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무엇이든 창조할 수 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유를 발전시키는 일에는 한계도 정답도 없다. 세상 모든 것은 이름과 의미를 붙이기 나름이므로 그 쓸모를 따지기 시작한다면 예술의 가치는 떨어지기 마련이다. 모든 예술을 무지성으로 받아들이는 말은 아니다. 예술을 보는 시각은 저마다 다르고 부여되는 가치도 생각하기에 달려있으니까. 비판도 예술에 없어선 안 될 시각이다. 하지만 이 글은 비판과 수용과 같은 의견에 관한 것이 아니다. 어떤 예술에 대해 사고하고 논설하기에 앞서 창작물에 다가갈 때 예의에 관한 것이다.
공연 관람 시 기본 예절을 지켜주세요.

어느 주말, 조선 왕릉 축전 소식을 접하고 나들이를 다녀왔다. 서울 근교에서 진행해서 접근성이 좋았지만 장릉 중에서도 김포 장릉으로 향했다. 조선 왕릉 축전은 조선왕조 500년 이야기를 솦속 공연과 음악으로 생생하게 만날 수 있게 마련되었다. 든든하게 점심을 먹고 장릉으로 향했는데 공연 장소까지 가는 길이 내 눈을 초록으로 가득 채웠다. 최근 휴대폰을 비롯해 전자 기기와 한 몸이 될 수밖에 없는 일투성이라 자연스레 눈은 지치고 피로해 있었는데, 확실히 초록을 보니 머리가 맑아지고 숨이 깨끗해지는 기분이었다. 푸른 하늘과 연둣빛의 풀, 사이사이 가을의 붉은 색이 피어나기 시작한 나무 길을 산책하듯 거닐다 보니 시간 맞춰 공연장에 도착했다. 해당 일자에 김포 장릉에서 공연하는 팀은 ‘라폴라예술연구소’라는 단체였다.
그들이 등장하기 전, 햇빛이 비추어 노란끼 가득한 무대 앞 좌석들은 하나둘 사람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고 나도 가족들과 함께 자리를 잡았다. 금세 사람들이 모였고 진행자의 멘트 뒤에 라폴라예술연구소가 무대에 올랐다. 이들은 전통음악을 다양한 방식으로 매만져 대중에게 소개하는 젊은 음악단이었다. 야외 공연장에 그들의 음악이 울려 퍼지고 마치 사극에라도 들어온 것마냥 이입이 되었던 그때, 뒷자석 사람들의 목소리도 함께 울려 퍼졌다.

악기 하나하나 섬세한 연주에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따라가고 있었던 차였다. 평화로움을 깨는 목소리에 뒤돌아보니 초등학생처럼 보이는 친구 2명이 앉아 무언가를 조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아버지로 보이는 분도 계셨다. 처음에는 내가 예민한 건 줄 알고 무료공연에 야외 공연이니 감수해야 할 점으로 생각해 참았다. 하지만 몇 번 눈길을 주어도 아이들은 큰 목청으로 떠들며 조립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무료여도 이건 아니라고. 아무리 야외여도 이건 아니라고. 아무리 어려도 이건 아니라고. 아이들이야 모를 수 있다고까지 이해해봤지만, 그 옆에 어른으로 앉아있는 아버지까지 공연 시 관람 예절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아이들 조립품을 옆에서 건네주기 바빴으며 음악 감상에는 전혀 관심 있어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주의 주고도 어쩔 도리가 없어 난처해 보였다면 그래도 나는 이해해보려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끝내 내가 자리를 옮겼고 멀리서 그들 셋을 바라보며 확신했다. 저들은 그저 앉을 곳이 필요했던 거구나. 자리를 옮긴 뒤 내 자리에 다른 친구들이 앉았는데, 그 친구들의 좌석을 발로 차고 시끄럽게 떠드는 것 또한 발견했다. 그래도 누군가는 열심히 준비했을 공연인데, 준비된 좌석이 관람 좌석이 아닌 그저 엉덩이 붙일 의자로 쓰였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영화관은 엄연한 공공장소입니다.
