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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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하나의 문장이 빛으로 번질 때, 문학은 새로운 예술이 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10대 소년의 성장과 내면적 각성을 그린 작품으로, 선과 악, 현실과 이상이라는 이중적 세계 속에서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인간 내면의 분열과 성장, 그리고 자아의 각성을 다룬 이 고전은, 단순한 성장소설을 넘어 자기 성찰과 내적 성장의 상징으로 오늘날까지 읽히는 명실상부 스테디셀러다. 특히, 선과 악을 절대적 가치가 아닌 상대적·상징적 개념으로 제시한 점은, 인간 경험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탐구하게 만든다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이러한 『데미안』의 상징—깨진 알, 날아오르는 새, 두 세계의 경계—은 문학적 서사에 머물지 않고, 시각예술을 통해 재탄생하고 있다. 바로 여기, 『데미안』 속 장면과 감정을 이미지로 옮겨, 글로 상상하던 내면 세계를 눈앞에서 체험하게 하는 전시가 있으니, 서울시립미술관에서 2023년 12월 14일부터 2024년 3월 10일까지 열리는 《구본창의 항해》전이다. 깨진 알 속에서 새가 날아오르는 순간을 포착한 듯한 사진,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공간 속 숨겨진 세계를 담은 연작은, 독서의 경험을 감각적 경험으로 확장시킬 것이다.

 

문학과 시각예술의 만남을 통해, ‘읽는’ 독자가 아니라, '사유하는' 관객이 되어본 경험을 공유하고자 한다.

 

 

 

0. 《구본창의 항해》


 

["내 속에서 솟아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 『구본창의 항해』 전의 서문

 

이번 전시는 구본창의 사진인생이 담긴 초대형 회고전으로, 그의 작품 대부분을 관람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서울에서 출생한 그는 본래 미술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부모님의 뜻에 따라 연세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입사한다. 그러나 결국 일에 맞지 않아 반년 만에 사직서를 내고 독일 유학길에 오른다. 이후 독일 함부르크에서 사진을 공부해 사진작가로서 등단하여, 80년대부터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한다. 현재는 경일대학교 사진영상학부 석좌교수를 맡고 있으며, 국내 사진작가로서는 최고 수준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1. 호기심의 방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이하는 공간은 ‘호기심의 방’이다. 이 방은 단순한 전시실이 아니라, 구본창이라는 사진가의 내면과 기억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입구이기도 하다. 호기심의 방에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수집해온 잡동사니들이 세심하게 배치되어 있다. 언뜻 보기에 사소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이지만,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저마다의 의미와 이야기, 시간의 흔적을 담고 있다. 마치 관객에게 “당신이 놓치고 지나쳤던 작은 존재에도 의미가 있다”라고 조용히 속삭이는 듯하다. 

 

이 공간에서는 익숙한 시선을 잠시 멈추고, 평소 주목하지 않았던 사물들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다. 작은 종이 조각, 낡은 장난감, 무심히 던져진 메모 한 장까지, 모든 것이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새로운 사유와 감각적 경험으로 연결된다. 관람객은 이곳에서 단순한 ‘보기’를 넘어, 사물 하나하나를 뜯어보고 해석하는 능동적인 탐험자가 된다. 

 

 


2. 일분간의 독백


 

구본창의 작품을 마주하게 되면, 관객은 자연스레 눈앞에 펼쳐진 이미지가 단순한 그림이 아님을 깨닫고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림은 화가의 상상력과 의지로 얼마든지 창조될 수 있는 반면, 사진은 현실 속 존재를 포착하지 않고서는 결코 만들어낼 수 없다. 그러나 구본창의 사진 앞에서는 이러한 한계가 무색해진다. 그는 존재의 순간과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하여, 마치 현실이 의도적으로 조율된 화면처럼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특히 그의 작품이 연속적으로 전개될 때, 관객은 어느 순간부터 ‘눈에 익은 듯한 자연스러움’ 속에 완전히 몰입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가 한국 사진계에서 ‘혁명가’로 평가받는 이유가 체감된다.

 

대표작 『일분간의 독백』은 1분이라는 짧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시간 속에서 인간의 내면을 세밀하게 탐구하는 작품이다. 60초 동안 스쳐 지나가는 감정의 파편들을 한 장 한 장의 사진으로 포착함으로써, 관객은 순간적인 심리의 변화를 직접 경험하게 된다. 특히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감을 사진 속 공간과 빛, 사물의 배열로 투영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을 가시화한다. 단순히 이미지를 보는 행위를 넘어, 관객은 그의 사진을 통해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고, 그 순간의 감정들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구본창 사진의 근본적 힘을 보여주는 동시에, 사진이라는 매체가 지닌 감정적, 철학적 깊이를 새롭게 체험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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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분간의 독백』

 

 

 

2. 『태초에』


 

