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 아담 랩
연출/번역 박천휴
제작 라이브러리 컴퍼니
출연 서재희/문소리(벨라 역), 강승호/이현우/이석준(크리스토퍼 역)
장소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일시 2024.8.13.-2024.10.27.
한 명의 배우와 코러스만으로 드라마를 이끌던 고대 그리스 연극을 바꾼 것은 그리스 3대 비극 작가 중 한 명인 아이스킬로스다. 그는 코러스를 축소하고 무대 위 배우를 두 명으로 늘려 무대 위에 대화를 등장시켰다. 상호작용이 가능한 두 등장인물의 대화가 연극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아이스킬로스의 바람을 누구보다 잘 표현한 2인극이 있다.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2024년 10월 27일까지 공연된 연극 <사운드 인사이드>이다. 이 작품은 2020년 브로드웨이에서 처음 공연되었으며, 6개 부문으로 2020 토니어워즈 후보에 오르고 여우주연상을 거머쥐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어쩌면 해피엔딩>, <일 테노레> 작사를 맡았던 박천휴의 연출 데뷔작으로 2024년 국내 초연을 선보였다.
대화의 시작은 충돌
17년째 신작을 쓰지 못하는 소설가이자 예일대 문예 창작 교수 벨라의 연구실에 그의 수업을 듣는 학생 크리스토퍼가 찾아오면서 두 인물의 대화가 시작된다. 다짜고짜 찾아온 크리스토퍼는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을 봐달라고 하고, 대화 중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바닥에 침을 뱉는 등 막무가내로 행동한다. 벨라는 이에 당황하고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만남을 지속하고 문학을 매개로 대화하면서 두 사람은 점차 가까워진다. 이내 두 사람은 서로의 작품 세계 그 너머 인생 자체를 이해하고 교수와 학생 이상의 관계로 넘어갈 듯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이때 벨라의 신체에 생긴 이변은 그들의 이야기를 절정으로 이끈다.
‘남’에서 ‘우리’로
벨라와 크리스토퍼의 첫 만남에서 그들의 대화는 거칠고 방향을 잡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사전에 이메일로 신청해야 교수와 면담을 할 수 있다는 벨라의 말에 크리스토퍼는 위대한 고전 소설가들의 문학이 인정받은 것은 페이스북, 트위터 등 한심한 SNS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결과론적 주장을 늘어놓고는 화를 내면서 항변한다. 이 장면에서 크리스토퍼는 교수의 말에 대답했다기보다는 그 긴 독백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기 위해,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라는 마음에 면담 요청 절차를 알면서도 일부러 벨라의 연구실 문을 두드린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는 크리스토퍼가 히스테릭한 소설가 어머니, 그를 버린 아버지와 정서적으로 깊이 연결되지 못한 결핍이 이후 드러나면서 확실해진다.
그런 그의 이야기를 듣는 벨라는 극의 초반 독백에서 자신 글 쓰는 법과 우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 같다고 표현한다. 들어주길 바라는 사람과 말을 잃은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퍼즐처럼 맞물린다. 처음엔 연구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불편한 대화를 나누었던 두 사람은 바닥에 나란히 앉아 과거 이야기를 하며 와인을 나눠 마실 정도로 가까워진다.
