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례 시인은 일상에서 특별한 예외를 찾아내는 시를 많이 발표했다. 시인의 여러 시를 읽으면서 시인이 가져야 할, 필요한 눈을 가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수 냄비를 보고 “긴 손잡이가 달린 편수 냄비의 월요일이었다.”(「긴 손잡이가 달린」, 『빛그물』 수록)와 같은 흐름이나 동대문시장의 이불 장수가 붙잡은 날은 떠올리며 개미, 포자, 곰팡이, 호랑이 이불(「이불 장수」, 『빛그물』 수록)을 찾아낸다. 즉, 일상에서 볼 수 있는 냄비와 이불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는다. 사람들이 보는 시각을 따라가지 않으며 최정례 시인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시를 채운다. 이를 통해 독자는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일상 속의 예외를 발견한 시인을 따라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의 시를 읽는 시간은 예외에 속한 시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본격적으로 시인이 찾아낸 일상의 시간을 세 편의 시를 통해서 알아보자. 일상 속의 사물, 그리고 일상 속의 죽음, 마지막으로 일상 속의 특별함의 순서로 시를 읽어보려고 한다. 먼저, 장롱이라는 흔한 소재에 전철 시간표를 붙이면서 일상성과 새로움을 모두 가진 시 「그 시간표 위로」이다.
그 집에 살 때, 장롱 문 안쪽 거울 옆에 전철 시간표를 붙여두었었다. 그 시간표에 눈을 주고 적어도 몇 분에 집을 뛰쳐나가야 그것을 잡아탈 수 있는지, 연신 시계를 보며 옷을 입고 로션을 발랐다. 전철은 십오 분 간격으로, 주말에는 그보다 드물게 왔다가 갔다. 그 집을 떠나 몇 번을 이사했는지 셀 수도 없다. 장롱 문 안쪽에 손바닥 반만 한 시간표를 그대로 붙여둔 채 이사를 다녔다. 장롱은 조금씩 부서지고 부서져서 어느 집으로 이사할 때 내다버렸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오늘 아침, 밖에서 누가 경적을 울렸는데 문득 그 시간표가 떠올랐다. 코트 안주머니 깊숙이 뭔가를 넣어두었다가 몇 계절이 지나도록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처럼,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그것이 무엇이었는지조차 모르겠다. 언젠가는 이 말을 하리라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때가 올 것이라고.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리다 보면 갑자기 녹음이 짙어지는 곳이 나타난다. 처음 가보는 곳이지만, 그래 여기서 내리자 여기서 내려 살아가자, 그랬던 어떤 순간이 있었다. 그때처럼 갑자기 어떤 결심이 서는 순간, 그때에 하리라. 당신이 내 이야기를 들어줄 어떤 순간이 올지 어떨지 짐작할 수는 없지만, 꼭 한 번은 말하고 싶었다. 그 시간표 위로 지나간 전철들을 도저히 다 셀 수는 없다. 이제 와서 그것들, 그 말들, 그런데 어느 날은 그 이야기 꺼내지도 못하고 그냥 죽을 것만 같다. 그런데 난 왜 이러는 것일까, 얘기를 들어줄 사람은 들을 생각도 없는데.
그 시간표 위로 (『개천은 용의 홈타운』 수록)
시는 산문시 형식을 보이고 있으며 행갈이 없이 진행된다. 마치 네모난 장롱문을 옆으로 뉘어둔 것 같은 모습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 시간표’라는 표현의 반복으로 시간표라는 명사 앞에 ‘그’라는 지시 대명사를 붙인다. 이로써 독자는 운율감을 느낄 수 있다. 시간표를 일상으로 본다면 ‘그’라는 표현은 일상에 부여된 특별함이자 시인만의 시각이다.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시간표가 아닌 시인의 경험에 의한 시간표라는 것이다. 시에서는 ‘장롱 문 안쪽 거울 옆에 전철 시간표’를 조명한다. 시의 화자는 해당 시간표를 통해서 집에서 언제 나갈지를 확인한다. 그러면서 이사를 다닐 때마다 항상 화자의 곁에서 일상(하루)의 시작을 함께한 사물이 된다.