이 작품은 사진을 단순히 기록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재봉틀이라는 예기치 않은 매개체를 통해 새로운 시각적 서사를 만들어낸 콜라주 작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작가는 각각의 사진을 물리적으로 엮어 하나의 화면을 구성함으로써, 전통적 사진 표현의 한계를 뛰어넘고 다층적 의미를 부여한다. 특히 당시 시대적 배경이 작품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대형 인화지가 수입되지 않았던 환경적 제약 속에서, 작가는 불가피하게 사진들을 재봉틀로 연결할 수밖에 없었고, 이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새로운 예술적 형식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우연적 조건은 결과적으로 작품의 독창성을 강화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각각의 이미지가 하나로 묶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텍스처와 시각적 리듬은, 관객에게 단일한 사진이 제공할 수 없는 다채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틀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재료와 방법을 탐구한 점은, 사진 예술이 단순한 재현을 넘어 새로운 의미와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시사한다. 때문에 이 작품은 시대적 한계를 예술적 가능성으로 전환시킨 대표적 사례로, 사진 표현 방식의 다각화와 창의적 실험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높이 평가되는 수작으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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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3. 『문 라이징』


 

일반적으로 사진은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고,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시간을 기록하는 행위에 머문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그 한계를 넘어선 시도를 볼 수 있다. 작가는 보이지 않는 영혼들, 즉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와 감정을 카메라에 담아냈다.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메이킹 포토(연출된 사진)’라는 방식으로 장면을 구성하고 연출함으로써, 관객에게 단순한 시각적 경험을 넘어선 메시지를 건넨다. 사진 속 장면 하나하나는 현실과 상상을 경계 짓는 지점에서 탄생하며, 우리가 놓치고 지나칠 수 있는 내면의 순간들을 시각화한다. 사진 너머의 이야기를 사유하게 하고, 기억과 상상의 경계를 확장하는 순간이었다.

 

 


4. 『로스트 파라다이스』


 

한편, 시각적 요소를 가능한 한 절제하고, 오히려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섬세하게 드러내는 데 주안점을 둔 작품도 있다. 작가는 일상에서 쉽게 지나치게 되는 곤충들을 확대하여 촬영함으로써, 관객이 보통은 인지하지 못하는 작은 생명들의 존재감을 부각시킨다. 촬영된 곤충의 이미지는 얼핏 보면 어떤 곤충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흐릿하고 모호하게 느껴지는데, 이러한 시각적 난해함은 단순한 혼란을 넘어, 오히려 작품의 메시지를 강화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역설적으로, 모호하고 불확실한 이미지 덕분에 관객은 죽어가는 곤충들이 품고 있는 마지막 숨결과 그 미세한 움직임에 더욱 집중하게 되며, 삶과 죽음의 경계, 존재의 덧없음과 소중함을 동시에 체감하게 된다. 시각적 불확실성과 의미의 명료함 사이에서 긴장감을 형성하며, 관객에게 사유와 감각을 동시에 요구하는 독특한 작품이다.

 

 

 

5. 열린 방


 

마지막 전시실인 ‘열린 방’은 구본창 작가의 최근 작품들이 한데 모인 공간으로, 특정한 주제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무작위로 배열된 사진들로 관람객을 맞이한다. 이 공간은 단순히 그의 작품을 나열하는 장이 아니라, 작가가 스스로의 내면을 탐색하며 기록해온 순간들의 총체적 흔적을 보여준다. 구본창은 이번 회고전이 자신의 예술적 여정을 결산하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탐험과 실험을 향한 ‘시작’임을 명확히 드러낸다. 그는 자신을 ‘익명자’라 칭하며, 사회적 평가나 외부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진 상태로 오롯이 자신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직관을 따라가는 사진적 행위를 지속할 것임을 선언한다. 이러한 선언은 단순한 작품 활동의 연장이 아니라, 관객에게도 예술과 존재, 기록과 경험 사이의 미묘한 경계와 관계를 사유하게 만드는 중요한 맥락으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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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 전경

 

 

전시 중간중간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속 구절들이 큐레이팅되어, 관객들이 글과 이미지를 동시에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즐겨 읽던 구절이 사진과 함께 놓여 있는 순간, 글로만 읽던 내면의 사유가 눈앞의 현실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것을 느꼈다. 단순히 읽는 독자가 아닌, 시선과 감각을 통해 스스로 사유하는 관객이 된 순간이었다.

 

이러한 경험은 문학과 시각예술의 만남이 단순한 장르 융합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과 감각을 동시에 자극하며 사고와 감정을 확장시키는 창조적 실험임을 보여준다. 『데미안』이 던진 자아의 탐구와 각성은 이제 글로 읽는 경험을 넘어, 보는 경험 속에서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시선을 발견하게 한다. 결국, 글과 이미지가 서로를 비추며 만들어내는 공명 속에서 우리는 깨닫는다. 문학은 읽히는 것을 넘어 체험될 수 있고, 예술은 단순히 감상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과 연결될 때 비로소 완전해진다는 것을.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내면의 질문을 마주하며, 문학과 예술이 함께 만들어내는 새로운 감각을 체험하고 싶은 독자에게, 이번 전시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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