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올해도 '환승연애' 프로그램의 인기가 심상치 않다. 벌써 시즌 4에 이르렀지만 시청자들은 여전히 또 다른 커플, 또 다른 개인들의 말 못 할 사정과 얽히고설킨 관계에 집중하곤 한다.

 

비단 해당 방송만의 얘기는 아니다. '나는 솔로', '모태솔로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 '커플팰리스', '하트시그널', '연애남매', '솔로지옥', '남의 연애', '너의 연애', '썸바디' 등 지금까지 셀 수도 없이 많은 방식의 연애 예능이 존재했고, 그에 대한 관심과 반응 역시 크고 작게들 이어져 왔다.

 

이쯤 되면, 반복되는 방송계의 안일한 선택은 그렇다 치더라도 가장 궁극적인 질문이 하나 남는다.

 

"도대체 사랑이 뭐길래?"

 

때로는 불편하고 자주 종잡을 수 없는 이 크나큰 감정의 소용돌이에 우리는 왜 자꾸 빠져드는 걸까. 다른 관계들과는 달리 충동적으로 다가서거나 대책 없이 내어주기도 하면서. 빠르게 달아오르다가 한순간에 권태를 느끼기도 하면서.

 

여기, 가장 이기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이타적일 수 있는 이 모호한 과정을 툭 던져 놓은 채 관찰하다가도 섬세하게 풀어낸 한 영화가 있다. 이 난제에 실마리를 던져줄 그 도움을 한번 받아볼까 한다.

 

*


출발지와 목적지가 달라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지금은 가는 길이 같다 해도. 잠깐의 동행 속 요동치는 두 사람의 심정을 〈6번 칸〉은 실어 나릅니다. 모스크바에서 무르만스크까지, 10,000년 이상의 유적과 자원이 묻혀있는 곳까지. 우리의 근원을 알아가는 이 여정은 어제를 돌아보게 하고 오늘을 살아가게 하죠. 저마다의 이유로 관계에서 환승하는 순간들을 존중하면서 말이에요.

 


6번 칸 1.jpeg

 

 

라우라는 왜 료하에게 끌렸을까요? 너무나도 안락한 곳에서 따뜻하게 안아주고 바라봐 주던 아름다운 연인 이리나가 있었는데. 하필이면 쾌적하지 못한 기차 칸에서 만난 퉁명스럽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불청객이라니.

 

그는 첫 만남에서 묻지도 않은 러시아 찬양을 늘어놓고 상스러운 말을 지껄였잖아요. 안 그래도 같이 있기에 조마조마한데, 갑자기 숨어있다 놀라게 하거나 자기 기분 상했다고 토라지기나 하고. 아무렇지 않게 보드카를 들이켜며 야밤에 엑셀러레이터를 밟거나, 무턱대고 사업을 할 거라는 떵떵거림은 무모한 기질을 암시하죠. 근데 그 사람에게 왜 자꾸만 눈길을 줬을까요.

 

그건 아마 외로움이 느껴져서일 겁니다. 항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내 사람에게선 찾을 수 없던 공통점. 외지인이자 방문객으로 무리를 겉돌 동안 느꼈던 박탈감과 소외감이, 이방인이나 낯선 승객과의 대화에 영 끼지 못하는 그에게도 보인 거죠. 그럴 때마다 나는 애써 미소를 보이고 너는 굳은 얼굴로 거리를 뒀지만. 알고 보면 우린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고 직감했으리라 생각합니다.

 


6번 칸 2.jpeg

 

 

아니면 투박한 다정함이 눈에 들어와서일까요. 쉬어가야 할 손님들에게 친히 빈자리를 내어주고, 지루하게 혼자 있을 것 같으니 먼저 손 내밀어 보고, 두려워할 상황을 쫓아내고, 알고 지낸 할머니의 집에 들러 야무지게 챙겨주고, 속 깊은 얘기를 조용히 듣다가 이내 상대를 기분 좋게 만들려는 그런 애씀들. 매번 료하는 마음을 연 사람에겐 최선을 다합니다.


