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억울하거나 화가 치밀어 오를 때, 어떻게 대응하는가? 감정, 특히 분노는 폭력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특성으로 인해 이성의 끈을 잡고 참는 것이 미덕이라고들 한다. 참다 참다 속에 천불이 나서 결국 화병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불특정 다수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리는 이유도 참기의 미덕을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대개 참기의 미덕을 따르는 이들은 소위 사회의 ‘비주류’로 자리 잡은 소수자들―여성, 퀴어, 비백인, 노인, 장애인, 어린이―이다. 이들이 감정적으로 굴 때, 권력의 편에 선 사회의 눈초리는 따갑다 못해 고통스럽다. 우아하고 고상하게 감정을 누르고 대응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일침이 날아오는 순간, 비주류가 지닌 이 들끓는 감정은 배제되고 결국 삭제된다. 그러나 분노에는 저항적인 성격이 있다. 분노만큼 부당하고 기울어진 현실의 진상을 드러내는 데 효과적인 감정은 없다.
<불도저에 탄 소녀>는 분노가 마음껏 색칠된 영화다. 여기 소년 재판이 진행 중인 법정에서 선고를 받고 있는 소녀가 있다. 약자를 지키기 위해 불량 학생 세 명을 폭행한 혐의로 혜영(김혜윤 분)은 판사로부터 폭력 교정 수강과 직업 교정 수강을 명령받는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 얼굴에 드리워진, ‘그러거나 말거나’라는 식의 귀찮음을 감추지 않는다. 반성의 여지도 없다. 재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불량 학생을 다시 찾아가고 그들을 발견하자마자 팔 전체를 휘감은 용 문신을 드러낸 채 경주마처럼 내달린다. 이어서 심한 매질과 악에 받친 혜영의 얼굴이 화면 전체를 채운다.
혜영이 분출하는 주된 감정은 분노이다. 영화 초반에 그녀가 자주 분노를 내보이는 상대는 한때 경마로 돈을 날린 전적이 있는 아버지 본진(박혁권 분)이다. 그녀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무능함과 순진함의 표상이나 다름없다. 화상을 입은 본진을 따라 병원을 찾은 혜영은 의료 보험이 정지된 상황에서 87만원을 납부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카드를 긁자마자 원무과로부터 한도 초과가 나왔다는 사실을 전달받은 혜영은 본진을 타박하지만, 그럼에도 본진은 혜영더러 공부하고 꿈을 가지라며 순진하게 말한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서 공부라니. 기가 찬 혜영은 본진을 향해 윽박지른다. “너나 잘해.”라고.
타인도 예외는 아니다. 직업 교정 강의를 들으러 온 혜영은 그곳에서 건설 기계 운전에 대해 가르치는 강사(양준명 분)를 만난다. 그는 다짜고짜 가만히 앉아있던 혜영을 앞에 두고 여자 수강생이 왔다는 게 신기하다며 지금 강의가 어떤 내용인지 알고 온 게 맞냐고 무시하듯 묻는다. 건설 기계를 운전하는 성별이 강사에게는 남성으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차별적 언사에 심기가 거슬린 혜영은 말한다. “그딴 게 어디 있어.” 이후 실습 시간이 되고 강사는 혜영을 다시 얕잡아본다. 그러나 그녀는 남자 실습생들이 다루기 벅차하는 불도저를 능숙하게 다루며 강사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혜영은 살아있는 모든 사람에게 공격적인가? 앞선 사례에서도 나타났듯이 혜영의 공격적인 성향이 표출되는 상대는 현실 감각이 없는 아버지, 자신에게 먼저 시비를 걸거나 부당한 행위를 스스럼없이 내보이는 사람에게 한정된다. 본진이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를 당하자, 그녀는 해당 사건을 수사 중인 고유석 경위(예성 분)를 찾아간다. 경찰서에서 경위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누군가가 혜영의 머리를 수첩으로 때린다. “얘 또 왔네? 또 폭행이야?”라고 조롱하는 형사를 향해 혜영은 망설임 없이 서류로 그의 뒤통수를 내리친다. 자신을 먼저 건드린 사람에게 똑같이 되갚아준 것이다.
