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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가장 보수적이었던 빅토리아 시대. 그 당시 여성은 결혼을 통해서만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안정을 얻을 수 있었고, 법적으로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받지 못했다. 오로지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아내이자 어머니'라는 여성의 이미지만 이상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동시에 중상류층과 노동자 계급 사이 뚜렷한 계층적 분열이 있었다. 빅토리아 사회의 중상류층은 스스로를 ‘신사’라 부르며 도덕적 품격과 교양을 중요시 했다. 하지만 하층민의 실질적인 어려움에 무관심했으며 그들을 지도를 받아야 할 존재로 여겼다.


노동자 계급의 여성인 안나는 피라미드의 가장 밑바닥에 있었다. 험난해 보이는 그녀의 여정은 ‘난 뭐지(넘버 1)’에서 시작된다.

 

 

 

나는 나야 나는 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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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는 (‘레드북’의 모든 인물이 사랑스럽지만 특히 더) 사랑스럽다. 세상 사람들이 그녀를 구박해도 주눅들지 않고 언제나 당당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슬퍼질 때는 야한 상상을 하며 이겨내고, 솔직하고 발칙한 이야기를 부끄럼 없이 말한다. 누구보다도 자신을 사랑하기에 항상 자신감이 흘러 넘친다.


그녀 내부에 박혀 있는 ‘안나’라는 이름이 너무 단단해서 누구도 뽑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안나는 그저 조금 특이한 여자로 살아간다. 그러던 중 예전에 일했던 저택의 주인 바이올렛 부인이 남긴 유산을 전하기 위해 브라운이라는 변호사가 찾아온다. 일자리를 찾고 있던 안나는 브라운에게 자신을 고용해달라고 부탁한다.


보수적이고 고지식한 브라운은 안나의 당당함과 솔직함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는 ‘그대 눈빛 속에 무언가 특별함이 있(넘버 4. 그대를 기대해요)’다는 거짓말로 안나를 밖으로 쫓아낸다.


안나는 브라운의 말이 거짓말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브라운의 변명 같은 말도 그녀만의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꾸어 진짜 자신이 꿈꾸는 일을 발견해낸다. 아무래도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이 그녀만의 특별한 힘인가보다.


안나는 글을 쓰기 위해 ‘로렐라이 언덕’이라는 여성문학회로 향한다. 이곳의 여성들은 솔직한 욕망과 자율적인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구속하던 세계를 벗어난다. 글쓰기는 자기 욕구와 감정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행위로서 그들을 독립된 인격체로 자라나게 한다.


 

안나.

우린 이상한 게 아니에요.

우린 우릴 위로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거에요.


넘버 7. 우리는 로렐라이 언덕의 여인들 中

 

 

안나는 ‘로렐라이 언덕들’이 지향하는 ‘여성의 글쓰기’를 그 자체로 구현하는 인물이다. 안나의 인생은 항상 그녀의 이름을 있는 그대로 지키기 위한 행위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안나의 첫 소설이 수록된 잡지 ‘레드북’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다. 여성이 스스로 성적 욕망과 신체를 묘사하는 글이 담겨 당시로선 파격적인 성인잡지였다. 여성 작가들은 남성의 이름을 빌려야 했던 시대였지만 ‘레드북’은 독립 출판과 직접 판매를 통해 여성들이 자신의 이름을 감추지 않고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안나는 저명한 평론가로부터 평론 의뢰를 받게 되지만 그녀가 가장 인정받고 싶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브라운이었다. 그러나 레드북은 모두가 몰래 사서 읽으면서도 동시에 불결하다며 손가락질하는 잡지였다. 신사의 체면을 우선시하는 브라운을 보고 안나는 처음으로 상처를 받는다. 세상의 비난에도 무너지지 않던 그녀였지만 좋아하는 사람의 부정 앞에서는 흔들린다.


그럼에도 안나는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는다. 세상의 기준으로 자신을 스스로 ‘나쁘고 야한 여자’라 부르며, 그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방식이라면 그 길을 가겠다고 다짐한다.

 

 

 

사랑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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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 여성이 자신만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는 이야기에 곁들여진 유쾌하고 발칙한 로맨스, 그 주인공 브라운은 친구로부터 어느 부인의 이혼 소송을 변호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을 지표’라고 믿는 브라운에게 안나는 형태를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사랑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랑을 이해하는 일은 곧 타인을 이해하려는 시도와도 같다.


