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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엄마(김금순 분)의 하루는 가사 노동으로 시작된다. 남편과 아들의 출근과 등교를 돕는 그녀의 손길은 익숙한 만큼 정확하다. 정성껏 차린 밥상 위로 젓가락을 움직이는 남편의 얼굴은 무신경하고, 걸핏하면 제멋대로 잠기는 문 때문에 베란다에 갇혔다 나온 아들은 엄마에게 제대로 고쳐 놓으라고 타이른다. 마치 베란다 문이 말썽을 부린 이유가 엄마에게 있으며,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을 엄마로 상정한 듯. 남편과 아들이 집 밖으로 나서고 현관문은 선을 가르듯 엄마의 앞에서 도어락 소리를 내며 굳게 닫힌다. 지겨운 하루의 출발을 알리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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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지수 감독의 2017년 작 <베란다>는 “만약에 엄마가 혼자 있는데 베란다에 갇힌다면…?”이라는 독특한 발상에서 탄생한 영화다. 집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해도 해도 줄어들지 않는 집안일을 하는 엄마에게 ‘나’라는 인식은 부재한다. 대신 ‘주부’라는 타이틀은 견고해진다. 감독은 거실, 주방, 안방을 넘나드는 엄마를 더욱 좁은 공간으로 밀어 넣으며 인물에게 ‘나’를 인식하도록 권유한다.

 

가족들이 떠난 고요한 집 안에서 엄마는 늦은 아침 식사를 한다. 무료하게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면서 통화를 하는 엄마는 “집에 있는 게 더 편해”라고 말한다. 식물에 물을 주기도 하고 잠깐 눈을 붙여 짧은 낮잠도 자 본다. 언뜻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마는 아침에 두른 앞치마를 벗지 않은 상태다. 잠시 후 세탁기를 돌리기 위해 베란다로 들어간 엄마는 오늘 아침, 아들이 갇힌 베란다에 갇히고 만다. 핸드폰도 두고 온 상태이기에 다른 이에게 연락할 수도 없다. 그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남편과 아들을 기다리는 수밖에.

 

이왕 이렇게 된 거 휴식이라도 취하면 좋으련만 가사 노동이 몸에 밴 엄마는 쉴 줄 모른다. 그녀는 구부정한 자세로 마른 멸치를 손질한다. 바구니 안에 수북이 담긴 멸치의 머리와 몸통이 빠르고 정확하게 분리된다. 한참 전에 돌린 세탁물을 꺼내 물기를 탈탈 턴 뒤 건조대에 건다. 더운 날씨 때문인지 분주한 노동 때문인지 엄마의 얼굴은 어느새 땀으로 젖어 있다. 지침의 정서로 가득한 얼굴. 그 지침은 베란다에 갇혔기에 생겨난 걸까, 혹은 시간을 들여 누적되어 온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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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둔탁한 노크 소리가 엄마의 귓가로 다가온다. 옆방으로 통하는 문에서 들려오는 것이다. 스산한 느낌에 문을 열어본 엄마는 바닥에서 팔딱거리는 멸치를 발견한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멸치를 본 엄마는 다급히 물을 끼얹는다. 베란다 밖에서 울리는 진동 소리에 잠시 신경을 옮긴 엄마는 그 멸치가 이미 말라버렸음을 확인한다. 그 멸치는 단순한 환시였을까. 엄마는 마른 멸치를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아마 마른 멸치와 자신의 처지를 동일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날은 금세 어둑어둑해져 있다. 불도 켜지 못한 채 엄마는 다시 바쁘게 몸을 움직인다.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베란다 바닥과 넓은 창문을 닦는다. 마른 멸치 하나를 입에 넣고 씹으며 검은빛과 푸른빛이 섞인 바깥 풍경을 바라본다. 그녀의 눈빛은 처음 베란다에 갇혔던 대낮보다 날카로워져 있다.

