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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조명]

어떤 대상의 의의나 가치를 다시 들추어 살핌

   

   

익숙한 대상과 사건들이 다시 새롭게 보이는 중입니다

이 글은 당연함에 가려졌던 그 가치를 재조명한 작업입니다

 

 

“세희야!” 


얼마 전 아빠가 엄마를 부르는 말에 나까지 대답한 적이 있다. 그건 그냥 날 부르는 이름이었는데. 엄마가 거의 나와 동시에 내 이름에 대답한 걸 들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부모님 세대에선 대부분 자식 이름(“○○아!” “○○엄마!”)을 넣어 서로를 부르는 것에 익숙하니까 이해는 간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는 호칭이다.

 

마침 스케줄 적는 노트가 펼쳐져 있길래 엄마 이름을 한번 끄적여 봤다. 한글로도 적고 영어로도 적어 보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 놓은 것들 중에서 이상하게 이니셜 ‘Y’에 꽂혀 버렸다. Y를 “와이”하고 장난스럽게 발음하다가 “와이...님?” 이렇게 말하게 됐는데 ‘님’자가 붙으니 내가 알던 엄마가 갑자기 멀게 느껴지는 것이다. 익숙하고 당연한 모양새의 실루엣에서 갑자기 새로운 형태의 실루엣 하나가 떨어져나온 것 같달까...?


Y에서 Y님으로 번진 호기심은 결국 한 사람의 존재감에 대하여 고민하게 만들었다. 익숙하고 당연하다고 해서 절대 무색무취일 리가 없는데. 알려고 하면 그게 뭐가 됐든 그때부터 우주가 될 텐데. 내가 간과하고 있던 누군가의 고유한 생명력. 그녀는 한결같이 곳곳에 흘렸으나 주위에서 미처 알아봐 주지 못한 그녀다움의 순간. 그 순간들을 더듬더듬 붙여 가다보니 어느새 나는 Y 이니셜을 가진 한 60대 여성과 낯설게 마주보고 있었다. 

 

 

Y(여, 60대 중반)

“뭐든지 잘 먹고 봐야 돼, 그래야 기운을 내지”

“나는 이렇게 뷔페처럼 늘어놓고 먹는 게 재밌더라?”

“숟가락 하나만 놓으면 되는데 뭐가 귀찮니? 귀찮은데 숨은 어떻게 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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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한 끼 정도는 생략해도 되는 거 아닌가 싶지만 보란듯이 식탁을 가득 채워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도 있다. Y는 “대충 때우자” 혹은 “먹고 치우자” 같이 ‘끼니’에 대하여 내려치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녀에게 ‘잘 먹는 일’은 ‘잘사는 일’과 같다. 솜씨도 좋은데 맛있게 만들어 먹는 즐거움까지 일찍이 알아버렸다. 조금만 부지런 떨면 풍요로워진다는 걸 음식으로 증명한다. Y가 작정하면 잔치날 연속이다. 들깨강정에서부터 청국장, 찐빵까지 직접 키운 작물을 야무지게 활용하여 꼭 시판 상품처럼 말도 안 되게 만들어 낸다.

 

Y의 부지런함은 그녀에겐 자부심일지 몰라도 자식에겐 늘 생고생처럼 비춰진다. 마당에 키우는 건 왜 그리 많은지 죄다 일감으로 보인다. 가꿀 게 생기니까 어쩔 수 없이 일이 생기는 거라고, 왜 사서 고생을 하냐며 투닥거리는 게 일상이다. 끼니 요정도 이렇게는 안 살 것 같은데... 열고 닫아야 할 반찬뚜껑이 지나치게 많다는 컴플레인에 귀찮아서 숨은 어떻게 쉬냐고 반격하는 Y다.

    

호박 가지 참외 등등 그런 걸 똑 따서 바가지 한가득 담아 가지고 부엌으로 들어오는 Y의 표정은 저녁 반찬과 디저트를 동시에 얻은 사람이랑 똑같다. 그도 그럴 것이 수확한 것의 시세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야채청과코너에서 일했기 때문에 알고 사먹으면 그렇게 배가 아프다는 것이다.