안나의 조언에 따라 브라운은 법정에서 사랑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며 법관들을 설득한다. 이때 안나의 솔로 넘버와 다른 가사의 리프라이즈(reprise. 반복되는 넘버)가 인상적인데 법관들을 다루는 스킬에 이전과는 브라운이 다르게 보인다.


 

두둥실 떠다니다 스르륵 흩어지는 구름의 모양을 하나로 말할 수 있나요

투명한 아침부터 어두운 새벽까지 하루의 빛깔을 어떻게 정할 수 있나요


넘버 9. 사랑은 마치 中


 

고결한 인격부터 눈부신 외모까지 수많은 매력을 하나로 말할 수 있나요 (없어요)

날마다 늘어가고 갈수록 높아지는 매력의 한계를 어떻게 정할 수 있나요 (몰라요)


넘버 12. 사랑은 마치 Rep. 中

 

 

브라운은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안나의 소설 ‘낡은 침대를 타고’를 읽는다. 그 안의 인물이 자신을 닮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나가 말하던 ‘올빼미’의 의미를 비로소 이해한다. 하지만 그는 안나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를 향한 자신의 감정조차도.


자신의 좁은 세계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브라운이 답답하지만 로렐라이 언덕의 실체를 알아내기 위해 여장까지 하고 잠입하는 정성을 보면 조금 용서하고 싶어진다.


안나를 향한 호감과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 속에서 브라운은 또 다른 사랑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해도 사랑할 수 있다. 자기자신의 존재와 저 별의 존재에 빗대어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라는 말이다.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또 인간이라서 우리가 함께 살아갈 수 있다.

 

 

 

당신의 얘기를 들려줘요


 

안나는 평론가 존슨을 만나러 간 자리에서 성추행을 당할 뻔하고, 맞서 싸워 그를 폭행한 후 도망친다. 그러나 그 시대의 법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결국 그녀는 존슨 사건과 레드북 논란을 이유로 구금된다.


브라운은 안나를 보호하기 위해 정신 이상을 주장하자고 제안하지만, 안나는 단호히 거절한다. 안나는 거짓말 뒤로 숨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이제 막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았고, 자신이 원하는 독립적인 존재로 설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녀를 통해 위로 받는 사람들이 있다.


안나는 자신이 믿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오답이 되기로 결심한다.


 

당신과 같은 심장으로 숨을 쉬고 당신과 같은 마음으로 꿈을 꾸는

하지만 결국 당신과 다른 당신이 아닌 사람


내가 나라는 이유로 지워지고 나라는 이유로 사라지는

티없이 맑은 시대에 새까만 얼룩을 남겨


넘버 22.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中


 

이 장면은 ‘레드북’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독립적인 존재이지만 다수의 집단 안에서 흐려지곤 한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정의도 부정이 될 수 있는 사회에서 무언가를 잃을 각오를 하며 스스로 오답이 되기를 자청하기는 쉽지 않다. 안나와 같은 강한 존재가 사회를 변화시키며 정의로 우리를 이끈다.


남들과 다른 것이 당연하지만 당연한 것들도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는 사회에서 스스로를 믿고 스스로를 말하는 안나의 모습은 큰 감동을 준다.


브라운은 ‘레드북’을 읽고 긍정적으로 변화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안나를 변호한다. 놀랍게도 그들은 판사의 아내, 검사의 짝사랑, 시장 부부와 같이 그들의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이다.


‘레드북’은 여성 작가가 쓴 그들의 솔직한 이야기라는 의미에 더해 성별과 계급이 나누어져 있던 빅토리아 시대에 모두가 함께 읽고 웃을 수 있는 책이라는 특별함이 있다. 마지막 넘버에서 뮤지컬 ‘레드북’은 무대를 넘어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위로를 전한다.


 

거기 그 자리에서 지금 그 모습으로 당신이 누군지 말해줘요


넘버 24. 당신의 얘기를 들려줘요 中

 

 

요즘 들어 뮤지컬이 전하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좋다. 대형 뮤지컬의 주특징인 주로 화려한 무대와 단순한 서사가 ‘레드북’과 같은 작품을 만날 때 깊은 감동을 준다.


사랑스러운 안나와 유쾌하고 따뜻한 이야기가 있는 뮤지컬 ‘레드북’은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올해 12월 7일까지 공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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