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라이트 감독의 영화 <어톤먼트>가 개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한 영화 논평 사이트에는 다음과 같은 감상평이 올라왔더랬다. “나는 한니발 렉터나 안톤 쉬거보다, 이 영화에 나오는 브라이오니가 더 두렵다.”
때로는 주인공보다도 더 강렬하게 주목받는 것이 악역이라, 영화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악역들을 나열하자면 날밤을 꼬박 새야 할 것이다.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쉬거는 그런 기나긴 악역의 리스트에서도 가장 앞 순위를 차지할 것이 분명한, 피도 눈물도 없이 냉철하며 악랄한 인물상의 대표격 되는 이들이다. 그러니 이 흥미롭고도 인상적인 한 줄짜리 감상평은 어톤먼트를 감상한 관객들에게서는 공감을, 감상하지 않은 이들에게서는 묘한 호기심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대체 브라이오니는 누구일까? 무슨 짓을 했기에 저 쟁쟁한 세기의 악역들을 제치고 가장 두렵다는 평을 듣는 것일까?
![[크기변환]어톤먼트(2).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11/20251109092700_bfpervwn.jpg)
<어톤먼트>는 한 소녀의 거짓말과 그 거짓말로 인해 삶이 송두리째 변해 버린 두 연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녀 브라이오니가 순간의 치기와 오해 탓에 내뱉은 거짓말은 브라이오니의 언니와 언니의 연인을 동시에 수렁으로 밀어넣는다. 하지만 브라이오니의 작중 행적이 오직 그뿐이었다면, 관객들은 이미 그 이름만으로 악역의 대명사가 된 이들에 브라이오니를 비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크기변환]어톤먼트(5).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11/20251109092747_xdrkvwtp.jpg)
영화의 초점은 브라이오니의 언니 세실리아와 그의 연인 로비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에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비극적으로 갈라진 두 연인의 일대기를 조명하는 듯하던 영화는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그 이전까지 차곡차곡 쌓아 올린 모든 예상을 배반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국면’에서, 브라이오니는 용서와 속죄라는 주제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시선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통상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속죄’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속죄를 내미는 브라이오니를 바라보며 관객들은 무언가 그릇되었다는 감각을 느끼게 된다.
이 불편하고 그릇된 감각은 부분적으로는 브라이오니에게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 무의식적으로 찾아드는 죄책감과 그 죄책감을 밀어내기 위해 지니게 되는 더 크고 더 잘못된 또 다른 믿음 - 이 죄책감과 믿음의 이중주란 우리네 삶에서 그리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아닌 탓이다. 브라이오니의 속죄로부터 우리 자신이 완벽히 유리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브라이오니를 더욱 이질적으로 느낀다.
![[크기변환]어톤먼트(3).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11/20251109092821_axczdxki.jpg)
영화의 원제인 ‘Atonement’는 ‘속죄’라는 뜻이다. <어톤먼트>는 그 이름답게, 영화가 끝난 이후 관객의 머릿속에 속죄와 관련한 여운 짙은 의문을 남긴다. 속죄의 자격은 무엇인가? 속죄에 자격을 부여하는 이는 누구인가?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하며, 받는 이 없는 속죄는 유효하다고 보아야 하는가? 어쩌면 <어톤먼트>는 속죄라는 대주제를 담은 하나의 기나긴 연극과 같을지도 모른다.
<어톤먼트>가 한 편의 연극과도 같다는 감상은 단순히 주관적인 느낌이 아니다. 감독은 영화 전체를 의도적으로 ‘브라이오니의 입장에서 구성한 한 편의 연극’처럼 연출하고 있다. 영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브라이오니의 시선'을 은유하는데,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단연코 사각 프레임, 창문, 거울 등을 통해 ‘엿보는 시선’을 연상케 하는 미장센이다. 카메라가 기둥이나 나무 등의 장애물 너머로 배우를 엿보는 구도는 여러 장면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창문이나 거울 등을 통해 대상을 간접적으로 힐긋 보는 장면 또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영화 속 모든 일의 시작점이었던 브라이오니의 ‘엿보기’라는 행위를 상기시킴과 동시에, 이 모든 장면이 누군가의 시선에 의한 ‘재현’일 가능성을 암시한다.
![[크기변환]어톤먼트(4).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11/20251109092841_uzzsbwqw.jpg)
또한 영화는 정극적인 요소의 활용을 통해 마치 이 모든 이야기가 한 편의 연극과도 같다는 은유를 한층 강화한다. 어머니에게 원고를 보여주는 브라이오니의 연극적인 몸짓, 폴과 롤라가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배우들이 보여주는 셔레이드(Charade) 등 근래의 영화에서 쉽사리 발견되지 않는 정극적 디렉팅이 극의 전반에 걸쳐 치밀하게 배치되어 있다. 극의 초반부 런던 저택을 배경으로 등장하는 수많은 대칭적 구도, 간호사가 된 브라이오니가 프랑스 군인과 대면하는 장면에서 뒤편에 깔린 붉은 커튼, 특정 인물을 조명할 때 배경이 암전되는 방식 등 연극적 요소를 가미한 화면 구성 역시 ‘연극 무대’라는 공간의 특수성을 함축하고 있다.
브라이오니의 시선을 따라가는 ‘연극’이라는 비유는, 극의 결말부에서 맞이하게 되는 ‘새로운 국면’과 합쳐질 때 비로소 명징해진다. 말하자면 <어톤먼트>의 모든 연출은 정해진 결말을 향해 남모르게 착실히 나아가고 있던 셈이다. 관객은 이야기가 끝난 이후에야 지금껏 지나왔던 모든 화면이 실은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크기변환]어톤먼트(1).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11/20251109092858_bczpqqzx.jpg)
정교한 연출, 힘 있는 서사, 영화가 끝난 후에도 이어지는 사유. 하나만 갖추어도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문제가 없을진대, 셋을 모두 갖추었으니 <어톤먼트>의 잔향음이 길고도 선명하게 남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세실리아와 로비 그리고 브라이오니의 이야기는 정해진 결말로 끝을 맞이했을지언정, 화면 너머의 우리에게는 여전히 결말이 없는 물음이 남아 있다.
베푸는 이 없는 용서는 어찌해야 할까. 받는 이 없는 속죄는 어찌해야 할까. 어쩌면 영화는 우리가 그에 관해 오래도록 생각하게끔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