그는 이리나처럼 상트페테르부르크역에 내리자마자 헐레벌떡 말을 꺼내기도 전에 "벌써 돌아오려는 건 아니지?"라고 못 박거나, 기대하던 관광이 무산됐다는데도 건조한 반응에 괜히 시차를 묻게 하는 심리적 거리감을 느끼게 하지 않아요. 갑작스레 찾아와 새벽에 벨 소리를 듣게 할지언정, 길고 긴 수신음을 기다리게 하지 않죠.


그러니 어쩌겠어요. 자신을 그려준 소박한 그림 한 장에도 숨김없이 감동하고, 부질없는 짓이다 소리쳤으면서도 곧 품에 안겨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지 못하는 그를. 처음 배운 핀란드어 '엿 먹어(Haista vittu)'를 '사랑해'라고 순진하게 믿고, 삐뚤빼뚤한 그림과 함께 대문짝만한 글씨체로 마음을 전하는 그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겠어요.

 


6번칸 3.jpeg

 

6번칸4.jpeg

 

 

덜컹거리는 차체만큼이나 확신할 수 없는 마음이 흘러갑니다. 차창으로 보이는 아른한 풍경을 뒤로 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요. 나를 답답하게 하던 공기를 내보내고 어느새 우리를 휘감는 온기를 느끼면서. 서서히 찾아오는 감정의 변화를 체감하면서.

 


6번칸 5.jpeg

 

 

이번에는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암각화를 마침내 마주했을 때. 계절의 조건도, 날씨의 방해도, 부정적인 반응도, 다 뚫어 버리고 료하에 기대어 그곳에 도착했을 때. 하얀 설원 사이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녹지를 밟으면서 라우라를 감쌌을 청명한 대기를 상상해 봅니다.

 

아마 점점 선명해지지 않았을까요? 이리나의 바람에 편승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런 자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건 료하라는 걸. 결국 그 자리에서 확인한 건, 그를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는 마음이라는 걸.

 

마치 폭풍의 눈 속에 있듯 고요하고 평안해 보이는 풍경이 곧 사랑의 본질 같습니다. 거기까지 가기에는 많은 장애물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망설이고 불안해서 거리를 두거나, 실망하고 어려워서 포기하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말이죠. 그런데 그런 눈보라 속을 함께 뛰놀고 뒹굴 용기를 낸다면. 마음의 소리를 기꺼이 따라갈 의지가 있다면. 종착지는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들를 수 있는 경유지가 되지 않을까요.

 


6번칸 6.jpeg

 

 

저 역시 자주 도망가고 또다시 휘말리는 사람이라, 질문에 확실한 답을 줄 순 없었다는 걸 고백합니다. 다만 이 영화로 정의도, 형태도, 방식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랑'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되었어요.


그동안 최고로 쳐 온 사랑은 어쩌면 허물에 불과했던 것 같습니다. 닿을 수 없는 것만 같은 대상을 두고, 서로를 고양하고 성장시킬 수 있는 사이를 꿈꿨거든요. 그런데 그게 다는 아니더군요. 이 비루한 몸뚱어리가 바라는 건 그냥 당장 닿을 수 있는 너의 체온, 그거 하나뿐일 때가 많거든요. 관심 어린 시선, 세심한 보살핌, 헤아리는 마음. 이런 소소한 거 말이죠.


또 어디서 사는지, 얼마나 배웠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한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여러 기준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이상향이던 이리나도 동향으로 보이던 사샤도, 라우라가 아끼던 것들과 함께 예상치 못하게 멀어졌으니까요. 그것이 익숙함이건 안정감이건 추억이건 간에 말이에요.


흔들리는 카메라만큼이나 흔들리던 동공에 맺힌 건, 그저 꾸밈없이 표현하는 솔직한 행동들뿐입니다. 그렇게 사랑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내면의 작은 동물을 품은 우리의 영리함을 믿으면서.


*


사랑에 모양이 있다면

서로를 흐린 눈으로 바라보는

잡힌 눈매의 모양일 거야

착각 없이는 무엇도 사랑할 수 없으니까


그렇기에

맘껏 착각하는 것

그게 우리의 임무지


유선혜,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그게 우리의 임무지」 중.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명함.jpg

 

 

조예은이 에디터의 다른 글 보기
사색을 하고, 사진을 찍습니다.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