 

기다리던 남편과 아들이 집에 도착하고 엄마는 드디어 베란다에서 탈출한다. 베란다에 갇혀 하루를 보낸 엄마를 발견한 남편과 아들은 그녀의 안위를 묻거나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지 않는다. 날아오는 건 밥도 차리지 않고 어디 갔냐는 남편의 투정과 택배를 집 안으로 들여놓지 않았다는 아들의 타박뿐. 베란다를 벗어난 엄마는 다시 가사 노동의 전담자가 된다. 엄마는 무언가 결심한 사람처럼 기계처럼 장바구니를 들고 나선다. 하루 종일 벗지 않았던 앞치마를 벗고 결연한 얼굴로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 묶는다. 멸치가 수북하게 쌓였음에도 멸치가 다 떨어졌다는 핑계를 대고 엄마는 집 밖을 나선다. 그녀의 걸음은 거침이 없고 빠르게 아파트 단지를 벗어난다. 마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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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보이지 않는 노동’이라 불리는 가사노동은 아침부터 밤까지 청소, 설거지, 빨래, 식사준비 등 가정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고도 광범위한 노동을 말한다. 그러나 급여를 받는 여타 노동과 달리 무급으로 진행되기에 ‘노동’의 범주로 인식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주부인 여성은 자본가 사장이 주는 임금을 직접 받지 않는다. 따라서 자신이 경제 체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항상 인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노동의 강도가 약하다는 사회적 인식으로 인해 가사 노동자의 피로도는 자주 무시되고, 가사 노동을 행하는 당사자도 자신의 피로를 보통의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가사 노동자가 되는 순간,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이름은 가정 내에서 사라진다. ‘나’라는 인식은 희미해지고 오직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하며 이는 가정이 깨지지 않는 이상 유지된다. 우리는 <베란다>를 감상하면서 극을 끌고 가는 엄마의 이름을 끝까지 알 수 없다. 카메라는 베란다에 갇혀 있어도 쉬지 않고 집안일을 하는, 주부로서의 엄마만을 끈질기게 쫓을 뿐이다. 결혼 전 엄마의 과거, 남편이나 아들을 위해 헌신하는 존재가 되기 전 자기 자신에 초점을 맞췄던 시절은 미지수로 남아 있다. 이는 엄마에게 지난 시간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되었기에 떠올리는 것이 무의미하며, 엄마 역시 자기 자신을 가정을 위해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으로만 상정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 속 집안 풍경은 여느 집안과 다를 바 없이, 우리의 삶을 붙여 넣은 것처럼 평범하다. 그 평범함은 익숙함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평범한 속에서는 기묘하게 불공평한 구조를 감지해 내기 어렵다. 그러나 <베란다>에서는 엄마에게 각성의 계기를 제공한다. 베란다 바닥에서 작은 숨소리를 내며 팔딱거리는 멸치. 영화는 아무리 물을 끼얹어도 숨통을 가늘게 이어가는 멸치를 엄마의 앞에 데려다 놓으며 땀 흘리며 일하는 자신을 응시하도록 권한다. 당신은 누구이고 어떤 존재인지,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지, 당신에게 중요한 가치는 어떤 것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하도록 유도한다. 멸치를 통해 자신의 처지를 확인하는 장면은 영화 말미 베란다를 빠져나와 자의적으로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는 해방의 장면과 연결된다. 이 경로는 엄마에게, 주부에게, 가사 노동자에게 해방의 기미를 찾아내고픈 감독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장바구니 하나만 든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지만, 오랫동안 가사 노동을 전담했던 엄마가 아예 집으로 복귀하지 않는 건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처지를 각성하기 전과 후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기에 그녀는 더 이상 마른 멸치의 상태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어떤 자유는 스스로 감옥을 탈출한 뒤에야 비로소 움직이고, 엄마는 이제 막 출발선 앞에 선 셈이다. 감옥 같은 베란다를, 집을 벗어난 엄마의 다음은 오직 자신을 위한 삶으로 채워나가기를 기대해 본다.

 

 

참고문헌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집안의 노동자』, 김현지·이영주 옮김, 갈무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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