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그럴 때가 있다. 나의 마음속에서 내가 선명하게 말을 할 때. 짧은 찰나에 이미 머릿속에서 많은 생각의 터빈을 돌려 완전한 결론에 이르기까지 열일을 하는 순간이.
그건 마치 한 편의 시 같기도, 어디서 본 것 같은 책 속의 구절 같기도, 어느 영화의 독백 같기도 하다.
그렇게 '탄생'한 아이디어나 생각들은 혹여나 잊어버릴까 얼른 메모장에 적어두곤 했다. 그래서 나의 메모장에는 실로 별의 별 생각과 순간들이 많이 적혀있다.
항상 혼자 돌려보곤 했던 메모들. 오늘은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다시 기록해 볼까 한다.
제목까지 있어 한 편의 시 같기도 한 이 메모는 통기타 연주에 관한 것이다.
내게는 애증의 기타가 있다. 영화 ‘늑대소년’의 순이가 철수를 앉혀놓고 불렀던 ‘나의 왕자님’을 연주하기 위해 구매했던. 그리고는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지부진, 어쩌면 아주 미약한 실력의 전진을 이뤄왔던 나의 기타. 오랜만에 다시 기타를 잡고 연습하다가 운지에 익숙지 않아 자꾸만 정적이 생겼다. 띵디디딩 딩 ....... 딩.. 띵딩딩 ........ 딩......하고.
마음은 이미 그 구간을 넘어서 한참 앞서가고 있는데 손이 따라주질 않았다. 그럴 때는 김이 팍 꺾인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기타를 금방 내려놓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이지 않을까? 나름 오랜 기타 연습의 경험으로서 해결책은 반복뿐이다. 같은 구간을 연주하고, 만족스럽지 않아 또 연습, 또, 또 반복.
그런 마음이 메모에 담겼다. 결국에는 ‘모자란 틈을 넘고 넘어 하나로 이을겁니다’ 라고 한다. 야무진 꿈이다. 아직은 어려운 연주 앞에 수많은 망설임과 쉼표를 극복하고 온전한 하나의 곡을 연주해 보이겠다는. 아쉬운건 이때 내가 어떤 곡을 연습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엔 하나로 이었을까? 실수 없이 마음을 전할 수 있었을까?
지하철이 등장하는 걸 보면 3년 전 내가 서울에서 살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메모인 것 같다. (휴대폰 메모리를 옮길 때마다 날짜가 그날로 통일되어 정확히는 모른다) 서울에 살면서부터 지하철을 본격적으로 이용하게 됐었는데,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나도 인턴 출근을 하며 매일 같은 시간에 도착하는 열차를 탔다.
몇 개월간 그렇게 출퇴근을 하다 보니, 지하철을 타면 어김없이 같이 지루한 출근시간을 견디는 낯익은 몇 사람들을 보게 됐다. ‘그렇구나, 이 열차를 타면 매일 이 사람들을 만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하는 시간이 마치 영원처럼 길어서, 지하철이라는 세상에 함께 갇힌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다.
나와 같이 이 ‘세상’을 택한 사람들. 우리는 모두 회사에 늦지 않게 도착하기 위해 최적의, 어쩌면 마지노선일 시간을 철저히 계산해 7시 40분 열차를 탄 거겠지. 그리고 매일 관성처럼 이끌려 오고 있겠지.
그래서 그다음으로 출발하는 열차를 탔을 때 굉장히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3분 차이로 완전히 다른 사람들과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이 때의 메모글은 꽤나 긍정적인 생각을 담고 있다. 매일이 똑같은 일상이어서 지루하다고 느껴질 때, 3분 늦게 출발하는 것만으로도 사실은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맛볼 수 있다는 면에서 그렇다.
그런데 왜 나는 다음 열차를 타게 됐던걸까? 아마 .. 지각?
시간이 갑자기 대과거로 튀었다. 대학생 때 처음으로 식당 서빙 알바를 할 때에 적어둔 메모다. 특이하게 내가 아르바이트를 했던 식당에는 수저통이 각 테이블에 있지 않고, 주방 근처에 있었다. 언제나 수저는 스테인리스 통에 가득 담겨 있었다. 손님이 올 때마다 인원수만큼 서빙 트레이에 담아 내 가곤 했다.
손님이 없는 한산한 날, 주방 근처에 앉아 시간을 때우다 뭘 정리할 게 있었는지 수저통을 치울 일이 있었다. 그런데 웬걸, 힘을 주고 밀어도 제 자리에서 꼼짝을 하질 않았다. 충격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수저통의 역사에 관한 생각이 스쳐갔다. 수저통은 당연히 나보다도 오랜 시간 한 자리에서 움직일 일이 없었을 것이다. 식물도 아닌 수저통이 뿌리를 내릴 일은 당연히 없겠지만, 그렇게 느껴질 만큼 왠지 그 자리의 붙박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람도 아닌 이런 수저통 하나조차 제 자리가 있다니. 부럽다.
그런 생각으로 기록한 메모이다. 그때의 나는 한창 진로 고민도 많았고 여러모로 나의 ‘자리’가 과연 어딜지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혼란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수저통이 부러울 줄이야. 나도 참 나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수저통 밑에 고인 물로 강한 장력이 생겨서 쉽게 밀리지 않았던 것 같다. 하핫!
정확한 계기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아마 ‘행운이 찾아와서는 문이 부서질 듯 두드리던’ 순간에 기록해 둔 메모인 듯하다.
취직을 위해 서울에 혼자 살면서부터 항상 외로움이 따라다녔다. 다른 주변의 사람들이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동안, 나는 취업이라는 목표에 홀로 몰두하며 스스로를 철저히도 가뒀다. 그러면서 예고 없는 불안과 우울감도 함께 찾아왔다. 취업 결과가 좋지 않아서든, 통장 잔고가 걱정돼서든 바스러질 것 같은 하루를 보내는 날이 꽤나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렇게 침울한 어제를 보내고 나서 눈을 뜨면, 그다음 날에는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다시 좋아질 일이 생기곤 했다. 기대도 없던 곳에서 합격 연락이 온다던지 (물론 최종 합격은 아니었지만), 온라인 경품 이벤트에 당첨된다던지, 친한 친구가 갑자기 바로 근처로 이사를 온다던지 하는. 그래서 그때 생각했다. ‘인생은 정말로 알 수가 없구나’하고.
사실은 지금도 정기적인 우울과 불안에 시달리곤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세상 다 끝난 것처럼 얼굴을 구기고 어깨 축 쳐진 채로 다니고 싶지 않은 건, 내일 찾아올 행운이 반드시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차피 다시 행복해질 거. 너무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지는 않고 싶었다.
결국 나의 인생에서의 불행과 행복의 총계를 냈을 때, 행복이 단연코 많을 것이라고 믿는다.
*
메모를 보니 그때의 생각이 차곡차곡 차오른다. 단 몇 줄이지만, 그 속에 담긴 비하인트 스토리가 이렇게나 길다.
어릴때의 나는 매일 일기 쓰는 걸 싫어하면서도 쓰기만 하면 한 바닥은 꼭 다 채울만큼 많은 내용을 적곤 했었는데. 그런 습관이 그대로 옮겨온 것도 같다.
일기라기엔 너무 비정기적인. 하지만 일기만큼이나 진실한 나의 메모. 앞으로도 이 재미있는 기록의 페이지를 차곡차곡 채워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