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achne.snap
사진은 보는 순간 머릿속에 특정한 인상을 남기지만, 글은 시간을 들여 읽어내야만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사진과 글은 서로 반대의 영역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만드는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좀 다르다. 한 장의 직관적인 사진 뒤에는 의도한 콘셉트를 완벽하게 구현하기 위한 사진작가의 지난한 시간이 쌓여 있다. 한 편의 글을 쓰는 동안 작가에게는 불현듯 떠오른 질문 하나로 거의 다 쓴 원고를 뒤엎어야 하는 순간이 종종 찾아온다. 치밀한 분석으로 직관적인 결과물이 탄생하는가 하면, 순간의 영감이 논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서예은 에디터는 직관과 논리를 오가며 사진과 글 둘 다 만드는 사람이다. 인스타그램에서는 ‘물레’라는 이름으로 여성 피사체 위주의 인물 스냅사진을 촬영한다. 아트인사이트에서는 프레스 겸 컬쳐리스트로 책과 영화리뷰를 주로 기고한다. 두 작업의 공통점은 ‘서예은만의 시선’이 드러난다는 것. 그는 자신의 시선을 통해 작품과 사람이 연결되고,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부지런히 기록하며 새로운 시선을 만들어가는 서예은 에디터를 지난 20일에 만났다.
Part 1. 사진: "새로운 관점으로 다양한 여성을 찍고 싶어요."

<도시천사>(2025), @arachne.snap
사진 이야기부터 들어보고 싶어요. 에디터님의 사진에서 키워드를 꼽자면 역시 ‘여성’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은데, 여성에 집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도 여성이고 친구들도 여성이 많다 보니 여성 피사체에 대한 이해도가 좀 더 높아서 자연스럽게 여성을 많이 찍게 돼요. 여성서사를 담아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어요. 여성 피사체는 주변에 흔하지만, 여성 작가가 표현하는 여성과 남성 작가가 표현하는 여성은 많이 다르거든요. 예를 들어 똑같이 신체 노출이 있는 촬영을 해도 포즈나 눈빛, 구도 같은 부분에서 남성 작가가 찍은 여성 사진이 훨씬 더 섹슈얼할 때가 많아요.
미디어 젠더 연구에서는 이러한 남성적/이성애적 관점을 ‘메일 게이즈(Male gaze)’라고 명명하는데요. 저는 여기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으로 다양한 여성을 찍고 싶어요. 제가 여성이기 때문에 담을 수 있는 여성의 모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냅사진을 찍은 지는 3년 정도 되었다고 하셨어요. 사진을 찍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미디어 전공이라 카메라를 사용하는 과제가 있었는데, 그때 자연스럽게 카메라 조작법을 배웠어요. 처음엔 기자재실에서 카메라를 빌려 쓰다가 나중에는 번거로워져서 보급형 DSLR을 샀죠. 그걸로 재미 삼아 친구들 사진을 찍어주던 게 시작이었어요. 자기 자신도 모르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줬을 때 기뻐하는 걸 보고 사진을 좀 더 전문적으로 배워보고 싶어졌습니다.
이후 ‘시현하다’가 운영하는 인물사진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들었고, 지금까지 다양한 사람의 인물 스냅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요즘도 사진을 찍고 결과물을 보여줬을 때 내게 이런 모습이 있는 줄 몰랐다는 말을 들으면 큰 뿌듯함을 느낍니다.

[Dreans of Mine](2025), @arachne.snap
에디터님의 사진 작업을 보면 독특한 콘셉트가 많은데, 이런 콘셉트는 어떻게 정하시나요?
모델의 평소 이미지를 보고 영감이 떠오를 때가 많아요. 그 영감을 오브제로 구체화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예를 들어 귀여운 이미지를 담으려 한다면 푹신하고 부드러운 오브제가 필요할 것이고, 구체적으로는 털모자, 솜인형, 털뱃지 같은 소품으로까지 생각이 뻗어 나가는 거죠.
물론 처음부터 촬영 콘셉트를 정해두고 제가 먼저 거기에 어울리는 이미지의 모델을 찾아볼 때도 많아요. 그러기 위해 평소에 촬영 시안을 많이 모아두고, 제가 어떤 촬영을 하고 싶은지 자주 생각하는 편입니다.
