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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역사적 사건이 있다. 바로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이야기다. 이 사건이 유독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아버지가 아들을 가뒀다는 점 때문이다.

 

뮤지컬 <쉐도우>는 이 역사적 비극의 그림자를 새롭게 비춘다. '만약 뒤주가 타임머신이었다면?'이라는 신선한 상상에서 출발해 과거와 현재,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의 그림자를 마주하게 만드는 시간의 무대를 펼쳐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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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은 사도 '이훤'이 뒤주에 갇힌 첫날밤부터 시작한다.

 

그는 평소 즐겨 읽던 도교 비서 <옥추경>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뒤주 안에 붙인다. 그 순간 시간의 틈이 열리며 그는 과거로 이동하게 된다. 그가 마주한 이는 어린 시절의 아버지, 영조 '이금'이다. 권력의 무게에 짓눌려 두려움과 외로움에 떠는 소년 시절 아버지를 마주하게 된 사도는 그의 친구가 된다.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사도의 마음도, 왕좌의 게임에 뛰어들어야 했던 영조의 생애도 끌어안아주는 <쉐도우>는 록뮤지컬로, 록 넘버들을 통해 인물들이 고립감과 외로움을 강렬하게 표현한다.

 

특히 사도가 뒤주에 갇혀 '오히려 좋다'는 식으로 상상 속에서 자유로워지고자 할 때 부르는 넘버 'ROCK STAR'는 사도의 여러 면을 담아낸 넘버이다. 나를 봐줬으면 하는 아들의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후반부에서는 사랑을 주겠다는 마음으로 변주된다.


 

날 따라 불러봐

Cuz your rock star

널 위한 사랑의 주문을


Oh Oh Oh Oh

I'm your rock star

Oh Oh Oh Oh

Look at me

I am the one you love

 

- ROCK STAR, 쉐도우

 

 

<쉐도우>의 신나는 곡조 속에서 눈물이 터져 나오는 이유는, 누군가에게 받은 기대를 되돌려주지 못하는 마음을 많은 사람들이 느껴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나 또한 어릴 때 학군으로 유명한 곳에서 자랐고 총명하다는 소리를 일상적으로 들었었다. 그렇지만 점점 떨어지는 성적을 보며 초라함,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자주 느꼈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듯한 외로움 속에서 내가 자주 도망쳤던 곳은 판타지 소설, 영화들이었다.

 

그런데 조선의 왕세자들은 어땠을까. 강남 8학군을 합친 것의 몇 배는 되는 부담이 그들을 외롭게 만들었을 것이다. 많은 어린 세자들이 고독함을 견뎌야 했겠지만, 사도 세자는 특히 그 정도가 심했다. 영조의 지극한 사랑의 방식은 상당히 폭력적이었다. 사도는 태어난 지 100일도 되지 않아 어머니 품에서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 영조가 생모가 아닌 왕비의 양자로 그를 입적했기 때문이다.

 

세자는 자연히 애착 형성이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완벽주의자 아버지의 기대 속에서 불안하게 자랐다. 날씨가 흐리면 그것마저 세자의 덕이 부족한 탓이라 책망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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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매일 살피며 눈치 보던 세자는 점점 초현실적인 세계에 몰입했다. 옥추경, 서유기 등 판타지 소설을 즐겨 읽은 것은 사도의 실제 이야기다. 다만 사도 세자는 단순히 판타지에 심취한 것을 넘어 심각한 의대증(옷입기에 대한 강박장애)과 조울증, 우울증을 앓았었고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을 해치기도 했다.

 

<쉐도우> 속 사도의 행적은 많은 부분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영조의 양육방식이 혹독했음은 사실이다. 그 이유는, 그에게 이미 평생 안고 살아갈 그림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영조는 왕세자를 거치지 않고 즉위했고, 무수리의 아들이라는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형 경종을 독살했다는 루머가 따라다녔다. 그는 왕관을 쓰고도 늘 불안했다.

