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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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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장바구니 철학이란


 

좋은 직업을 이야기하면서 장바구니라니, 조금 생뚱맞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직도 좋은 직업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그걸 찾아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조금은 알 것 같다.


그 방법은 대단한 비밀이 아니라, 마트의 통로를 천천히 걸으며 장바구니에 물건을 하나씩 담는 일과 닮아 있다.


좋아하는 일, 내 마음이 움직였던 순간, 그날의 감정과 소소한 기쁨의 기억을 하나씩 조심스레 담아두는 일. 지금은 사소해 보일지라도, 언젠가 그 모든 조각들이 모여 나라는 사람의 일, 그리고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직업의 모양을 만들어줄지도 모른다.


사뭇 진지하게 돌아보니 이해인 시인의 시 「친구야 너는 아니」의 한 구절이 문득 마음에 남는다.


 

꽃이 필 때

꽃이 질 때

사실은 참 아픈 거래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아 줄 때

사실은 참 아픈 거래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피어나고, 그 속에서 나름의 불안과 상처를 견디며 자라난다는 뜻일 것이다. 모든 꽃이 같은 계절에 피지 않듯, 같은 햇살 아래서도 각자의 속도로 피어난다. 어떤 꽃은 서늘한 그늘에서 오래 머물다 피어나고, 또 어떤 꽃은 따가운 햇살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만의 색을 지켜낸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저마다의 시간과 방식으로 성장한다. 때로는 주저앉고, 때로는 다시 일어서며, 그 과정 속에서 자신만의 향기를 만들어간다.

 

 


제 2장. 우선 장바구니부터 만들기


 

고등학교 입학 첫날, 담임 선생님은 나를 소개하는 글이라는 제목의 종이를 한 장씩 나눠줬다. 이름, 인적 사항,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에는 희망 직업을 적는 칸이 있었다. 친구들은 망설임 없이 교사, 간호사, 의사 같은 단어를 써 내려갔지만, 나는 그 칸 앞에서 연필을 멈췄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까지 나는 한 번도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나를 설명하는 문장들 사이에서 유독 그 한 칸만은 비어 있었다. 결국 종이를 다 채우지 못한 채 집으로 가져왔고, 부모님께 물었다.


“엄마 아빠는 어릴 때 무슨 꿈을 꿨어요?”


아빠는 잠시 생각하더니 “건축가가 되고 싶었는데, 지금은 회사원이야.”라고 했다. 엄마는 “글쎄. 기억이 안 나네. 지금은 요양복지사로 일하고 있지.” 하셨다. 그런데 두 분 모두 덧붙였다. “그래도 지금 일이 좋아.”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어릴 적 꿈과 현실의 직업이 달라도, 그 일을 좋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건 좋은 직업이 아닐까. 그날 이후로 나는 좋은 직업이란 무엇일까를 혼자 오래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에서 실마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때 내가 가장 좋아하던 건 책이었다. 학교 도서관의 먼지 냄새, 손끝에 남는 종이의 감촉이 좋았다. 그래서 책을 좋아하면 할 수 있는 직업을 검색해 봤다.


작가, 번역가, 서점 주인, 출판 편집자. 그중에서도 내 마음을 가장 세게 두드린 단어는 출판 편집자였다. 활자와 사람을 연결하고, 문장을 다듬어 세상에 내보내는 일이라니.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어떤 단어는 사람의 방향을 정해버린다는 것을. 나에게는 편집자가 그랬다. 내 이름 뒤에 출판 편집자라는 직함이 붙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내 첫 번째 꿈이었고 '출판 편집자'라는 이름을 단 장바구니에 내 손에 쥐어졌다.

 

 

 

제 3장. 엉성해 보여도 일단 물건 채우기


 

그 이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무언가 책 비슷한 형태를 만들고 싶어서 친구들을 모아 작은 잡지를 만들었다.


<우리들의 꿈과 미래>라는 제목으로 발행인 겸 편집인, 제작 총괄, 편집위원, 기획 모두 나였다. 주제는 엉성했고, 디자인은 더 엉성했다. 폰트 하나 맞는 게 없었다. 내용은 더 가관이기에 독자분들의 상상에 맡기고자 한다. 그래도 우리는 밤늦게까지 모여서 기사를 쓰고, 사진을 붙이고, 제목을 고민했다. 당시 한 친구가 좋아하던 그림 작가가 있어 그분의 인터뷰 내용을 따와 우리끼리 가상 인터뷰를 만들기도 했다.


