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읽기 전, 외로움이라는 감정에 대해서는 제법 알고 있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외롭기도 했고, 괴로우리만치 외롭기도 했다가 이내 가끔 심심한 듯 외로웠다. 예전엔 외로움이란 게 감당 못할 큰일처럼 느껴졌는데 이제는 그렇지도 않다. 외로움에 대한 적응일까, 살다 보니 이 감정의 농도가 희석된 걸까. 아무렴 어떤가 이제 나에게 외로움은 더 이상 강렬하지 않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으니.
사회적 유대에 대한 욕구가 바로 소속 욕구로 이어진다.
32쪽
10대 시절 외로웠고 그 외로움은 고민거리가 되었다. 반골 기질과 얽혀 소속감을 필요로 하지 않았는데 그건 그거고 외로운 건 외로운 거였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저마다 무리를 이루어 잘 지내는데 나는 왜 홀로 고독함을 느끼나. 사교적이지 않았지만 같이 어울리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이따금 한 번씩 나 홀로 외딴 섬처럼 느껴서 외로웠다. 그렇지만 나는 성격을 바꿀 생각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던 융통성 없이 연약한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화살은 밖을 향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왔다. 인간도 영화처럼 분류할 수 있다면 나는 B급 인간이 아닐까? 다행스럽게도 그때 비슷한 성향의 친구를 만나 그 시기를 잘 지날 갈 수 있었다. 군중 속의 고독이란 말도 그때 배웠다. 이따금 나누었던 문자가 외딴섬에 한 번씩 날아오는 편지 같았다. 어딘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구나. 강요된 소속감이 아닌 자발적 유대는 큰 힘이 되었다.
외로움은 주변에 아무도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남과 공유할 수 없는 것, 남과 공유할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칼 융
그런 청소년이 성인이 되었다고 금세 사회성을 얻는 건 아니었다. 4학년 졸업쯤이었나, 학과마다 그룹을 만들어 해외 탐방 프로그램 신청하느라 소란스러운 시기가 있었다. 전공만큼이나 타과 강의를 많이 들었던 시기가 있는데, 친분이 있던 교수님이 너는 주변이랑 어울리지 않으니 소식이 느린 거 아니냐며 걱정해 주셨다. 알고 있다고 한들 신청할리 만무했지만. 학과 사무실에서 근로하던 후배가 졸업식 안내 우편에 메모를 붙여 보내줄 정도의 교류는 있었지만 학교를 졸업하니 꾸준히 연락하고 지내는 인맥은 사라졌다. 인스타에 이따금 하트를 누르는 정도? 놀랍게도 일 년에 한두 번 안부 인사를 묻는 건 앞서 나를 걱정해 주었던 교수님이었다. 그때 나는 외로웠던가.. 외롭다는 감정이나 상태와 별개로, 살면서 인생에 필요한 친구는 모두 얻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굳이 누구와 친해질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요즘 간혹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다. 내 관심사를 두고 공감을 나눌 존재의 부재가 그렇다. 앞에서 '심심한 듯 외롭다'라고 말한 게 바로 그 지점이다. 이제는 '외롭다'가 '무료하다' 내지는 '심심하다'라는 감정과 비슷한 무게를 가지고 있다. 딱히 삶에 지장이 없는 감정이 되었다. 그래도 오랜 기간 외로움을 느꼈기 때문인지 사람이 외로우면 안 되나? 외로움과의 동행 같은 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기에 따른 외로움의 변화를 생각하며 책을 읽었는데 외로움이 곧 희석되거나 지나갈 감정이 아니라 상태, 그러니까 외로움의 단계를 지나 고립이 되면 사회적 문제가 되는 듯했다. 해소되지 않고 벗어날 수 없는 상태. 책은 외로움 단계 변화를 사회 재적응 척도와 함께 이야기했는데, 가족의 죽음이나 익숙한 환경을 떠나 낯선 곳으로의 이동과 함께 경제력 축소가 있었다. 생활 반경이 좁아지고 사회생활의 빈도가 줄어드니 외로움과 밀접한데 경제력은 왠지 외로움과 접점이 없어 보였다. 사실은 무척이나 밀접한데도.
외로움과 고립, 생각하다 보니 고독사라는 용어를 고립사나 독거사로 바꾸자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독거는 고립이 아닐 수 있고 고립은 1인 가구의 이야기가 아닐 수 있기에 고독사는 아직 다른 단어로 대체되지 않았다. 이 생각이 들 때쯤 책은 사회적 고립을 이야기하는 파트로 넘어갔다. 공동체의 붕괴, 디지털 사회에서의 소외 등 미디어에서 많이 듣고 익숙해진 말들이다. 마을은커녕 가족도 1인 가구가 증가하고, 인터넷을 기본으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정보에 소외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배경을 설명했는데 나로서는 혼자 사는 사람이 주류 사회에서 소외되는 것이 고립에 근접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책의 내용을 내 방식대로 해석하자면 자발적인 고립이 아닌 소외와 배제는 사람을 정신적으로 깎아먹는다. 외로움은 도화선이 되어 고립은 은둔으로, 오랜 은둔은 자기 방임을 지나 고독사로 이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다시 따져보자. 외로움이란 무엇인가. 사회적 유대감이 없는 비정상 상태, 만성적인 스트레스 유발, 인지능력 저하, 면역 기능 저하로 인한 질병 발생률 증가, 수면의 질 저하 및 노화 가속 등. 구체적으로는 악성 단백질 수치 상승, 만성 질환 위험성 증가.
이야기를 다시 고독사로 돌려서, 저자는 일본 고독사 사례의 8할이 자기 방임이라는 조사 결과를 근거로 고독사 예방이 어려우니 자기방임 단계에서 개입하는 것을 더 효과적인 예방책이라고 한다. 노화와 외로움의 부작용으로 일상적인 행위를 수행하기 어려울 때, 일상 회복을 지원하는 것. 그러나 여기서도 한국 사회의 특징이 나타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지원 대상이라는 건 곧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낙인과 스스로 해내지 못하고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려 한다.

책에서 소개된 일상 회복의 단계를 보면, 너무나도 당연하고 단순한 것 같은 활동까지 나아가는데 몇 가지 단계를 거쳐야 했다. 단순히 숨만 쉬고 생존하는 것을 떠나 나를 다듬고, 나를 가꾸는 것들을 관리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밖으로 나가는 단계를 제대로 밟을 수 있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사람을 만나지 않고 밖에 나가지 않는다면, 위생을 크게 해치지 않는 선에서 사람은 조금 지저분해도 매일을 살아가는데 별지장이 없다. 하지만 대외활동을 하게 된다면 냄새가 나거나 더러운 상태는 적절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를 다듬는 과정을 거친다. 유대의 시작은 어쩌면 사회 활동용이라는 목적을 가진 '나'를 만드는 것이라고 느껴졌다. 고립은 어쩌면 내가 나로서 제대로 존재하지 않는 상태인 것 같았다.
외로움, 고독, 고립. 어떠한 감정 내지는 상태가 아니라 내가 나를 잃어가는 상황일 수도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