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오랜만에 H와 전화를 했다.
생일이나 새해에 안부를 묻거나 때때로 근황을 전하기는 했지만 목소리를 공유한 것은 몇년 만이었다. 전화를 좋아하지 않는 H인지라 그에게 번호가 휴대폰 화면에 떴을 때 그가 죽었나, 하는 이상한 생각을 했다.
H는 얼마 전 이사를 했다고 말했다. 새로 직장을 구하고 경기도 어딘가에 자리를 마련하며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아마 서울로 가게 되었다고 내가 전한 연락이, 우리의 마지막 연락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를 종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얼굴을 본 것은 전화보다 더 오랜만이었다. 아무 표정을 짓지 않을 때 졸고 있나 싶은 얼굴이 여전하다 싶었다. H는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테이블 위에 올린 손을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다가가서 일어나라고 깨웠을지 모른다. 그 앞에 앉아서야 H는 내가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H와는 카페에 앉아 근황을 나누다 시간이 되어 그 앞 극장에서 공연을 봤다. 공연이 끝난 뒤 나와 밥을 먹었고, 그 다음 또 카페에 갔다. 특별하게 한 것이 없는데 집에 돌아왔을 때는 어둠이 내려 있었다.
H를 오랜만에 만난 것이 좋았다. 그와 보낸 시간도 즐거웠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후 마음에 불편함이 생겼다. 왠지 그가 신경이 쓰였다.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않고 숨기고 있는 듯 보였지만, 그걸 선뜻 물을만큼 용기가 나지는 않았다.
그 불편함이 무엇이었는지는 며칠 더 지나서 알게 되었다. 그날 H는 숨기는 일이 있던 게 맞았다. 경기도에 간 것이 그의 선택이 아니라 이전에 하던 일에서 떠내려보내진 듯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들었을 때 처음 그 일을 시작하며 매우 신나했던 H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고 싶었던 일을 하게 되어 신이 잔뜩 난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애는 그 기업에 두 번 지원하고도 떨어졌다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지원했다가 붙었다. 야근이 잦고 시시때때로 처리할 일이 생기는 직종이었지만 그럼에도 H는 씩씩하게 제 일을 했다.
그랬던 그가 회사를 옮긴 사유가 무엇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원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짧은 글을 하나 읽었다. 누군가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 일인지 그것을 통제하는 사람을 모를 것이라는 내용의 글이었다. H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것이 생각났다.
H의 이동에 어떤 이유가 있는지 나는 모른다. 회사는 감정적으로 돌아가는 곳이 아니라 결국 이익을 창출하는 곳이기에 이 일도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의 위치 또한 안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생각했다. 앞으로 하게 될 일 또한 다르지 않다.
다행히 H는 지금 자리에서 그의 일을 잘 해내고 있다.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씩씩했다. 전보다 연락을 잦게 하는 게 오히려 신경이 쓰이지만 잘 버티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확인하는 듯 싶어 나쁘지만은 않다. 그와 만나 카페에서 때리는 멍도 좋다. 다만 한 가지를 소망한다.
이번 자리는 그가 떠나기로 결심한 때가 아니라면 벗어날 일이 없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