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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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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 읽지 못한 시집과 쓰지 못한 시가 자꾸만 나를 기웃거린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가 이토록 다양하고 근사하게, 곳곳에서 명멸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종종 잊는다. 야릇한 기분에 휩싸인 나는 몇 번이고 읽어보았던 시집들만 꺼내 읽는다. 읽는다기보다는 응망한다. 내가 상상하는 시인의 눈을 바라보며, 혹 그와 시선을 맞추며 생각을 공유할 자신이 없어서인지 내게는 그로부터 뒷걸음질 치는 일이 퍽 낯설지 않다.

 

 어느 날에는 반드시 서윤후의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을 꺼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것은 일종의 예감처럼 다가온다.


 

우리의 대화에서 어항 냄새가 난다 낱말은 꼬리를 흔들며 기억을 단련한다 비늘처럼 미끄러운 고백의 형식은 물을 비리고 흐릿하게 만든다 굴절된 얼굴을 바라보다 마음을 왜곡하며 싸우면서 대화로 풀자고 말하는 네게서 사육장 냄새가 난다 식탁을 책상처럼 쓰는 나와 책상을 식탁처럼 쓰는 네가 하나의 의자에 번갈아 앉는다 대화의 형식이 성립한다 쿠폰이 필요한 외식처럼 값비싼 식당에서 인테리어 흉을 보며 실내와 비슷해진다고 생각한다 우아한 샹들리에가 흔들린다 뒤섞이며 나는 냄새엔 이름을 붙일 수 없다 우리는 꼭 징그러운 물고기 같아서 숨 쉬는 동안에도 냄새를 키운다 버릴 수 없는 물속 사전이 두꺼워진다 망설임은 기포로 떠오른다 숨 쉬기 위해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어항 속에 우리가 있다 헐떡이고 있는 서로를 바라보는

 

- <코발트블루> 전문

 

 

대화의 형식이 성립하는 조건은 무엇일까. 왜곡된 마음으로 대화를 기대하지 말아야 할까. 꼬리를 흔드는 낱말을 쉬지 않고 내뱉는 와중에도 숨을 쉴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어야 할까. 보다 맑은 물속에서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행여 물을 비리고 흐릿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며 고백의 형식까지 성립시켜야 한다. 대화와 고백의 형식이 겹치는 순간, 그때에도 여전히 우리는 숨을 헐떡이고 있겠지만, 적어도 대화에서 어항 냄새만큼은 지울 수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서로가 뒤섞임으로써 대화를 힘겹게 추동한다. 그 무엇으로도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냄새를 풍기며.

 

그리고 나는 시와 대화를 나눈다. 시를 읽을 때, 낱말의 저변에서 시인과 나의 기억을 추출하고 배합하여 일정한 분위기를 읽어낼 때, 시는 나로 하여금 어항 냄새를 감지하게끔 만든다. 또는 나의 시선으로 시를 해석할 때, 미묘하게 굴절되고 왜곡되며 흔들리는 시에게 한편으로는 죄악감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내밀한 즐거움과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를 가학적 충동을 어디까지 감춰야 하는 것일지 의문이 생긴다. 그러한 의문을 끝내 해소하지 못한 채 간직하기 위해서 시를 읽는 것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내가 시를 읽지 않고 멀어져 있을 때 나는 시와 어긋나지 않는다. 책상을 식탁처럼 쓰는 것이 온전히 시를 느끼는 길이라고 누군가 내게 강변하는 것 같다가도 식탁을 책상처럼 쓰는 나는 내내 그러한 길에서 이탈하여 시를 배반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맨 처음으로 수치심을 길렀다. 잠든 나를 깨워 계집애 같은 사내아이를 어쩐지 실수라고 여기면 나는 나의 목격자가 되었다. 증언이 필요한 꿈결과 이름에 써 버린 행운과 주입된 슬픔으로 살아갈 온 마음은 시험판이었다. 치명적인 오류지만 결코 멈춰 버리진 않는 그 방 안에 나는 설계된 적 없는 자세로 처음 나를 감지한다. 엎드려 있으나 잠이 비켜가고 슬픔으로 젖지 않는 주소로 나는 배달되었다. 나는 멸종 위기가 아니다.

 

- <소년성(少年性)> 부분

 

 

계집애 같은 사내아이를 실수라고 여기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다만 소년은 목격자가 되었고, 증언이 필요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곳은 소년을 그렇게 부른 사람에 대한 재판이 열리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소년을 시험에 들게 하는 장소이다. 그것이 바로 치명적인 오류로 밝혀지게 되고 소년은 이제 멈출 수가 없다. 엎드려 있으나 잠이 비켜가고 슬픔을 젖지 않는 주소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증언이 필요할까. 그곳에서도 수치심으로 가득해진 사람들의 눈동자에서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소년성이 발견될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분명 그럴 것이라고 소년이 믿고자 한다면 누구도 방해할 수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멸종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 나를 멸종 위기로 취급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들에게 나의 소년성을 들키고 싶지 않다. 나는 되도록 오랜 시간 증언이 필요치 않은 목격자가 되고 싶다.