올해는 유독 영화관에서 눈살을 찌푸리는 일이 많았다. 지금까지 영화관을 다니며 이런 일이 안 생긴 게 운이 정말 좋았던 거란 걸 깨달았다. 한번은 독립영화관에 갔을 때 일이었다. 지역 주민들 방문이 활발한 곳이라 일반 영화관보다는 자유로운 분위기일 수 있겠구나 싶었지만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물론 모든 주민이 그럴 것이라는 게 아니다. 한두 명 때문에 그런 인식이 자리잡히는 건 스스로 경계하는 편이다. 해당 영화는 1시간 남짓의 단편 상영이었는데 건너편에 앉은 아주머니 두 분께서 근 40분을 궁시렁거리셨다. 처음엔 새어 나오는 감탄사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리액션은 곧 수다가 되었다. 영화 속 인물을 보며 이러면 안된다느니, 저러니 저 지경이라느니 끝없는 비난과 리액션이 이어졌다. 그 안에 많은 사람이 있지는 않았으나 꽤 좌석이 채워졌었고 곧이어 관람객의 대부분이 아주머니들을 쳐다봤다.
숨소리조차 선명한 대사를 주력으로 이루어진 극이었으므로 조금이라도 놓치면 집중이 흐트러지기 쉬웠다. 이미 집중이 다 깨져버린 나는 참을 인 세 번을 그린 후, 아주머니들께 주의 주려 일어나려던 참이었는데 그때, 아주머니들 앞 좌석에 여자분이 총대를 메셨다. 용기 있고 존경스러운 행동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영화는 10분 정도 남아있었다. 그래도 10분이라도 집중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과 예의 없는 관객에 대한 허탈함으로 영화 시청을 마무리했다.
비슷한 사례가 하나 더 있다. 이번엔 상업 영화관을 찾았을 때였다. 관람객은 나 포함 10명도 채 되지 않았고 큰 영화관이었음에도 어째선지 모두 가운데에 다닥이 붙어있었다. 영화 시작 전 아무 좌석이나 예매한 것이라 해당 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고 크게 명당 자리였던 것도 아니다. 여유롭게 영화를 관람할 수 있겠다고 예상했던지라 내 바로 옆에 한 부부가 앉았을 때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앉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영화 시작과 동시에 당황스러움은 내려앉았다. 더 당황스러웠던 건 옆 부부의 노가리 타임.
소위 말해 자기 집 안방인 줄 알았다. 그렇게 떠드는 건 가족들과 거실에서 둘러앉아 영화를 볼 때나 볼 수 있는 풍경인 줄 알았는데, 그게 영화관이라는 공공장소에서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는 행위라니. 이쯤 되니 내가 이상한 건가 싶었다. 이 영화 또한 적막이 많았고 그 적막이 주는 긴장감이 묘미였기에 그 공간에서 집중력을 발휘하기란 클럽에서 책 읽는 것만치 어려운 일이었다. 말을 한다고 부끄러워할 것 같은 인상이 아니어서 그냥 포기하고 다른 좌석으로 옮겼다. 2시간 밖에 안하는 영화를 그 사람들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놓치긴 싫었다.
누군가 어떤 마음을 품고 열심히 빚어낸 창작물이 모두의 마음에 들 순 없다. 취향인 사람이 존재하는 반면에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평가받기 이전에 향유할 수 있는 기회는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져야 하지 않나. 설령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 또한 온전히 겪어봐야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창작자 본인도 아닌, 다른 이에 의해 그 기회가 박탈되는 건 너무도 아쉬운 일이다.
작품과 예술과 문화를 향유하는 방식과 속도는 모두 다르다. 한 개인 안에서도 똑같은 작품을 1번 봤을 때, 2번 봤을 때가 다르고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그 무수한 반응의 가능성 사이에서 바라는 건 그저 작품을 오롯이 마주할 수 있는 기회다. 그거면 된다. 그 기회를 각자가 음미할 수 있도록 서로 예의를 지킨다면 창작자와 작품에 대한 예의도 지킬 수 있으니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예절을 다했으면 좋겠다. 더 많은 예술이 진심어린 마음으로 우러나올 수 있도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