<이상과 환상 그 사이의 인물 스냅>에서 사진 촬영이란 "강한 책임감과 높은 미의식을 추구하게 하는 그 이상의 창작활동"이라 쓰셨던 것이 떠오르는 답변입니다. 평소 사진 작업을 하실 때 스스로 '작가로서' 사진을 찍는다고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작가’란 스토리를 담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사진도 마찬가지여서, 기획부터 보정까지 전 과정을 책임지며 제가 정한 스토리의 줄기를 반드시 따라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려면 모델이 현장에서 몰입할 수 있어야 하기에 콘셉트를 최대한 잘 이해하실 수 있도록 기획 단계에서 구체적인 레퍼런스를 많이 보내드리죠. 영화나 소설의 한 장면을 예로 들기도 하고 메이크업도 어떤 느낌이 좋을지 세세하게 말씀드려요. 이런 부분에서 저만의 작가의식이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들어보니 사진이란 제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모델과의 소통이 굉장히 중요한 작업이군요.
맞아요. 자기 내면에 잠기기보다 계속 변하는 생각을 밖으로 꺼내 보이고, 모델과 의견이 달라 서로 부딪히기도 하는 작업입니다. 제가 원하는 방향과 모델이 원하는 방향이 미묘하게 어긋날 때면 힘들기도 하죠. 물론 촬영 현장의 분위기도 사진에 큰 영향을 미치기에, 제 의견만 앞세울 수는 없어요. 소통하며 잘 합의해가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어린왕자>(2025), @arachne.snap
모델과 소통하는 과정이 기억에 남았던 촬영이 있다면요?
<어린왕자>(2025)요. 우주 콘셉트로 시작한 작업이었는데, 대화를 나누다 모델분께서 ‘우주’ 하면 어린왕자가 떠오른다며 먼저 새로운 제안을 해주셨죠. 다양한 여성의 모습을 담으려는 작가로서 저도 여성이 표현하는 어린왕자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지더라고요.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다가 어린왕자를 외계에서 온 생명체로 생각하고, 어린왕자가 장미에게 유리관을 씌워주는 소설 속 장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어요. 그래서 모델이 동그란 아크릴 볼을 머리에 썼죠. 빛이 잘 드는 용산가족공원에서 촬영을 진행했는데, 모델을 비추는 자연광이 신비로운 느낌을 잘 살려주었어요. 기획부터 촬영까지 저와 모델 둘 다 만족했던 작업입니다. 모델분의 아이디어로 탄생한 작품이라 감사하기도 했고요.
에디터님이 생각하는 ‘좋은 사진’이란 무엇인가요? 좋아하는 작가가 있는지도 궁금해요.
공감각적인 심상을 불러일으키는 사진을 좋아하고, 또 좋은 사진이라고 생각해요. 이미지 이상의 무언가를 상상하게 하는 사진이요. 사진을 보는데 향기가 느껴지거나 소리가 들리거나 맛이 느껴질 때가 있잖아요.
좋아하는 작가로는 엘리자베타 포로디나(Elizaveta Porodina)를 꼽고 싶어요. 화보 촬영을 많이 하는데 사진을 회화처럼 표현하는 게 특징이에요. 이분 사진을 보면 붓 터치가 생각나서 간질간질한 느낌도 들고 물감 향기가 나는 것 같기도 해요. 바람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표현 기법만으로 어떤 스토리를 상상하게 만드는 것이 이 작가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의 개관 전시 《광채 光彩: 시작의 순간들》에 갔다가 우리나라 1세대 여성 사진작가인 박영숙의 사진에 빠졌어요. 다양한 여성을 담은 사진에서 그 순간의 공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죠. 그중 우산을 든 여성을 하이앵글로 찍은 사진이 특히 좋았어요. 반가운 사람을 발견한 것처럼 우산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웃는 모습에서 여러 상황을 상상하게 되더라고요. 사진에서 빗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고요.
Part 2. 글: "글을 읽고 작품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하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arachne.snap
사진 작업 이야기를 쭉 들었으니 에디터님의 또 다른 한 축인 글쓰기 이야기도 들어볼까요. 아트인사이트에서 어떤 글을 쓰고 계신가요?
주로 책과 영화리뷰를 기고하고, 종종 사진 작업에 대한 글도 쓰고 있습니다. 리뷰를 쓸 때는 독자가 제 글을 읽고 작품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하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다른 리뷰를 미리 찾아보고 많은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과는 좀 다른 관점으로 글을 쓰려고 하는 편이에요. 그러다 보면 사람들이 주목하는 장면보다 제게 특히 의미 있게 다가온 장면이 중심이 될 때가 많죠.
글을 꾸준히 쓰시는데,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습관이나 루틴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뭔가를 보고 꼭 글로 기록해 두지 않더라도 생각을 많이 해요. 영화를 한 편 봤다면 어떤 장면이 좋았는지, 그게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반면 왜 이 장면은 공감이 되지 않았는지... 스스로 질문을 던지며 메모를 하죠. 그런 습관이 글 쓰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글의 구성은 두괄식을 선호해요. 문단을 미리 나눠놓고 중요한 문장을 적은 후 거기에 살을 붙이는 식으로 글을 씁니다. 어릴 때부터 글의 서두는 독자의 흥미를 자극해야 한다고 배워서인지 첫 문단에서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많이 해요. 공감할 법한 이야기로 시작해 점차 주제를 확장하는 구조를 좋아합니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요즘 에디터님의 관심사는 무엇인가요?
