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대화의 상대가 된다. '글쓰기는 스타일이다'가 내게 그랬다. 이 책을 펼치자 오래된 기억 하나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중학교 1학년, 처음으로 시를 접하게 해준 학원 선생님이었다. 그는 등단한 시인이자 문학 평론가였다.
선생님은 묘한 역설의 존재였다. 내노라하는 학군지의 학원에서 일하면서도, 유독 성적이나 입시와는 거리를 두려 애쓰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나에게 존 롤즈의 철학과 시인 최수영의 시를 건넸지만, 그것을 논술이나 내신의 도구로 삼지는 않았다. 그저 읽고 느끼라고 했다.
결과는 예견된 것이었다. 학생 수는 서서히 줄어들었다.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풍경은 이렇다. 거의 불이 꺼진 교무실, 쓰다 만 한글 파일이 열려 있는 모니터 앞에서 술에 취해 책상에 머리를 두고 주무시는 선생님. 그리고 그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서던 나. 선생님은 지쳐 있었다. 아니, 어쩌면 책상 한편에 놓여 있던 반 고흐의 '슬픔에 잠긴 노인' 그림이 내 기억을 과장한 것일 수도 있다.
선생님은 종종 자신이 쓴 시를 나에게 보여주곤 했다. 시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중학생에게 말이다. 나는 한편으로는 문학을 즐기는 청년으로 기대받는다는 느낌에 고양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의아했다. 저렇게 멋진 글을 쓰는 사람이 왜 나 같은 어린애에게 의견을 구하는 걸까?
부모님은 은근히 학원을 그만두길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이 정말 좋았다. 그와의 만남은 문학의 아름다움과, 모순으로 가득한 삶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졌다. 나는 언젠가 선생님처럼 보석 같은 존재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15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감정은 여전하지만 생각은 복잡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도 지금도 선생님이 희망 없는 일에 매달렸다고 생각하는 마음 한편이 있다. 문학에는 명확한 목적이 없다. 창작자조차 무엇이 자신을 충동질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자신이 만든 작품이 어떤 결과를 원하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더 가혹한 사실은 그 다음이다. 자신을 갈아 넣으며 만든 문학 작품의 가치가 결국 타인의 평가에 달려 있다는 점. 게다가 명성이나 금전적 이득을 얻는다 해도, 그것이 예술가 내면의 동기를 충족시킬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문학이 과연 자아실현의 영역일까? 자신의 어둠을 퍼내고 그것을 보편적 진리로 승화시키는 과정이, 그 개인에게 진정한 실현이 될 수 있을까? 카프카의 '성'이 떠오른다. 닿을 수 없고, 닿기를 원하는지조차 불분명한 곳을 향해 수많은 K들이 고통스럽게 나아가는 그 이야기가.
그로부터 15년이 흐른 오늘, 그 선생님과 똑 닮은 '글쓰기는 스타일이다'를 집어 들었다. 책장을 넘기는 순간, 오랜 시간 잊고 있던 그 시절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재판된 이 책을 읽는 것은 마치 선생님을 다시 만나는 것 같았다.
'작법 노하우'라는 소개를 보고 독자들은 구체적인 기법이나 분석법을 기대할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는 평론가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지는 '광장' 부분을 제외하면, 한 문학가의 에세이에 가깝다. 국어를 가르치는 대신 시를 읽혔던 선생님처럼, 저자는 문학을 쓰는 방법보다는 문학가로서의 삶 자체를 생생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그 삶을 위로하는 듯 보인다. 이 책은 '읽는 사람'보다는 '쓰는 사람'에게 더 깊이 와닿을 것이다. 저자 역시 그들을 염두에 두고 쓴 것처럼 보인다.
읽기 위해 쓰는 행위에 익숙한 나로서는, 책에 재현된 '문학가의 삶'이 다소 비현실적으로, 그래서 오히려 피학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곧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답답하고 긴 과정을 기꺼이 견디는 삶에 이 정도의 비현실성마저 없다면,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게다가 나는 그들의 피 깎는 노력으로 탄생한 결과물에 빚지고 있는 독자다. 책 전반에 깔린 감정을 함부로 판단하기 어려웠다. 특히 후반부에서 헤밍웨이, 멜빌, 카뮈, 헤세 같은 작가들의 글에서 느껴지는 묵묵한 극기의 정신이 그 인상을 더욱 강화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글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미세한 순간들과 마주하게 된다. 한 문장을 쓰기 위해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날들,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에 스스로 답하느라 소진되는 밤들, 그리고 그럼에도 다시 책상 앞에 앉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함. 저자는 이런 순간들을 낭만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당신만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해줄 뿐이다. 어쩌면 이것이 이 책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위로일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며 새삼 깨달은 것이 있다. 문학가들이 목적 없는 일에 매달린다고 말했지만, 그들이 그 일을 지켜온 덕분에 우리에게는 언어가 있다는 것이다. 삶의 어둠을 견디게 하고, 고독을 나누는, 우리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는 언어의 보물들. 저자가 이 책에서 보여준 것은 단순한 작법이 아니라, 그 언어를 지키기 위해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증언이었다.
그리고 그 증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재판된 이 책을 읽으며, 저자가 초판 이후에도 '비슷한 생각'을 지켜왔다는 사실에 묘한 슬픔과 안도감을 느꼈다. 나에게는 잊고 있었던 선생님이 세상이 변해도 문학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그 본질을 지키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고 증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책 이야기는 단지 한 권의 책이 아니라, 문학이라는 화톳불을 다음 세대로 넘겨주는 행위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화톳불 앞에서 잠시 손을 녹인 사람으로서, 그것을 여기까지 옮겨온 모든 이들에게 감사한다.
책을 덮고 서문을 떠올렸다. 재판 이후에도 '여전히 비슷한 생각'이라고 밝힌 대목.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선생님이 희망 없는 일에 매달린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나도 문학의 목적 없음, 그 가혹한 본질 앞에서 여전히 비슷한 생각을 한다. 하지만 동시에 알게 되었다. 그 희망 없음 속에서도 계속 쓰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남긴 것으로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을.
읽기 위해 쓰건, 쓰기 위해 읽건, 나와 작가 사이에는 분명한 선이 그어져 있다. 하지만 그 한 장의 경계 속에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한다. 아마도 그것은 예술 속에서만 자유를 찾는 이방인으로서의 감각일 것이다. 선생님도, 이 책의 저자도, 어쩌면 나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