 

 

옛날 사람들이 들려주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 버려지고도 다시 주워 깁는 그런 이야기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귀신이 되어 소문이 되어 떠돌던 예컨대 (...)

 

끝말잇기가 끝나지 않고, 태어나 죽을 때까지 불러도 부를 수 없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옛날 사람에겐, 편지를 부치지 못했다 크고 넉넉한 봉투가 없어서

 

온실 속엔 향기가 없는 꽃이 피었다 아무도 꽃을 꺾지 않는 정원엔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도 괜찮았다 바라봐 줄 사람만 있다면 살아야 하는 것이 씨앗인 오늘

 

손목시계에 밥을 주고, 열대어를 가만히 바라보던 사람 나눴던 대화를 종종 잊으면서도 곧잘 들어 주던 사람 옛날 사람들이 들려주길 우리는 사랑에 어설펐던 귀신이라고

 

- <예컨대, 우리 사랑> 부분

 

 

끝나지 않는 끝말잇기도, 태어나 죽을 때까지 불러도 부를 수 없는 이름도, 종이에 한없이 적어 내려갈 수 있는 마음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당신에게 전할 수 있는, 전하고 싶은 말은 도무지 끝을 모르는데 내게는 크고 넉넉한 봉투가 없는 것이 유일한 오점이다. 누구도 준비할 수 없는 것을 준비하지 못해 마음과 전신이, 과거와 미래가 저려 온다. 향기가 없는 꽃처럼 마비 상태에 빠져 당신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어도 당신이 나를 바라봐 줄 수만 있다면 옛날 사람들은 그것을 기꺼이 사랑이라 불렀을 테지만, 오늘 난 무엇도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 당신을 기억 속에서 골라 낸다. 나도, 당신도 우리의 대화를 조금씩 잃어간다.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당신은 우리가 사랑에 어설펐다고 생각할까. 어떻게 하면 끝나지 않는 대화를 이어갈 사랑이 우리에게 허락됐을까.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에게 사랑을 허락한 적이 없었다.

 

옛날 사람들처럼 사랑을 나누고 싶다. 아무런 이유도 없는, 그 어떤 이유도 필요치 않은 나의 짐작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말하지 않고도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그들의 형상을 그려낸다. 내가 죽기 전까지 볼 수 없는 것이기에 그들을 사랑의 형상이라고 부르더라도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렴풋이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사랑에 근접한 무엇이 된다. 구태여 사랑을 보고자 하는 날에는 더는 사랑에 대해 형용할 수 없는 벌을 받게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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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에 버려진 것 중엔 내가 가장 쓸모 있었다

버려진 사람들이 잃은 것을 대신해 다시

버려진 사람을 줍는 세계에서

우리의 수도는 어느 쪽이었을까

한 뼘의 파라솔이 그늘을 짓고 우리는

통째로 두고 간 유실물로 남겨져

하나의 관광지를 이룬다

 

파도의 디저트가 되네 하나밖에 모르는 맛으로 사탕처럼 둥글게 앉아 녹아 가는 연인들

철썩이는 파도가 핥아 가네

발가락부터 녹으며 조금씩 둘레를 잃어 가는 사랑이여

사랑한다는 말을 남발하던 연인들이 전투적으로 질투하고 비로소 세계는 달콤해지고 온화해지네

 

(...)

 

내가 먹어 본 사탕 중엔 네가 제일 별로였어

 

너처럼이라는 직유가 가진

설탕과 소금 사이의 결정체

 

네 말에 끈적끈적해진 나는

입안의 상처들을 혀로 만지작거리며 피가 달다고 생각했다 달콤함을 모르고 조금씩 사라져 간다

 

- <사탕과 해변의 맛> 부분

 

 

너라는 사탕을 먹어봤으니 이제 또 다른 너의 피를 마신다. 그 모든 사탕 중 네가 제일 별로였다고 털어놓는 고백의 우아함. 맛이 점차 희미해진다. 둥글게 앉아 녹아 가는 연인은 우리 뿐만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어떤 맛을 느끼고 싶었는지 서로에게 묻지 않았던 것이 못내 아쉽다. 우리가 주고 받았던 질문과 답은 모두 음식을 이루는 재료들에 관한 것이었다. 총합으로서의 맛이 아니라.

 

인적이 끊긴 해변에는 온통 버려진 것들 뿐이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버려졌다. 다 찢어진 파라솔을 펼쳐 일광을 닮아있는 그늘을 짓는다. 주저앉는다. 사랑한다는 말을 남발하고 싶지 않아서 시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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