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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죽었다! 예술은 죽어 있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 우리가 모두 그의 살인자다!”

 

책의 첫머리에서 울리는 이 선언은 다소 과장된 수사처럼 보이면서도, 이상하리만큼 지금 우리의 감각과 잘 맞물린다. 미술관에 가면 작품보다 ‘전시 인증샷’이 더 많은 반응을 얻고, NFT와 경매 뉴스는 작품의 감동보다 거래 금액을 먼저 말해준다. 예술이 죽었다는 말은, 사실 예술이 사라졌다는 말이 아니라 예술을 둘러싼 우리의 태도와 구조가 이미 크게 망가져 있다는 고발에 가깝다.

 

이 책의 흥미로운 지점은, 그 고발을 “예술계 내부자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2005년 원앤제이 갤러리를 설립해 한국 작가들을 세계 무대로 끌어올리고, 아트 바젤에서 발루아즈 상을 받은 유일한 아시아 갤러리를 이끌었던 저자는, 누구보다 예술의 ‘성공’ 시스템에 가까이 있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내린 결론은 “예술은 죽었다”는 냉정한 선언이다. 이 아이러니가 책 전체를 끌고 가는 힘이다.

 

 

 

누가 예술을 죽였는가


 

1부에서 저자는 예술이 어떻게 우리의 삶과 멀어졌는지를 추적한다. 자본주의와 목표지향주의, 그리고 소수 엘리트가 결합한 구조가 예술을 어떻게 ‘상품’과 ‘투자 대상’으로 바꾸어 놓았는지, 미술관과 경매 시장, 갤러리의 역사와 함께 짚어 나간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암굴의 성모』가 의뢰인의 요구 속에서 살아 움직이던 작품이었다면, 셰익스피어의 대중 공연은 관객의 반응을 받아 끊임없이 수정되며 삶과 뒤엉켜 있었다. 예술은 원래 “관객과 함께 숨 쉬는 실시간의 사건”이었다. 그런데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예술은 점점 자율성을 얻는 대신, 관객과의 연결이 끊어지고 엘리트주의로 미끄러져 갔다.

 

미술관은 이제 “예술이 죽으러 가는 곳”이 되었다. 작품은 삶의 한가운데에서 태어나고 소비되며 감정을 자극해야 하지만, 유리 벽과 설명 패널 뒤로 물러나 ‘기록물’이 되어버린다. 예술의 죽음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본디 예술은 삶이었다


 

그래서 저자는 2부에서 질문을 완전히 뒤집는다. “예술은 무엇이었나?”가 아니라 “예술은 본디 어디에 있었나?”라고. 답은 명료하다. 몸, 감각, 공동체, 그리고 다양성.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침묵의 퍼포먼스, 안토니 곰리의 신체와 공간을 다루는 작업, 올라퍼 엘리아슨의 빛과 환경을 활용한 설치들은 모두 ‘머리로 이해하는 예술’이 아니라 ‘몸으로 겪는 예술’을 보여준다. 이 책은 그 작품들을 단순히 소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왜 지금 우리에게 “몸과 감각의 회복”이 필요한지, 왜 다양한 정체성이 공존하는 플랫폼으로서의 예술이 중요한지 차근차근 설명한다.

 

재미있는 대목은 종교와 예술의 구조를 나란히 놓고 읽는 부분이다. 신의 진리를 독점하려는 자들이 종교 권위를 만들었듯, ‘좋은 예술’을 독점적으로 판정하는 권위자들이 예술계를 움직여왔다는 통찰이다. 예술은 원래 서로 다른 사람들을 연결하는 힘이었는데, 오히려 차이를 지우고 소수를 중심으로 세계를 재단하는 도구가 되어버린 셈이다. 여기서 저자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과연 예술이란 이렇게 소수의 손에 의해 정의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 질문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문장처럼 느껴진다.

 

소셜 미디어와 AI에 대한 논의도 흥미롭다. 저자는 소셜 미디어를 “창작의 문턱을 낮춘 도구”이자, 동시에 피상성과 과잉 노출을 부르는 양면적 매체로 본다. AI 역시 예술을 대체하는 위협이 아니라, 사진기의 발명처럼 예술의 본질을 다시 묻게 만드는 계기라고 읽는다. “사진기가 피카소와 반 고흐를 낳았다면, AI는 어떤 예술가를 낳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기술 공포를 넘어 예술의 다음 장을 상상하게 만드는 장면이다.

 

 

 

일상으로 돌아온 예술


 

3부의 초점은 예술의 ‘부활’이다. 저자가 말하는 부활은 거창한 이론이 아니라, 예술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장면들이다. 결과물이 아닌 과정, 소유가 아닌 경험, 대상이 아닌 상대로서의 작품.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체험 지향 전시와 다른 산업과의 콜라보를 다루는 부분이다. 톰 삭스와 나이키의 협업처럼, 상품과 예술이 충돌하며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내는 예가 등장한다. 소비자가 운동화를 사는 순간, 그것은 ‘작품 위를 걷는 경험’이 될 수 있다. 일상의 소비 행위가 예술적 실천으로 전환되는 이 순간에 저자는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본다.

 

예술이 미술관 벽에 걸린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사는 방법을 연습하는 장’이 될 수 있다면 어떨까. 서로 다른 정체성이 공존하는 프리다 칼로의 그림처럼, 예술은 다름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두면서 공존을 가능하게 만드는 플랫폼이 될 수 있다. 저자가 말하는 “다양성을 위한 플랫폼으로서의 예술”은 바로 그런 의미일 것이다.

 

『예술은 죽었다』는 예술에 대한 비관적인 진단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새로운 시작으로 제안한다. 예술이 죽었다는 말은, 예술이 움직이던 자리에서 우리가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직면하는 언어다. 그리고 그 언어를 통과해야 비로소 다시 묻게 된다.

 

나는 예술을 어디서, 어떻게 만나고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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