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 아, 아. 비명인지 한탄인지 모를 소리가 울린다. 으슥하게 깔린 안개로 둘러쌓인 깜깜한 무대 위에서 배우들은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이들은 본격적인 연극의 시작 전, 30분여의 시간동안 귀를 쫑긋거리는 토끼가 되기도, 혀를 날름이는 개구리가 되기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 되기도 한다. 관객이 천천히 이 '삼매경'이자 오래된 '동승'의 쓸쓸한 세계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중앙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자는 1993년 초연을 한 연극 '동승'의 주인공, 어린 동자승 '도념'.
34년이 지난 뒤에도 배우 '춘성'은 본인이 만들어낸 도념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상업적 성공과 세간의 호평과는 별개로 그가 아직 완벽한 도념에 도달하지 못한 채 연극이 끝나버렸기에. 춘성에게 연극은 도달하지 못한 열반이요, 삼도천을 다시 헤엄쳐 나와서라도 끝맺음을 맺고 싶은 미련이다. 연극 '삼매경'은 이같은 연극적 광기를 불교적 사유와 교차시키며 마침내 삼매경을 향해 치달아간다.
![[국립극단] 삼매경(2025) 포스터.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7/20250728000053_partusuk.jpg)
후회는 덫이야
춘성은 도념과 마주본다. 아주 여러번 해온 일이라는듯, 익숙하게. 그는 항상 과거를 반추하며 되돌릴 수 없는 그 떄의 연기를 후회하다가 '난 한 번도 네가 되어보지 못했다'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그 인정은 결코 닿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수용이라기보다는 그렇게 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실망에 가깝다. 춘성은 그 자기비난 속에서 '동승'과 이상적인 어린 도념에 몰입한다. 그리고 어린 도념이 자신을 찔렀을 때, 그는 삼도천에서 되돌아와 34년 전의 연습실로 돌아간다.
![[국립극단] 삼매경(2025) 공연사진01.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7/20250728000111_padffogs.jpg)
춘성은 일생 내내 연극에 몰입했다.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도념의 슬픔을 공감하고 어린 도념이 그의 눈 앞에 실체화된 그 순간부터. 도념과 춘성은 거울처럼 서로를 마주본다. 춘성이 도념의, 도념이 춘성의 생각을 읽는다. 그럼에도, 연기의 실패가 계속해서 쓸쓸한 공기에 남는다. 배우는 이미 무대 밖에서도 연극과 현실이 혼재된 삶을 살고 있다. 삼도천에 뛰어들며 가시화된 것은 어쩌면 그의 오랜 욕망이 드디어 발현될 것일지도. 결국 춘성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큰 주마등에서라도 춘성은 도념이 되어보려고 한다.
이것은 특히나 배우라는 직업이 가지는 고뇌다. 배우는 엄격해야 하는 존재. 도념은 '너무 엄격해.'라고 말하지만 지춘성 배우는 '그게 배우가 해야 하는 일 아닌가'라고 응답한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대본집에서 읽게 되고, 그 존재를 표현해야 하는 배우라는 직업은 이상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그 차이를 계속해서 인식하게 되는 일이다. 그가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했던 어린 동승과 결코 같아질 수 없음을 깨닫고는 좌절을 넘은 살의를 품게 되었던 것처럼. 그렇게 도망치다가 도달한 곳이 바로 '허공'. 이 곳으로의 회피는 삼도천에서의 해탈과는 다른데, 배우는 이곳에서의 기분을 '해방'된 기분이라고 표현한다. 도념이 되려고 애썼던 시간들, 도념이 되고 싶었던 그 절대적인 목표와 의지. 그럼에도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수치심. 이 감정들로부터 숨을 수 있는 절대적 무의 공간이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무언지 아니? 귀신도 호랑이도 아니고 바로 과거니라. 과거는 후회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야.
후회는 덫이야. 네 발목을 채어 내일로 못 나가게 하지. 그러니 다 흘려 보내야 한다.
네가 그토록 자신까지 해하며 얻고자 하는 게 허구 속 캐릭터라는게 슬프구나. 세월은 유수같이 흐르는데 무엇 때문에 그것에 그리도 집착을 하느냐. 그것이 암만 기억일 진정, 너 자신을 죽이는 것도 살생이니라.
- 삼매경, 주지 스님 대사 중
하지만 이 곳에서 춘성은 결국 어린 도념을 살해한다. '너무나 사랑해서 모든 것을 보여주려' 데려왔지만 결국 벗어나지 못한 미련들로 자신이 진짜 도념이 되고자 한다. 그리고 다시 새로 나타난 도념2. 이번에는 도념이 놓는 토끼덫 옆으로 사람을 잡는 덫을 놓는다. 후회라는 덫을.