글 쓰는 사람이라면 물론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내면의 평화를 찾는 것 역시 중요한 것 같아요. 요즘은 어떻게 평정심을 갖고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며 살 수 있을까 자주 생각해요. 취업, 진로 고민도 다 그 안에 있죠. 그래서 정리정돈에 관심이 많습니다. 물건을 배치하는 방법과 주변을 깔끔하게 청소하는 팁 같은 거요. 사진에 셋팅이 중요하듯이 주변 환경이 제 심리 상태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걸 최근에 알게 되었거든요.
또, 내면을 풍요롭게 해주는 미시적인 가치와 활동에도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원래는 조용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미술관에 가는 걸 좋아했는데, 요즘은 좀 더 다양한 걸 해보고 싶어 일부러 페스티벌에 참여하거나 여행을 다녀오기도 해요. 소중한 순간은 내가 나서서 일부러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의식해서 소중한 순간을 만들고 기억하려 노력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행복의 맛은 달콤쌉쌀하다>에서 쓰신 "자신의 행복을 발견한 순간을 똑바로 마주하고 이것을 기억했을 때 삶에 기대를 품는 것은 훨씬 쉬워진다."라는 문장이 떠오르기도 해요. 에디터님에게 선명히 남아 있는 "행복을 발견한 순간"은 언제였나요?
사진을 찍어서 그런지 주로 일상에서 멋진 풍경을 마주할 때 행복을 자주 느낍니다. 그중에서도 선명히 떠오르는 건 어느 겨울날 아침입니다. 눈을 떴더니 눈이 내리고 있었죠. 집이 오래된 동네에 있어 주변에 노인분들이 많이 사시는데요, 창밖을 보니 다들 이른 새벽부터 눈을 치우고 계셨어요. 고요히 내리는 눈을 보며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던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요. 겨울인데 온기가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arachne.snap
사진을 찍으셔서 그런지 말씀하실 때도 사진을 보는 듯 생생하게 묘사하시네요. (웃음)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일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도 할 것 같아요.
서로 도움이 됩니다. 사진 작업은 세밀한 부분을 구석구석 살펴야 해요. 특히 보정할 때면 수차례 확대와 축소를 반복하며 빛이 어떻게 사진에 담겼는지를 확인해야 하죠. 제 글에 구체적인 묘사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사진 작업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묘사가 수월해질 때가 있습니다. 반대로 글쓰기가 사진에 도움이 되기도 해요. 제 사진의 콘셉트는 제가 쓴 글에서 시작될 때가 많기 때문이죠. 그래서 다른 작가보다 콘셉트가 구체적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아트인사이트를 매개로 만나 사진부터 글쓰기까지 폭넓은 대화를 나눴는데요. 에디터님에게 아트인사이트란 어떤 곳인가요?
관심사가 비슷한 친구와 만날 때면 어릴 적 친구처럼 격의 없이 친밀하진 않아도 기분이 좋고 행복해지잖아요. 제게 아트인사이트는 그런 친구처럼 느껴져요. 취미공동체 같기도 하고요. 공감되는 글도, 배우게 되는 글도 많아서 같은 관심사로 토론을 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도 해요. 불특정다수에게 공개되는 글을 쓰면서 저만의 취향과 생각을 단단하게 만드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이제 마지막 질문입니다. 앞으로 에디터님이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요? 무엇이든 자유롭게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근본적으로 예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는데, 우선 제 이름으로 책을 출판해보고 싶어요. 소설이나 시로요.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하는 리뷰나 에세이는 제 생각을 직접적으로 전하는 형태인데, 그것도 좋지만 좀 더 우회적인 방식으로도 저를 드러내보고 싶거든요. 소설과 시는 그렇게 하기에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사진 쪽으로는 제가 정말 보여주고 싶은 여성의 모습을 담은 사진전을 열고 싶습니다. 지금도 작업은 계속하지만, 일반적인 스냅사진은 정해진 규격을 벗어나기가 어렵거든요. 제가 정말로 보여주고 싶은 여성의 모습은 모델과 소통하며 탈락할 때가 많죠. 저는 결국에는 예술 사진작가가 되고 싶어요. 미디어 젠더 연구에서 ‘피메일 게이즈(Female gaze)’라는 건 논의되지 않는데, 그런 관점을 가진 작가로 성장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