본업 이야기를 할 때 Y는 진지한 얼굴로 바뀐다. 한 분야를 오래 팠을 때 갖게 되는 통찰력으로 그 바닥(?) 섭리를 열심히 설명해 주는 그녀의 눈에서 빛이 난다. 이를테면 기온상승이 마트에 미치는 영향이나 생산-출하-매입 적기를 아는 것의 중요성 같은 얘기를 할 때.


“평균기온이 올라가니까 된장 고추장에도 소금이 더 들어가. 여름 장은 이제 점점 더 짜진다? 청국장도 겨울 거보다 여름 게 더 짜. 매대 맨 뒷줄 쌈장이랑 맨 앞줄 쌈장이 상태가 좀 다를 수도 있다고. 맨 앞줄 건 만지기가 쉽고 냉장고에서 제일 멀어서 사실 실내온도랑 제일 가깝거든.”


“생산, 출하, 매입 삼박자가 다 맞아떨어져야 좋은 상태에서 소비자한테 가는 거야. 적당한 시기 맞추는 게 되게 중요해. 복숭아나 체리는 후숙과일이라 더 그래. 너무 무른 상태에서 수확해도 안 되고 너무 덜 익은 상태에서도 하면 안 돼. 적당히 익었을 때 따서 팔아야 마진이 남아. 사들이는 사람도 그걸 다 계산해서 사들이는 거야. 너무 무른 걸 샀다? 감안해서 싸게 들여야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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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쪽으로 카리스마를 갖춘 청과물 박사는 귀여움도 갖추고 있다. 흥도 많고 잔재미도 잘 챙긴다. 기타를 튕기고, 찰흙으로 오리가족을 빚고, 낙엽으로 액자를 꾸미고, 클로버로 책갈피를 만들다. 심지어 잘 보이지 않는 뒤통수에도 아주 균일하고 짱짱하게 구르프를 잘 만다.  뜬금없이 구름 사진을 보내 입술 모양을 한번 찾아보라고 퀴즈를 낼 때도 있다. 앉은 자리에서 어떻게든 풍요롭게 지내는 것이 Y의 생명력일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있는 곳은 밝은 화단이 되고 화사한 정원이 된다.


Y 곁으로 사람이 모인다. 사회에서 만났으면 이모가 아니라 언니라고 불릴 사람. 그게 더 어울리고 실제로 그렇게 불린다. 인정이 많아 평소 주위에 따르는 사람이 많다. 지난 인연들에게 인기가 좋다. 밥 사 줄게 커피 사 줄게 아는 동생들이 매일같이 Y를 꼬신다. 그럴 만도 한 게 Y는 뭐가 생기면 그렇게 나눈다. 나눠 먹기 위한 접선을 즐긴다.


Y는 최근 노래방 이모와 접선이 잦다. 열무 좀 땄다고 검은 봉지에 한아름 담아 중간 지점인 산책로 다리 밑에서 만나는 식인데 그 이모도 만만치 않아서 고등어로 받아쳤다고. 잘 먹이고 싶은 마음이 자석처럼 주위를 끌어당긴다.

 

그녀의 꿈은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풍경처럼 푸른 자연에 마당 큰 내 집 짓고 편히 사는 것. 좋아하는 꽃들로 원없이 정원을 채우는 것. 대형 서재와 책상이 딸린, 누구도 방해 못할 나만의 공간을 갖는 것. 보탬이 될까 싶어 Y는 뭐 하나 걸려라 하는 심정으로 복권을 긁는다. 벅벅 긁더니 “에라이”하면서 꽝 된 종이를 패대기친다. 일확천금의 꿈은 날아갔어도 Y 얼굴에는 개구짐 가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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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딱거리며 어찌어찌 써내려 갔는데 이렇게 보니 드라마 등장인물 소개글 같기도 하다. 엄마가 가진 생명력을 떠올리고 그 이미지를 한데 모아 조립했더니 작품 속에 등장하는 하나의 캐릭터가 되었다. 애정하는 캐릭터를 바라볼 때의 그 소중한 감정이 그녀에게도 투영된다.


누구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되려 상대를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게 만드는 것 같다. 저 사람에게는 내가 모르는 불가사의한 영역이 아직 더 있을 거라고, 여지를 갖고 바라봐 주는 게 오히려 상대를 제대로 보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녀를 이렇게 Y로 대하다 보면 우연히 어느 순간에 또 다른 캐릭터들을 만나게 되는 날도 오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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