그러나 어느 순간 화자는 조금씩 부서지는 장롱으로 인해 장롱의 존재를 잊게 된다. 서서히 잊게 된 장롱 속 시간표는 오늘 아침 누군가의 경적을 들으며 순간적으로 떠오른다. 시의 시간은 오늘을 회상하며 언젠가는 ‘이 말’을 하리라고 생각한다. 시를 읽으면서 과연 화자가 하고자 한 말은 무엇일지 고민했다. 일상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시간을 말할 수도 있고 당신과의 이야기를 할 수도, 어쩌면 버스에서 내려 오늘을 살아가겠다고 생각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그저 ‘일상의 이야기’에 해당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일상을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데,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지점에서는 화자가 셀 수 없이 많이 다닌 ‘이사’ 역시 주목해 볼만 하다. 이사가 일상이지 않으며 태어난 고향에서 계속 삶을 이어가는 과거 사회와 다르게 요즘에는 이사가 일상이다. 자식을 위해서, 부모를 위해서, 스스로를 위해서, 직장이나 학교로 인해서 이삿짐을 싸는 일은 일상이 되었다. 시의 화자 역시 이사가 일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조차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것은 외롭고 위태로운 화자를 보여준다. 더 나아가 ‘십오 분 간격으로’ 다니는 전철 역시 정기적이고 규칙적인 일상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시는 마지막 두 줄에서 죽음을 언급한다. ‘그냥 죽을 것만 같다’라며 오늘 경험한 하루를 이야기할 누군가가 없다는 사실과 그로 인한 외로움의 감정이 극대화된다. 버려졌지만 어디쯤에서 버렸는지 모르는 장롱과 그 속의 시간표는 화자의 일상에 중요한 사물이자 존재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잊어버리고 잃어버렸다. 이는 지금 화자의 상태로 이어진다. 화자 역시 누군가에게 오늘 하루, 즉 일상의 이야기를 할 수 없이 홀로 버려진 상태이다. 시내버스를 타고 녹음이 가득한 곳에 내리며 삶을 다짐한다. 그 순간 ‘나’는 당신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그 말을 꺼내기로 한다.
하지만 시의 결말 부에서 당신은 ‘나’의 얘기를 들을 생각이 없음을 보여주며 끝이 난다. 사물의 의미를 인물의 상황으로 끌어드리는 자연스러운 과정과 힘이 재미있는 시였다. 시의 전체에서 일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각과 장롱을 떠올린 순간을 멈추어서 구체적으로 조명하는 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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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일상 속의 죽음에 대한 시 「나는 짜장면 배달부가 아니다」가 있다. 앞에서 짧게 언급한 ‘죽음’이라는 키워드는 이 시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사촌이라는 인물로 드러난다. 동시에 퉁퉁 불어버린 짜장면 역시 짜장면 세계(이 세계에서 면은 불면 안 된다는 명제가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면) 에선 죽음 통보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화자 그 자체의 꿈에 대한 실현되지 못함의 죽음이 있다. 즉, 시인은 시에서 세 유형의 죽음을 하나로 융합하여 보여준다. 화가가 되고 싶었던 ‘나’가 어째서 짜장면 배달부가 아님을 고백하게 되었는지 알아보자.
화가가 되고 싶었다. 대학 때는 국문과를 그만두고 미대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 년 내내 그 생각만 하다가 결국 못 갔다. 병아리를 키워 닭이 되자 그걸로 삼계탕을 끓였는데 못 먹겠다고 우는 사촌을 그리려고 했다. 내가 그리려는 그림은 늘 누군가가 이미 그렸다. 짜장면 배달부라는 그림. 바퀴에서 불꽃을 튀기며 오토바이가 달려가고 배달 소년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자 짜장면 면발도 덩달아 불타면서 쫓아갔다. 나는 시 같은 걸 한 편 써야 한다. 왜냐구? 짜장면 배달부 때문에. 우리는 뭔가를 기다린다. 우리는 서둘러야 하고 곧 가야 하기 때문에. 사촌은 몇 년 전에 죽었다. 심장마비였다. 부르기도 전에 도착할 수는 없다. 전화 받고 달려가면 퉁퉁 불어버렸네, 이런 말들을 한다. 우리는 뭔가를 기다리지만 기다릴 수가 없다. 짜장면 배달부에 대해서는 결국 못 쓰게 될 것 같다. 부르기 전에 도착할 수도 없고, 부름을 받고 달려가면 이미 늦었다. 나는 서성일 수밖에 없다. 나는 짜장면 배달부가 아니다.
나는 짜장면 배달부가 아니다 (『개천은 용의 홈타운』 수록)
앞서 말했듯이 시엔 세 번의 죽음이 각각의 층위로 나뉘어 등장한다. 처음에는 화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지만, 생각만 하다가 못 갔고 자신이 그리고자 그림은 새로움이 아닌 반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화자이다. 시 속의 화자는 마치 ‘내 꿈은 죽었다’라고 명시하는 듯하다. 그리고 등장하는 죽음은 사촌의 신체적인 죽음이다. 이 사이에 닭이 삼계탕이 되는 죽음도 나오지만, 언급만 하고 넘어간다. 어쨌든 사촌은 몇 년 전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죽었다. 이때 화자는 ‘내 사촌은 죽었다’라고 명시하는 듯하다. 마지막 세 번째 죽음은 짜장면이 퉁퉁 불어버려 먹을 수 없는 상황, 음식의 죽음이다. 이때에도 화자는 ‘내 짜장면은 죽었다’라고 명시하는 느낌으로 시의 마지막 문장에서 ‘나는 짜장면 배달부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죽음을 하나로 묶어내는 키워드는 ‘기다림’이라고 생각한다.
