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국내 초연 이후, 한국뮤지컬어워즈 대상 수상을 비롯해 폴란드, 일본, 영국 웨스트엔드까지 진출하며 전 세계적으로 호평받아온 뮤지컬 <마리 퀴리>가 올해 네 번째 시즌으로 돌아왔다. 라이브 오케스트라의 풍성한 사운드를 더한 이번 공연은, 과학자이자 여성, 이민자였던 마리 퀴리의 입체적인 모습을 한층 깊이 있게 담아낸다.
뮤지컬 마리 퀴리는 방사성 원소 '라듐'을 발견해 인류 과학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실존 인물, 마리 스클로도프스카 퀴리의 삶을 무대 위에 생생하게 되살려낸 작품이다. 단순한 전기적 서사를 넘어, 이 작품은 ‘발견’이라는 과학적 성취와 ‘책임’이라는 윤리적 고뇌 사이에서 흔들리는 한 인간의 내면을 조명하며, 관객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과학을 왜하십니까?
궁금하니까. 궁금한걸 참을 수 없어서요
그런데 그걸 실험이라고 그걸 과학이라고 부르더군요
그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합니다. 과학
- <예측할 수 없고 알려지지 않은> 中
무대 위에서 마리 퀴리가 던지는 이 대사는, 그녀가 과학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약소국 폴란드 출신의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그녀에게 수많은 편견과 제약을 주었지만 가설이나 연구, 새로운 원소는 그녀의 출신과 성별을 묻지 않았다. 뮤지컬 마리 퀴리는 오직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한 과학자의 태도를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가설을 세우고, 실험하고, 결과를 통해 검증해가는 그녀의 과정은 과학자로서의 본분을 충실히 보여주며 관객을 몰입하게 만든다.
라듐을 발견한 마리는, 그것이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나는 ‘기적의 물질’이라고 확신했다. 그녀는 공익을 위해 연구 방법을 공개했고, 라듐은 빠르게 상업화되었다. 라듐 시계, 라듐 화장품 등 사람들은 라듐이 만들어낸 빛나는 신세계를 열광하며 받아들였다. '기적의 물질, 혁신적인 새로운 발견, 새로운 시대!'라고 외치는 넘버 〈라듐 파라다이스〉는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그대로 옮겨온 장면으로, 찬란한 조명과 군무가 더해져 마치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 같은 축제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라듐은 곧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공장에서 라듐을 다루던 노동자들의 신체에 이상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마리는 직접 실험을 통해 그 원인을 파악하려 한다. 처음엔 가설대로 실험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이지만('두시간 지나 실험군은 더활발한 움직임. 생각대로 되고 있어. 내 가설 맞았어. 특별한 이상 없다. 컨디션 최상!'), 곧 예측할 수 없는 수치와 반응들이 이어지며 혼란에 빠진다.('실험군은 이상해져. 둔해진 움직임. 예상치 못했던 비정상적인 수치들. 이게 뭐야, 대체 뭐야.'-넘버 <문제없어>) 〈문제없어〉에서 공장 직공 배역을 맡은 배우들이 실험쥐를 연기하는데, 미래를 예견한 이 넘버가 굉장히 섬뜩하게 느껴졌다.
결국 안느를 제외한 공장 직공들은 라듐 합병증으로 모두 세상을 떠나게 되고, 이어지는 넘버 〈죽은 직공들을 위한 볼레로〉에서 이들의 이야기가 무대 위로 올라온다. 이름도 없이 죽어간 직공들이 자신이 이루고 싶었던 꿈을 노래하며 울부짖고, 이들의 동료였던 안느는 고통 속에서도 침묵하지 않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공장의 높은 탑 위로 오른다. “내가 죽으면, 날 공개적으로 부검해요!” 안느의 외침은 단순한 고발을 넘어서 누군가는 이 죽음의 이유를 정확히 기록하길 바라는 외침이었다.
높은 탑 위에 서있는 안느를 제지하려 마리가 달려오고, 넘버 〈그댄 내게 별〉이 이어진다. 이 장면에서 마리는 안느의 진심 어린 목소리를 마주하게 된다. "당신은 라듐으로 빛난 게 아니야. 당신 자체가 빛나는 별이었어.” 안느의 이 한마디는, 과학자로서 살아남기 위해 오직 성과만을 좇아온 마리의 굳게 닫힌 마음을 천천히 흔든다.
사회의 편견, 약소국 출신의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어야 했던 수많은 제약 속에서 마리는 언제나 자신을 증명해야 했고 그래서 라듐은 단순한 발견 이상의 의미였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해줄 유일한 증거이자, 자신과 동일시된 빛이었다. 하지만 그 푸른 빛이 타인을 해칠 수 있는 위험한 것이었음이 드러난 순간, 마리는 자신의 존재까지 함께 무너지는 듯한 절망을 느꼈다.
그런 마리에게 안느는 말한다. '너의 꿈이 나를 설레게 했어.' 안느에게 마리는 찬란한 발견으로 세상을 바꾼 과학자이기 전에, 더 나은 미래를 꿈꾸게 만든 존재였다. 안느의 진심에 마리는 조심스레 응답한다. '길을 잃은 날 의심할 때, 너는 나보다 더 날 믿어줬지.'(넘버 <그댄 내게 별>) 성과가 아닌, 존재 자체로 인정받는 경험. 마리는 안느의 말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이 ‘결과’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였음을 깨닫는다.
이 장면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서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여성이, 서로를 바라보며 건네는 진심 가득한 신뢰의 표현이었다. 안느는 마리를 같은 나라에서 온 동지이자 존경받아 마땅한 과학자로 바라보고, 마리는 안느의 그 시선 속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다시 발견한다. 그리고 마리는 안느에게 라듐이 인류에게 해가 되지 않는 방법을 꼭 찾겠다고 약속한다.
공연의 마지막, 마리는 라듐으로 인해 고통받은 이들에 대한 책임감과 죄책감 속에서 말년의 삶을 되돌아본다. 인류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 믿고 기쁘게 시작했던 연구였지만, 라듐의 예상치 못한 위험이 드러났을 때, 그녀는 깊은 좌절과 고통을 겪었다. 그런 마리 앞에 딸 이렌이 나타나 이야기한다. 전쟁터에서 라듐은 X선 기술로 발전해 수많은 부상자들을 살렸고, 마리는 여성 과학자들의 길을 열며 새로운 세대에 분명한 영향을 남겼다고.
그녀의 발견이 결국 인류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점은 극 중 마리가 스스로를 용서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작은 힘이 되어주었던 것 같다. 마리가 위로받는 그 장면에서 나도 울컥했는데 뮤지컬을 보는 내내 그녀가 감당해 온 무거운 고통이 그 순간만큼은 조금 달래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단지 위대한 과학자의 삶을 조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 깃든 인간적인 고뇌와 회복의 순간까지 담아냈기 때문에 이 뮤지컬이 마리 퀴리의 고국 폴란드에서도 깊은 공감과 찬사를 받은 것 같다.
커튼콜이 끝나고 배우들이 다시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마리 퀴리 역을 맡은 김소향 배우는 터져 나온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150분의 시간을 마리와 함께 숨 쉬며 달려온 그 감정의 깊이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와 주변 관객들 모두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뮤지컬 <마리 퀴리>는 과학자의 고뇌와 인간적인 약함, 그리고 그 속에서 찾아낸 작은 희망까지, 한 사람의 삶을 온전히 느끼게 해준 공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