번뇌, 삼독, 그리고 삼매
처음은 어린 도념이 춘성을, 아니 도념을 죽인다. (대본집에는 춘성이 도념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 이후부터는 도념이 어린 도념을 죽인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를 죽이는 것은 후회로 가득찬 춘성의 현재를, 현재가 과거의 기억을 죽이는 것은 여기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죽고 죽이는 살생의 과정은 자아를 분열시키기만 할 뿐이다. 배우가 죽인 제 1, 제 2, 제 3의 도념은 그가 끝내 닿을 수 없었던 이상적인 도념이었으나 그가 직접 만들어 낸 상상 속 존재일 뿐이니. 허상이라기보다는 지춘성 배우 본인의 분신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욕망, 집념, 발 뒤꿈치를 무는 뱀. 그런 것들의 총집합이다.
![[국립극단] 삼매경(2025) 공연사진20.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7/20250728000212_izedwcle.jpg)
지춘성 배우가 가운데, 그리고 그가 죽인 5명의 도념이 그를 둘러싸고 얼굴만 동동 떠서 보이는 위의 장면은 이 극 중 가장 공포스러운 장면이다. 같은 자세로 정면을 응시하는 6개의 얼굴. 결국 '내 뒤꿈치를 물고 평생을 따라다녔던 뱀'은, 앞에서 완벽한 연기를 조롱하듯 보였던 어린 도념은, 바로 그 자신의 사마귀처럼 돋아나는 번뇌다. 춘성은 스스로의 번뇌를 죽이고자 했으나 번뇌는 그렇게 쉽사리 제거할 수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불교에서 번뇌는 삼독에서 비롯된다. '탐욕', '진에', '우치'. 각각 욕심과 분노, 그리고 어리석음을 의미하며 이 중 뱀은 삼독 중 진에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완벽한 연기를 하고자 하는 욕심은 탐욕, 자신의 이 고통이 어디서 기원하는 줄도 모르고 어린 도념을 죽이는 어리석음은 우치. 완벽히 도념을 구현해내지 못했던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이상적인 어린 도념에 대한 질투가 바로 진에, 뱀이다. 따라서 이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연기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분노를 정화하고 무엇이 이 번뇌를 불어일으키는지에 대해 인식하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춘성이 도념이, 뱀이 자기 자신이었음을 인식하는 부분은 해탈의 시작이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장면이자 이 극의 제목이기도 한 '삼매경'. 1인 3역의 그 극단적 몰입 속에서 배우는 비로소 그가 그토록 원하던 무대의 끝을 본 것만 같다. "번뇌 즉 보리". 배우가 지나왔던 그 무수한 번뇌의 시간을 통해 그는 마침내 보리, 깨달음에 다다른 것일까.
무아에 빠지다
“‘나는 반드시 일체중생을 멸도하리라. 일체중생을 멸도시켰지만 실제로는 어떤 중생도 멸도를 얻은 자가 없다.’ 수보리여, 왜냐하면 만약 보살에게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 금강경 제 17 구경무아분
'금강경'은 말한다. 보살은 제도를 하지만, 실은 어떠한 중생도 제도되지 않았다고. 보살에게는 자아가 있다는 관념, 개아가 있다는 관념, 중생이 있다는 관념, 영혼이 있다는 관념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우는 본래 허구를 재현하는 존재. 춘성은 도념을 완벽하게 연기하는 자신에게 몰입한다. 자신이 도념이라는 '아상'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연출은 자기 자신을 버리라고 어린 배우에게 말한다. 그것이 배우라고. 자신은 바깥에 던져두는 것. 처음부터 삼매경에 도달하는 단서가 거기에 있었다. '무아'의 지경. 자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어느 고정된 자아라던가 도념에 대한 광기어린 집착을 버리고 순수히 몰두하는 것이다.
"삶은 유수와 같다"라는 말은 등장인물 여러명의 입을 빌어 반복된다. "사는 건 연꽃이 피고 지는 것과 같아. 그저 한여름 청정함을 과시하다 기약 없이 지고 말지." 고정된 것은, 고정된 상이라는 것은 없다. 완벽한 연기도, 심지어는 나 자신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무상과 무아의 경지다. 그렇기에 인생은 괴롭다. 변하는 것에 집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고정된 것이 없음을 '나'라는 에고가 없음을 인식할 때 우리는 해탈에 마침내 도달한다기보다는 잡고 있던 것을 놓고 그곳으로 안착한다.
그리고서야 도념은 마침내 삼매경에 빠져 주지스님도 되었다가 미망인도 되었다가 어린 도념도 된다. '도념과 같아져야 한다'라는 생각마저 버리고 무아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 배우는 그토록 원하던 끝에 도달한다. 그러니 연극이야말로 무상의 장이자, 무아의 수행처가 아닌가.
![[국립극단] 삼매경(2025) 홍보사진09.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7/20250728000138_owoykhiq.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