세 가지 죽음 모두 기다리지만, 그리고 기다리다가 죽음을 맞이함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직접적으로 시에서 ‘우리는 뭔가를 기다리지만 기다릴 수가 없다’라고 언급한다. 시인이 말하는 ‘뭔가’는 무엇일까. 시에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죽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죽음이 오기까지를 기다리며 삶을 살아가지만, 죽음은 기다림의 과정에서 순차적으로 오지 않는다. 갑작스럽고 우연히, 그리고 대비되지 않은 상태로 찾아온다. 즉, 기다리는 존재의 주체성보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자연의 섭리가 더 큰 범위에서 작용하는 것이다. 삶의 꿈(목표) 역시 마찬가지이다. 꿈을 이루길 기다리지만,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다. 마치 일상을 살아가지만, 인지하지 못한 채 사라진 ‘장롱’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죽음을 기다리지만, 기다릴 수가 없다라고 말한다고 생각이 들었다. ‘뭔가’에 다른 것을 넣어볼 수도 있다. 시는 읽는 이마다 다르게 읽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시인은 ‘나는 시 같은 걸 한 편 써야 한다’라며 자신의 생각을 독자에게 전한다. 일상의 경험에서 느끼는 시인의 이야기를 시라는 형식으로 보여주겠다는 한 시인의 다짐처럼 다가온다. 최정례 시인의 독자라면 이미 시인은 시 같은 것(사실 시 그 자체이지만 시인의 표현을 빌린다)을 쓰고 있음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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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일상 속의 특별함에 대한 시 「비 맞는 전문가」이다. 이 시는 1998년 출간되었다가 최근인 2019년에 새롭게 개정되어 재출간되었다. 약 20년 만에 독자들은 최정례 시인의 시를 새로운 지면으로 모습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시기는 시인이 희귀 혈액질환으로 투병하기 시작한 2020년에서 얼마 전의 과거이다. 해설 부분만 바뀌어 복간된 시집이다. 이번 감상문엔 시인만이 가진 특유의 동물을 다루는 시선이 담긴 시를 많이 가져오진 않았다. 그럼에도 새롭게 발행된 시집 『햇빛 속의 호랑이』를 읽으면 시인에 대한 그리움이 생긴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와서 시를 살펴보자.
십여 년 동안 그가 한 일은
비 맞는 일뿐이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그는 재빨리 나가야 한다
버스 정거장 가로수 아래로
머리에 코에 수염에 빗줄기가
주르륵 흐르도록 해야 한다
주머니 가득 빗물을 채우고
그를 기다렸던 버스가 텅 빈 채
다시 출발할 때까지
서서 비를 맞아야 한다
건너편 창에서
그녀의 그림자 사라질 때까지
과자처럼 바삭거리며
리모콘과 뒹구는 그녀를 위해
가로수 늘어진 가지를 흘러
머리카락 타고 떨어지는 빗방울을
셀 수 있어야 한다
담배는 주머니 안에서 죽이 돼야 한다
그녀가 원하면 언제든지
비 맞는 장면을 보여 줘야 한다
죽을 때까지 지독하게 젖는 일을
불편없이 사랑해야 한다
전근대적 추억을 고용하려고
희생적 지출을 한 그녀를 위해
그는 비 맞는 전문가니까
비 맞는 전문가 (『햇빛 속에 호랑이』 수록)
시는 제목부터 현실을, 삶을 바라보는 시인만의 시각을 탑재하게 유도한다. 비를 맞는 전문가, 비 맞기에도 전문가가 있다면 꽤 많은 인고의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시에서 ‘그’라고 불리는 인물은 그녀를 위해서 전문가가 된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풍경을 보면서 비 맞는 전문가를 떠올린다는 일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최정례 시인의 시적 발상과 일상을 면밀히 관찰하는 시각이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비를 맞는다는 행위를 즐기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럼에도 시 속의 ‘그’는 어느 정도 자신의 일에서 ‘죽을 때까지 지독하게 젖는 일을 불편 없이 사랑해야’함을 알고 있다.
누군가가 그에게 네가 하는 일은 쓸모없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에는 그렇게 보이는 것이 오히려 평범한 축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과 독자의 눈에서 그는 어쨌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인물이다. 즉, 소명을 실현하는 순간으로 볼 수도 있다. ‘비 맞는 일’ 자체에 대한 나름의 노하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동시에 재빨리 버스 정거장으로 가며 머리카락을 타고 떨어지는 빗방울을 셀 수 있다. 한 직업에 이 정도로 전문적인 모습을 보이는 인물이라면 어쩌면 가장 뛰어난 사람일 수도 있다. 물론 시에서 그가 왜 비를 맞는 전문가가 되었는지를 물어본다면, 표면적으로는 ‘희생적인 지출을 한 그녀’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에서 현대 사회의 계급적 관계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녀’는 돈을 지불하는 갑, ‘그’는 돈을 받고 일하는 을일 수도 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누군가는 즐거움을 얻는 모습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비슷해 보인다.
일상 속의 특별함을 발견하는 시선으로 인해서 시인이 본 비 내리는 날은 특별함을 가지게 되었다. 만약 나중에 비 오는 길가를 걷다가 비 맞는 전문가를 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