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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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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리오 꼬르따사르의 <드러누운 밤>에 수록된 단편 소설 <파리의 아가씨에게 보내는 편지>는 낯설지만 묘하게 친숙한 이야기다. ‘토끼를 토한다’는 기묘한 설정은, 처음엔 단지 기괴하고 환상적인 요소로 다가오지만, 소설이 이어질수록 그 낯섦 속에 어떤 깊은 진실이 숨어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소설은 파리로 간 한 아가씨의 집에 임시로 머물게 된 한 남자의 시점으로 펼쳐진다. 그가 전하는 일상은 지극히 평범하다. 이사를 하면서 피곤에 절어 안개 속을 걷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밤마다 집에 틀어박혀 지내는 나날들, 친구들의 만남 제안조차 적당한 핑계를 대고 거절하며 고립을 선택하는 모습들. 그 어떤 장면도 특별하지 않다. 오히려 우리 모두가 겪을 수 있는 지친 일상의 일부다.


하지만 이 남자는 토끼를 토한다. 그것도 살아 있는 토끼를, 고통스럽게. 하지만 그는 이 일이 오래전부터 자신에게 벌어졌던 일이며, 단지 요즘 들어 빈도가 많아졌을 뿐이라 말한다. 이를테면, 꽃가루 알레르기를 가지고 있던 우리가 이번 봄에 그 알레르기가 더욱 심하게 나타나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그것을 두려워하고 괴로워하지만, 동시에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소설은 이처럼 비환상적 현실과 환상적 사건이 충돌하지 않고 자연스레 공존하는 세계를 그린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도, 작품 안에서는 차분히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여진다. 거기엔 고통은 있지만, 혼란은 없다. 마치 누군가의 삶에선 정말로 매일 ‘토끼를 토해내는’ 일이 벌어질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소설에서 비환상적 요소와 환상적 요소가 같이 표현될 때, 보통은 이 둘의 충돌이나 갈등을 소설에 담아낸다. 단편 소설 <코>만 봐도 알 수 있다. 떨어진 코를 쫓는 비환상적 삶을 살아가는 주인과 그 주인에게서 달아나려는 환상적 요소인 코의 충돌을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러한 요소들이 동시에 표현되지만, 두 요소의 충돌이 일어나는 일은 찾아볼 수 없이 전반적으로 평온한 분위기로 소설이 전개된다. 그저 토끼를 토할 때, 시점 인물의 괴로움과 두려움만이 있을 뿐이다. 심지어 그 두려움은 토끼를 토하는 횟수가 많아졌다는 것과, 완벽을 추구하는 아가씨의 집을 토끼들이 망쳐가고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 집의 원래 주인인 아가씨는 심한 완벽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녀의 집은 섬세한 그물망을 구축하여 빈틈이 없는 세계로 들어간다는 느낌을 주고, 시점 인물은 그런 그녀의 완벽주의를 두려워하며 결국 자신의 비밀, 토끼를 토하는 일을 고백하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작가는 왜 하필 토끼였을까? 많은 독자들이 그 의미를 해석하려 애쓰지만, 어쩌면 작가는 의도적으로 토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아무 설명 없이 환상적인 사건을 일상에 배치함으로써, 독자가 자신의 경험 안에서 그것을 해석하도록 유도한 건 아닐까. 작품에서 시점 인물은 토끼를 토하는 일에 대해 두려움과 괴로움을 느끼고, 끝내 그 토끼들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는 토끼를 죽이지 못한다. 그동안 토해온 토끼에 대한 애틋함과 토끼를 죽여야 한다는 참담함 때문이다. 즉, 그에게서 토끼라는 존재는 포기하고 싶으면서도, 결국 절대 그럴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나 역시 내 일상 속 ‘토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에게 토끼를 토하는 일이란, ‘글을 쓰는 일’이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것. 어느 순간부터 글은 내 일상에 스며들었고, 나는 그 글을 계속해서 토해내고 있었다. 그건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반복돼 온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는 이 고통조차 익숙해졌고,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쓰는 일은 특별한 일이라기보다 그냥 평범한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 글은 늘 나를 괴롭힌다. 글이 써지지 않는 날이면 무력감에 빠지고, 부모님의 걱정 섞인 말에 흔들리고, 쓰면 쓸수록 “정말 이걸 계속해야 할까?”라는 의문이 따라온다. 그래서 때로는 그 글을 미워하고, 죽여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이 모든 것을 멈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글은 내 세계를 어지럽히고 부수기도 한다. 그럼에도 나는 글을 놓을 수 없다. 시점 인물이 끝내 토끼를 죽이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글을 쓰는 것이 아무리 두렵고 부담스러워도, 글은 이미 내 안에서 자라버린 생명 같은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마다 결국 내가 붙들게 되는 건, 언제나 그 글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남자처럼 조심스럽게 나의 토끼를 고백하고 있는 중이다. 그 누구에게도 쉽게 말할 수 없던, 그러나 나를 잠식해온 존재에 대해서.


그렇기에 이 소설은 단순한 환상 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삶 속에서 감추고 살아가는 무언가, 혹은 토해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감정, 고백하지 않으면 무너질 것 같은 비밀에 대한 이야기다. 그 비밀이 무엇이든, 누구에게나 자신의 ‘토끼’는 있다.


그러니 묻고 싶다.

당신은 오늘, 어떤 토끼를 토해냈나?

그리고 그걸 누군가에게 고백한 적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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