‘우리’에서 ‘나’로
크리스토퍼는 벨라와 만날 때마다 자신이 새로 쓰고 있는 소설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설명한다. 벨라는 글쓰기 수업을 하지만 정작 자신은 글을 쓰지 못하는 상황임에도 크리스토퍼를 다정하게 격려한다. 설상가상으로 위암 2기 판정받은 벨라의 삶은 절망으로 떨어진다. 정신과 신체 모두 망가진 그는 죽음을 선택하기로 하고 크리스토퍼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약물로 자신의 존엄사를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크리스토퍼는 이를 수락하고 안락사용 수면제를 주입한 뒤 벨라의 의식이 끊긴다. 다음 날 아침 영원한 잠 대신 눈을 뜬 벨라에게는 크리스토퍼가 눈 쌓인 공원에서 얼어붙은 시신으로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벨라의 소설 <벽을 뚫고 달리는 빌리 베어드>의 주인공 빌리 베어드는 자신이 벽을 뚫을 수 있다고 떠벌리다 모두의 앞에서 이를 증명하기 위해 시속 36km로 벽을 향해 달려가 목이 부러져 죽는다. 빌리의 친구 세실은 그 모든 과정을 기록한 일기장을 건강하게 돌아온 빌리에게 건네고 빌리 대신 냉장고 속으로 돌아가지만, 세실의 망상일 뿐이다. 긴 고독으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목이 꺾인 벨라에게 첫 소설 <눈 덮인 들판에 누워>를 남기고 추운 겨울밤 공원 향한 크리스토퍼의 이야기는 현실이다. 벨라의 소설에서 불가능했던 일은 크리스토퍼의 현실에선 가능하다. 그 자체로 크리스토퍼는 역설이며 반전으로 벨라의 삶에 녹아든다.
벨라는 크리스토프의 부고를 듣고 항암 치료를 다시 시작하고 건강관리를 한다. 그는 암이 성공적으로 호전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 폭식하고 자신이 ‘영원히 살 것만 같다’며 울부짖는다. 오랜 시간 외로이 지내며 차단된 줄 알았던 생존 욕구가 폭식을 시작으로 희망과 함께 눈을 뜬다. 극 중 초반 벨라의 서술처럼 절필한 지 17년이 된 미혼의 중년 여자 교수가 암에 걸려 세상에서 조용히 사라질 일만 남은 뻔한 전개는 크리스토퍼가 없앴다. 그 교수의 생명을 살릴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인생에서 극적 반전과 예상치 못할 사건을 던지는 장치를 설치하면서 크리스토퍼는 인생의 역작을 남긴 채로 벨라의 인생에 탑승한 것이다.
네 안의 소리를 들어라
벨라는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깨닫기 위해 쉬지 않고 무엇이 든 글로 쓰라고 한다. 그는 같은 방법으로 글을 쓰면 항상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자신과 대화하는 것을 의미하고, 곧 이 연극의 주제가 된다. <사운드 인사이드>는 두 인물의 충돌을 통한 벨라의 현실 인식에 이어 크리스토퍼를 잃은 벨라의 내밀한 자기 인식을 통해 삶의 욕구를 되찾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연극의 흥미로운 연출은 등장인물들이 다음 장면에서 필요한 소품을 암전 때 가져오지 않고, 극이 시작하기 전부터 미리 무대 곳곳에 놓아진 소품을 필요할 때마다 무대 중앙으로 끌어와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는 관객이 공연 시작 전 객석에 앉아 무대를 둘러보며 어떤 장면에서 어느 소품이 사용될지 상상할 수 있도록 호기심을 자극한다. 또한 공연 중 배우들이 소품을 가져올 때 소설에서 작가가 복선을 회수하는 과정을 눈으로, 메타적 입장에서 관람하듯 재미를 느끼게 한다. 360도 돌아가는 원형 무대는 특정 방향에서만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는 돌출 무대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자칫 지루할 수 있는 2인극의 분위기를 환기한다.
내면과 외면을 넘나드는 대화와 갈등, 화합으로 이어지는 <사운드 인사이드>는 크리스토퍼의 죽음만 본다면 비극이지만, 제2의 삶을 선물 받은 벨라의 인생은 계속된다는 점에서 희극이기도 하다. 아이스킬로스가 현대로 넘어와 2인극의 장점을 극대화하면서도 한계를 극복한 이 연극을 본다면 흐뭇하게 웃지 않을까? 신선한 연출과 섬세한 대사, 확고한 주제 의식이 조화로운 연극이므로 그에게 자신 있게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