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차린다는 것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밥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것이다. 한국인의 인사말 '밥 먹었냐?'를 주변 사람들에게 그 누구보다 자주 건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어야 하는 집에서 자라다 보니 세 끼를 다 챙겨 먹어야 직성이 풀렸다. 하지만 ‘입이 짧아 많이 먹지는 못해’한 끼 한 끼를 정말 맛있는 걸 먹어야 충족이 된다. 그래서 대학 시절 자취를 시작하면서부터 밖에서 사 먹기보다 집에서 해 먹는 시간이 더 많았다. 중간에 요리 권태기가 찾아온 적도 있었지만, 금세 다시 부엌으로 돌아갔다. 나에게 요리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행위가 아니었다. 재료를 다듬고, 불 앞에 서서 음식이 익어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접시에 정성껏 담아내는 그 모든 시간이 나를 돌보는 의식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문득 깨달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집에서 요리해 먹은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혼자 요리를 하면 엄마에게 열 번 중 아홉 번은 사진을 찍어 보내곤 했는데, 갤러리를 뒤져봐도 6월 이후로는 집밥 사진이 한 장도 없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대체 이 사태가 왜 벌어진 걸까. 달력을 펼쳐보니 형형색색의 일정들이 빼곡했다. 평소 요리를 하던 휴무 날마다, '쉰다'는 명목하에 서울 곳곳을 넘어 전국 팔도를 열심히 돌아다녔다.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왜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가족을 만나고, 친구를 만나고, 공연을 보러 다녔다. 일하는 시간을 빼고 남은 모든 시간을 무언가 하는 걸로 가득 채워 넣었다.
‘그럼 퇴근하고 요리하면 되잖아?'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퇴근하면 에너지가 딱 집에 갈 정도만 남는다. 월급도둑 같은 건 내 사전에 없다. 가끔은 그러고 싶기도 한데, 사람 천성이 그게 안 된다. 일할 때만큼은 온 힘을 다하는 스타일이라, 퇴근하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문밖을 나서는 순간 저전력 모드로 전환된다. 그래서 굉장히 배가 고프다. 당장 입속에 음식이 들어가야 할 정도로. 그래서 55분쯤 걸리는 퇴근길 동안 그 배고픔을 참을 수 없어서, 결국 사 먹고 들어간다. 시간이 돈이라고들 하지 않던가. 나는 돈을 내고 배고픔을 채웠지만, 나를 위한 한 끼를 만드는 시간은 가게에 내어준 셈이었다. 그래서 이번 주 주말 목표는 명확했다. 나를 위한 반찬을 만드는 것. 좋아하는 카레와 감자샐러드를 만들기로 다짐하고 주말만 기다렸다. 진짜로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엄마가 말했다. "딸, 너무 많이 사 먹지 마. 너를 위해서 밥 차려 먹는 거도 중요해."
엄마 말은 다는 아니어도 93%는 맞다. 엄마 레시피를 받아서 해도 똑같은 맛은 안 나지만, 그래도 얼추 비슷한 맛이 나는 음식들을 보니 뿌듯했다. 문득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아주 많이 받았던 이유가 혹시 집밥을 안 먹어서 그런 건 아닐지 생각했다. 나를 아껴주는 방법의 하나가 밥을 차려 먹는 것이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귀찮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계속 미뤄뒀다. 엄마는 목소리로 느꼈나 보다. 내가 요즘 많이 예민해지고 피곤해한다는 것을. 에너지가 있을 땐 매일 같이 전화를 걸던 딸이, 점점 연락이 뜸해졌으니까.
하루 종일 부엌에서 자르고, 다지고, 다듬고, 볶고, 끓이고, 섞다 보니 잡생각이 싹 사라졌다. 감정 갈무리도 잘된 것 같다. 새로운 감정들이 생기긴 했는데, 그건 흘러가게 두다 보면 뭐든 답이 나오는 친구들이라 괜찮다.
내게는 문제가 하나 있다. 하나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면, 확실한 무언가가 나오기 전까지 전전긍긍하며 롤러코스터를 탄다는 것이다. 붙잡고 있는 손에 힘을 느슨하게 빼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몸은 여전히 긴장하고 있다. 20대 후반이 되어서도 그렇다. 어쩌면 30대 후반이 되어도, 70대 후반이 되어도, 또 다른 유형의 일로 전전긍긍하고 있을지 모른다.
아빠와 함께 TV에서 나오는 골프 레슨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말만 다를 뿐, 모든 레슨이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있었다. '힘을 빼고 가볍게 톡 치세요.' 아빠는 골프를 20~30년 정도 쳤지만, 여전히 잘 치고 싶은 홀 앞에서는 힘이 잔뜩 들어간다고 했다.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잘 해내고 싶어서, 삶을 더 잘 살고 싶어서 힘을 잔뜩 주고 여러 달을 보냈다. 그리고 비로소 한계에 도달해서야,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조금 힘을 빼야 한다는 것을.
밥을 차리는 행위는 단순히 먹을 것을 준비하는 게 아니다. 나를 위해 시간을 들이고, 정성을 쏟고, 결과물을 음미하는 과정 그 자체가 자신을 돌보는 행위다. 완벽하게 해내려고 악착같이 매달리는 대신, 느슨하게 힘을 빼고 다정한 한 끼를 차려주는 것. 그것이 곧 나를 챙기는 일이다. 골프공도 힘을 빼고 쳐야 더 멀리 날아간다고 했다. 삶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오늘 저녁은 직접 만든 카레였다. 엄마 레시피와 똑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맛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