내 장바구니에는 하나의 물건이 담겼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학급 문집을 만들었다. 그때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보면 웃음이 나온다.


폰트도, 이미지도, 문단 간격도 제각각이다. 책 내지를 편집하는 프로그램인 인디자인을 몰라서 한글 파일 하나에 사진을 일일이 붙이고, 페이지마다 텍스트 상자를 손으로 맞추며 며칠을 씨름했다. 새벽까지 앉아 있다가 잠이 들었고,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오늘은 어디부터 수정하지?”를 생각했다. 힘들었지만 이상하게 그 시간이 좋았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서툰 손끝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 과정을 견딜 수 있었던 건 그 일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문예창작학과에서 공부하며, 그때 품었던 꿈을 조금씩 구체화하고 있다. 글을 쓰는 법을 배우고, 글이 책으로 태어나는 과정을 배우며, 종이 한 장의 무게를 새삼 실감한다. 예전엔 손으로 어설프게 만들던 잡지가 이제는 인디자인과 교정지를 오가며 점점 모양을 갖춰간다.


실제로 작은 책을 내보기도 했고, 활자 하나하나가 독자에게 닿는 길을 상상하며 긴 시간 책상 앞에 앉아 있다. 

 

하나 더 담았다. 어느새 장바구니는 꽤 무게가 나가는 듯하다.

 

 

 

제 4장. 장바구니 = 좋은 직업?


 

이러한 과정 속에서 나는 여전히 좋은 직업이란 무엇일까를 묻는다.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다. 좋은 직업이란, 내일도 다시 이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걸.


그 일이 반드시 세상에서 인정받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종종 좋은 직업을 사회가 정한 몇 가지 틀 속에서만 찾는다. 안정적이고, 명예롭고, 돈이 되는 일. 하지만 그런 기준으로만 본다면, 세상에 좋은 직업은 극히 소수에게만 주어질 것이다.


그 대신, 내 삶을 살아있게 만드는 힘이 있다면 충분하다. 버겁고 무의미해 보이는 날도, 결국 그 일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남는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직업이다. 책 한 문장을 다듬는 일이 나를 다듬는 일이듯, 직업을 통해 배우는 가장 중요한 것은 과정 그 자체다.

 

 

 

제 5장. What's In My Shopping Basket


 

여기까지가 내 장바구니 철학이었다. 많은 독자가 고개를 끄덕일지는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는다. 좋은 직업을 찾는 일은, 마트 장바구니에 먹고 싶은 것들을 담는 것과 같다. 이건 어떤 맛일까, 저건 어제보다 더 나은 선택일까, 궁금해서 담는다. 그렇게 장바구니는 점점 무거워지고, 그 속에 살아온 시간들이 쌓인다.


출판 편집자라는 꿈을 장바구니에 크게 써 붙이고 그 안에 차곡차곡 하나씩 담았다. 직접 만든 잡지, 문집, 책, 교정·교열을 봤던 원고들, 내 노력과 실패까지도.


직업도 그럴 것이다. 완벽한 정답을 고르기보다, 일단 해보고, 담아보고, 때로는 버리기도 하면서 나에게 맞는 일을 찾아가는 것. 그렇게 조금씩 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나는 아직 그 장바구니를 다 채우지 못했다. 하지만 책과 글, 그리고 오늘의 문장 하나가 내 안에 담겨 있다는 사실이 좋다.

 

좋은 직업이란, 어쩌면 그렇게 하루하루의 ‘담기’를 포기하지 않는 마음 아닐까.


내 이름 뒤에 어떤 직함이 붙든, 나는 그 일을 통해 더 단단해지고, 더 섬세해지고 싶다.

 

좋은 직업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살아 있는 과정 속에서 조금씩 증명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건 책을 만드는 일과 닮아 있다. 한 문장씩 고쳐가며 자신을 더 낫게 만드는 일.


그러니까 어서 빨리 장바구니를 손에 쥐기를. SNS에서 유행하는 'What's in my bag'이 'What's In My Shopping Basket'으로 바뀌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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