그 능력 때문에 연극은 비판과 유토피아의 공간이 된다. (지만지드라마, p.x)
 


나는 희곡을 읽고 연극을 보며, 이 모든 상황이 인간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어떠한 기회가 된다고 느낀다.


 

그걸 연기하라고 부탁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냥 크게 읽어만 주세요. 그 1막에서 정말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게 되실 겁니다. (지만지드라마, p.29)

 


『비평가』 속에서도 볼로디아가 극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이자, 스카르파는 말한다. 그저 크게 읽어 달라고. 그러면 정말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게 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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