아버지가 운영 중인 중국집을 인수하러 온 부부가 들이닥쳤을 때도 혜영은 먼저 그들에게 누구냐고 묻는다. 하지만 그들이 어린 혜영에게 반말을 내뱉고 깔보자, 그녀는 중식도를 들고 위협을 가한 뒤 내쫓는다. 반면, 초등학교에 다니는 남동생 혜적(박시우 분)에게는 다정하게 대한다. 어머니가 부재하는 집안에서 그녀는 남동생의 끼니를 챙겨주고, 머리를 감겨주고, 학교에도 데려다주는 등 보호자가 해야 할 역할을 전부 수행하는 속 깊은 면모도 보인다. 아버지 본진의 교통사고를 수사 중인 고유석 경위(예성 분)에게도 말투는 불친절하지만 예의는 지킨다. 이렇듯 혜영의 분노에는 적정선이 존재한다. 최소한의 선을 함부로 넘는 이에게 친절할 필요가 없을까. 그렇기에 혜영이 자기만의 분노 마지노선을 넘어오는 사람에게 공격적으로 구는 건 어찌 보면 타당해 보이기까지 하다.
본진의 교통사고를 홀로 조사하면서 혜영의 분노는 고점을 찍게 된다. 여기서 분노는 부당한 일에 맞서 싸우는 저항적 힘으로 발산된다. 작품 중후반부에 이르러서 혜영은 최 회장(오만석 분)이 아버지의 권리금을 챙기기 위해 삶의 터전이자 재산이었던 중국집을 빼앗고, 그를 벼랑으로 내몰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기 위해 그녀는 발 벗고 나서지만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도리어 혜영을 나무란다. 폭언과 폭력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던 혜영은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굳게 결심한 듯 눈물을 닦는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면 비상식으로 대응하기로. 늦은 밤, 불도저를 탈취한 혜영은 중국집 건물 앞에 나타난다. 건물을 가루로 만들어 버릴 심산인지 그녀는 제 손으로 후진과 전진을 반복하며 중국집 건물을 산산조각 낸다.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뜨거운 분노를 몸에 휘감은 그녀는 마침내 최 회장이 거주하는 부유층 아파트까지 부수고 만다. 큰 소란과 함께 유리창이 깨지면서 새어 나오는 바깥 공기로 인해 최 회장은 잠에서 깨고 그는 불도저에 올라탄 혜영과 눈이 마주친다. 여기서 더 잃을 게 없다는 눈빛. 망해도 상관없다는 눈빛. 불도저와 한 몸이 된 혜영은 무서울 게 없다. 뒷일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혜영이 균열을 일으키고 부수는 것은 한 쪽으로만 기울어진, 폭력의 세계다. 돈과 권력으로 개인을 처참히 짓밟는 세계, 가난한 사람을 인간 취급하지 않는 세계, 불의에 맞서지 말라며 뒷목을 잡아끄는 세계, 침묵을 강요하는 세계. 성난 소녀는 참을성을 키우는 대신 뜨겁게 저항하는 쪽을 택한다. 적극적으로 분노를 활용한다. 앞으로 호의적인 시선을 받지 못해도 상관없다. 사회가 내게 호의적이었던 때가 있긴 했나?
<불도저에 탄 소녀>는 차별적인 기존 체제를 역동적인 분노로 박살 낸다. 참을성을 미덕으로 내세우지 않고 마음껏 화내고 질주한다. 그 주체로 가난, 한 부모 가정, 소녀, 반항아라는 이름표를 가진 혜영을 내세우며 중심에서 내몰린 사람들을 대변한다. 그녀는 기꺼이 악순환으로 뛰어들고 결국 폐허를 만든다. 우리는 악에 받쳐 소리치고 저항하는 혜영을 통해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그녀의 감정 분출은 세상이 권력의 입맛대로 돌아가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선언이라는 것. 마지막에 영화는 우리에게 질문한다. 참기의 미덕은 단지 입막음용일 뿐이며 허상에 불과하다. 이래도 참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