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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뮤지컬 에비타_공연 포스터.jpg


 

수많은 관중이 그리던 여인 ‘에비타’가 14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랐다. 1970년대부터 반세기가 넘는 지금까지 그가 다시 회자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에바 페론은 여러 한계 속에서도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았던 매혹적인 인물이었고, 그의 이야기를 담아낸 뮤지컬 또한 그 감격을 재현하기 때문이다. 권력과 사랑, 대중과 정치가 맞물리는 곳에서 군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에바의 영향력은 현재진행형이다.

 

‘에비타’는 송스루(sung-through) 뮤지컬이다. 대사를 통한 서사 전달에 익숙한 관객에게는 노래로만 이뤄진 이번 극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송스루 특유의 밀도 있는 스펙터클은 어색한 공기를 압도한다. 특히 이번 시즌에는 가사집을 제공함으로써 기존에 가사 전달이 아쉽다는 점을 보완하고자 했다. 김소현, 김소향, 유리아 등 경험이 풍부하고, 탄탄한 보이스의 디바로 인정받아 온 배우들이 에바 페론 역을 맡으며 이번 시즌에 대한 기대 또한 자연스럽게 높아지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사랑, 에비타


 

사랑받는 인물의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충분한 고통, 분명한 목표,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룰 한 번의 기회가 있어야 한다.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난 사생아 출신의 에바는 벌써 첫 번째 조건에 부합한다. 평생 그를 따라다녔을 차별과 모욕, 끝내 퍼스트레이디가 된 후에도 지워지지 않았던 꼬리표를 생각하면 감히 그의 배경이 한 줄로 요약된다는 것조차 고통으로 다가온다.

 

에바는 태어날 때부터 선택지가 많은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가진 모든 것을 수단 삼아 목적을 향해 달린다. 아름다운 외모, 여성으로서의 매력, 인맥, 디바로서의 성공까지 다른 이들은 평생에 걸쳐 이루고 싶은 목표였을 모든 것이 에바에게는 단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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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넘버 ‘굿나잇 앤 땡큐(Goodnight and Thank You)’에서 에바는 영원한 사랑은 없다고 고백한다. 에바에게는 ‘사랑’도 당시 여성으로서 계급의 사다리를 빠르게 오르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영원한 사랑은 없어

어떤 남자 그 어떤 여자도 

모두 다 똑같아

그 영원한 사랑을 믿고 싶겠지만

세상에 그런 건 없어

잠시 기댈 순 있지만 스쳐갈 인연

인생이 다 그래 너도 다 알잖아


 

돌아보면 에바의 삶에도 현재에 안주하고, 한 명의 여자로서 사랑받고 싶은 순간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본능적으로 편하고 안정적인 것을 지향하는 인간의 삶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욕망이다. 그러나 에바는 사랑받는 인물답게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끝내 에바가 도착한 사랑의 대상은 한 사람이 아니라 ‘아르헨티나’라는 이름의 대의다. 사적인 욕망을 지나 그는 국가를 향해 자신을 내던진다.

 

 

 

주인공은 하나가 될 수 없어


 

정치적인 이해관계에서 에바는 공식적인 주인공은 아니다. 대통령은 그의 남편 후안 페론이고, 권력 또한 그의 것이다. 그러나 에바는 기존의 퍼스트레이디가 수행하던 역할 그 이상의 존재다. 외교 활동, 사회복지, 여성 참정권 확대에 이르기까지, 그는 제도 밖에서 대중의 지지를 끌어모은 또 하나의 축이었다. 에바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 후안 페론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오래 남은 이유다.

 

‘에비타’에서 에바만큼이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 바로 ‘체(Che)’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쿠바 혁명 지도자로 1960년대 저항운동의 상징적 인물에서 착안한 이 역할은 극 중에서 나레이터로 기능한다. 에비타가 단순히 역사적 인물인 에바를 찬미하거나 미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가치 중립적으로 극을 관람할 수 있게 한다. 더 나아가 필요하다면 장면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다. ‘에비타’가 오랫동안 관객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에바라는 인물을 단순히 성공 신화의 평면적인 인물로 구현하지 않고, 다각화된 시선으로 볼 수 있도록 하는 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느 인물보다도 많은 넘버를 소화하고, 거의 모든 장면에 등장하는 그의 존재감은 가볍지 않다. 퍼포먼스적으로도 완성도가 높다는 점에서 체는 ‘에비타’의 또 다른 주역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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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더해 이번 공연의 앙상블은 ‘에비타’의 완성도를 끌어올린 숨은 주역이다. 평소 공연을 관람할 때도 무대 뒤편이나 앙상블 구성에 관심을 두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앙상블 진에게 더 큰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캐스트 보드에서 이들의 이름이 더 크게 적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의 연출(The Direction Of the Politics)


 

에바의 사회적 위치와 가치관의 변화는 시각적 연출을 통해 명확하게 드러난다. 디바로서 무대를 장악하는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에서는 스타성을 강조하는 핑크가 사용된다.

 

 

내가 왔어! Buenos Aires

잘 봐! 이제부터 무슨 일이 생길지 

기대해도 좋아 스타의 탄생


 

이후 ‘페론의 여자’, 퍼스트레이디가 된 뒤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하늘색 의상으로 갈아입는다. 마치 아르헨티나의 국기를 연상케 하는 이 색은 에바가 개인을 넘어 국가의 상징으로 다가서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어지는 흰색 의상에서는 군중의 천사로서의 이미지가 강조되며, 그가 국가의 얼굴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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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권력의 예술(The Art Of the Possible)’의 조명과 핸드라이트를 활용한 연출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조용한 권력 다툼의 현장을 긴장감 있게 전달한다. 이러한 섬세한 연출 덕에 대사의 공백이 덜 느껴지기도 했다.

 

 

 

영원을 노래한 여인, 에비타


 

누구도 영원을 경험한 적이 없지만, 영원을 노래한다. 에바 페론 역시 영원, 영원한 사랑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강한 부정 속에 오히려 영원을 소망했을지도 모른다. 사랑받고 싶은 한 사람의 욕망을 지나,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 그녀는 아르헨티나를 만났다.

 


Don’t cry for me Argentina

난 그댈 떠나지 않아

혼란 속에서 아픔 속에서

지킨 내 약속 날 믿어 줘요

나의 행운 명예 모두

그걸 원했던 건 아냐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말하지만

그건 환상일 뿐

내가 찾던 답은 세상이 아닌

내 마음 속에 있었죠

날 사랑해 주는 그대

 

 

에바의 진심은 아르헨티나에 전해졌다. 진심은 때 묻지 않는 순결함이 아니라, 언제 죽을지조차 모르는 연약한 인간이 남긴 외침에 가깝다. 영원은 없을지 몰라도 영원을 소망하는 마음은 오래도록 이어진다. 어쩌면 영원이라는 말은 그 존재와는 상관없이 그것을 노래하는 사람이 있기에 세상에 태어난 단어일지도 모른다. 에비타는 훗날에도 다시 그 영원을 기억하며 무대에 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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