 

뮤지컬 <쉐도우>는 거대한 정치사 이전에 복잡한 부자관계에 집중한 심리극이다. 부모의 투사는 결코 악의적인 것이 아니다. 대부분은 부모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불안과 상처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것이 자녀에게 전가될 때, 사랑은 무거운 짐이 되고 만다.

 

아버지 영조의 불안은 곧 아들의 결함이 되었고, 사도는 늘 심판대 위에 서 있는 듯한 나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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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향해 닿고 싶었으나 끝내 닿지 못한 부자라는 소재는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아들, 진심이 엇갈린 대화, 그리고 뒤늦은 용서. <세일즈맨의 죽음> 역시 아버지의 투사가 어떻게 아들과의 관계를 파괴하는지, ‘진정한 대화의 부재’가 얼마나 비극적인 결과를 낳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아버지 윌리의 기대와 불안은 사랑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의 실패를 부정하기 위한 필사적 방어였다. 그 투사에 짓눌린 비프는 자신의 진짜 욕망과 삶의 방향을 잃고, 아버지의 시선 속에서만 살아가게 된다. 영조와 윌리는 전혀 다른 시대와 문맥의 인물이지만, 부모로서의 심리 구조는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둘 다 자신의 불안 속에서 살아갔던 아버지이며, 그 불안은 자녀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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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서 갈등을 봉합하는 마지막 열쇠는 언제나 용서다. 해피엔딩에선 주인공이 용서를 하거나 받고, 파멸극에선 용서를 빌며 끝난다.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작품 끝에 가서야 비프는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아요.”라고 토로한다. 그 말에 윌리는 처음으로 아이 같은 안도의 표정을 짓는다. 그 순간만큼은 서로의 환상이 걷히고, 잠시나마 진짜 마음이 닿는다.

 

<쉐도우>는 <세일즈맨의 죽음>과 달리 '용서'를 '용기'로 만든다.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용기를 내는 순간이 너무 늦었다면, <쉐도우>에서는 시간의 문을 열어 완전한 해원의 장을 마련한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게끔 타임머신을 만들어준다. 사도가 싸우는 대신 사랑할 수 있는 용기로 아버지 앞에 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부모가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었다’는 걸 이해하는 순간이다. 부모의 사랑은 빠르고 본능적이며 헌신적이다. 반면 자식의 사랑은 늦게, 천천히, 자각과 선택을 통해 깊어진다. 부모에게 ‘돌아오는 사랑’인 것이다. 어릴 적 받기만 했던 사랑을 나중에 내가 주는 사랑으로 되돌리는 과정이다. 보호받던 존재에서 보호하는 존재로, 그리고 다음 세대에 사랑을 남기는 존재로 변하는 이 순환은 인간관계의 본질적인 성장 과정이다.

 

뒤주에 갇힌 사도가 어린 영조를 마주하며, 아버지의 불안과 상처의 근원을 본다. 타임머신처럼 과거로 돌아가 서로를 다시 마주하는 이 작품은, ‘돌아오는 사랑’의 본질을 무대 위에 선명히 새겨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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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읽었던, “다시 태어나면 엄마가 내 딸이었으면 좋겠어”라는 문장이 기억난다. 뮤지컬 <쉐도우>는 역사적 비극의 이면에 숨어 있던 부자 관계의 그림자를 섬세하게 포착해낸다. 그리고 뒤주라는 죽음의 공간을 ‘시간의 문’으로 전환시켜, 서로에게 닿지 못했던 부자에게 마지막으로 이해와 사랑의 기회를 건넨다. 화려한 록 넘버와 판타지적 상상력이 얽히며 만들어내는 이 무대는 생각지도 못한 치유와 화해의 서사로 관객을 초대한다.


올해 초연되는 창작 뮤지컬 <쉐도우>는 쇼케이스와 넘버 선공개, 실황 생중계 등으로 미리 체험할 수 있는 콘텐츠를 미리 선보였다. '쿠키데이'를 마련해 타 배우가 깜짝 출연하는 이벤트를 마련하는 등 콘서트 같은 자리를 만들고 있기도 하다. 모두 하나가 될 수 있는 공연을 마련하고 있는 <쉐도우>의 매력을 올해 꼭 느껴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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