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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는 외롭고, 퇴고는 괴롭고, 탈고는 이롭다.

 

언제부턴가 메모장 상단에 적어놓은 문장이다. 쉽사리 글이 진행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썼는지 훔쳐보던 당신, 잘 걸렸다. 고통을 나눠보자.

 

우선 초고는 외롭다. 주제를 정하는 것부터 어떻게 전개할지까지 홀로 고민해야 한다. 그럼에도 확정된 값이 없기에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다. 이렇게 써야지, 저렇게 써야지, 무한한 확장이 가능하다.

 

문제는 퇴고이다. 초고라고 써놓았던 낙서를 어떻게든 글로 살려내야 한다. 다듬고 고치고 쓰고 옮기고 지우고 옮기고 쓰고 고치고 다듬고 별 육갑을 다 떨어야 한다. 막상 결과물을 보면 초고와 별반 다르지 않다. 심지어는 더 못할 때도 있다. 쓴 것이 아까워 돌아가지는 못한다. 괴롭다. 괴로움을 괴롭다고 할 수밖에 없는 그 어휘력이 괴롭다. 괴롭다는 말장난 정도에 자족하는 문장력이 괴롭다.

 

탈고는 말해 뭐하겠는가. 이롭다. 이롭다 못해 경이롭다. 그럼에도 마냥 좋을 수는 없는 게, 탈고를 자의적으로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둘 중 하나이다. 마감이 임박해 어쩔 수 없이 끝내거나 도저히 진전이 보이지 않아 포기하거나. 이걸 ‘자의’라고 표현한다면 우리의 꿈을 짓밟는 셈이다. 초고에서 탈고까지 일필휘지하는 원대한 꿈. 그러니 탈고는 퇴고의 도피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이롭다 못해 경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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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퇴고가 유독 힘든 것엔, 초고-퇴고-탈고 삼 형제의 비밀이 한몫할지도 모른다. 배다른 형제가 있는 것인데, 둘째가 그렇다. 녀석이 징글징글해 괜히 차별하고자 하는 건 아니고, 실제로 이름부터가 다르다.

 

초고와 탈고는 본명이 각각 ‘草稿’, ‘脫稿’인데, 퇴고는 ‘推敲’이다. (한자에 지레 겁먹지 말고, 뒷글자만 주목하면 된다그 차이는 ‘고’ 자로, 전자는 ‘원고(原稿)’와 같지만, 후자는 생뚱맞다. 뜻부터 설명하자면 ‘稿’는 ‘원고’를 일컫고, 퇴고의 ‘敲’는 ‘두드리다’는 의미이다. 전혀 다른데, 어떻게 퇴고가 원고 가족에 입양되었을까. 그 본적을 파헤치기 위해서는 무려 당나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옛 고사를 그대로 인용하기보다는 각색한 대본으로 한번 살펴보자.

 

 

인물: 시인 가도, 정체불명 고관(고위 관리)

배경: 당나라

사건: 말을 타고 가던 시인 가도가 좋은 시상(詩想)이 떠올라 시작(詩作)에 몰입하다, 행차하던 고관과 부딪힌다.



 

가도: (말을 타고 거닐다가) 엇? 좋은 시상이 떠오른다!

 

~ a few minutes later ~

 

고관: (가도와 맞닥뜨리며 어느 영화 대사처럼) 누구냐 넌?

 

가도: 아이고 죄송합니다. 저는 시인 나부랭이인데, 문득 시상이 떠올라 시를 쓰다 몰입한 나머지 어르신이 행차하시는 걸 보지 못하였사옵니다.

 

고관: 도대체 무엇에 그리 집중하였기에 우리가 지나가는 것조차 보지 못하였느냐?

 

가도: 다름이 아니오라, 결구(마지막 구절)에 쓸 단어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고관: 오호, 어떤 단어가 고민이냐?

 

가도: (안 내키는 듯) ‘밀다(推)’와 ‘두드리다(敲)’ 두 것이옵니다.

 

고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 음, 내 생각엔 ‘두드리다’가 좋을 듯하네.

 

가도: (살짝 언짢은 투로) 건데 시를 좀 아십니까?

 

고관: 허허, 내 이름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한유’일세.

 

가도: 아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 한유 말씀이옵니까?

 

한유: 그래 그게 나일세. 허허.



 

그렇게 둘은 절친한 시우(詩友)가 되었다는 해피엔딩.

 

 

상황과 대사는 허구적인 상상력이 가미되었지만, 가도가 고민하던 ‘밀다’와 ‘두드리다’가 각각 ‘퇴(推)’와 ‘고(敲)’이며 이것이 오늘날까지 유래되어 ‘퇴고(推敲)’에 이르렀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니 퇴고는 애초에 ‘원고’와 무관한 용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이다. 우연히 ‘고’자 돌림이기에 원고 가족에 자연히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 고사에서 얻어야 할 부분은 무엇일까. 퇴고는 어렵다는 것? 퇴고는 힘들다는 것? 퇴고는 특별하다는 것? 다 맞겠지만, 비틀어 보자면 퇴고하기 위해서는 한유 같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도 볼 수 있다. 뛰어난 시각을 가진 제삼자의 조언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셈이다.

 

그런데 대다수 글쟁이나 그 지망생은 고집이 세다. 제 의견을 굽힐 줄을 모른다. 하물며 오늘날까지도 최고라 불리는 ‘한유’ 같은 사람을 어디서 만나겠는가. 그러니 우리네 글솜씨로는 도저히 퇴고가 마음에 들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탄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좋다. 그 마지못함을 받아들이자. 아무리 북 치고 장구 쳐도, 어차피 우리 곁엔 한유가 없기에 퇴고가 완벽할 수 없다. 이런 변명을 일삼아, 마음 편히 이번 지면을 놓아주는 건 어떨까. 완벽할 수 없으니,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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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래와 상관없이 ‘고’ 자는 ‘고통’으로 읽힌다. 퇴고통. 퇴고는 고통이다. 그럼에도 ‘고통’이 ‘고생’과 같은 글자를 공유한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기를 바란다. ‘고생’의 본뜻이 부정적이라 상사나 웃어른에게 그 사용을 지양하는 의견이 분분한데, 아무렴 어떤가. 통상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말뜻은 그게 아니니 말이다. 그것을 대체한다는 말이 고작 ‘수고한다’이므로, 피차일반이다.

 

그러니 이만 고통을 밀어내고(推) 탈고하느라 고생했다고 제 마음을 두드려보는(敲) 건 어떨까.

 

건필하시길 바란다. 다 자기 좋자고 하는 짓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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