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는 액자 서사 구조를 취하고 있다. 액자 서사에서는 ‘이 사람이 하는 말을 어디까지 곧이곧대로 믿어야 할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읽게 된다. 소설에서는 닉이라는 화자의 발화를 통해서-영화에서는 글을 씀으로써-믿음을 준다. 개츠비의 모든 이야기를 들은, 개츠비와 관련된 모든 인물을 만난 사람으로서 이야기를 듣는 독자에게 신뢰는 준다는 것이다.
개츠비의 목소리로 그의 과거를 들은 인물이 개츠비를 옹호하고 믿는다면, 독자는 그 인물의 말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물론 닉이 없는 상황에서 발생한 이야기를 말하는 것은 소문으로 들었거나 닉 역시 누군가에 들은 이야기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소설의 194쪽에서 화자가 없었을 때의 상황인 마이케일러스-톰의 정부인 머틀의 뺑소니 사고에서 중요한 증인-가 윌슨과 둘이서 대화하는 순간이 있다. 이때 두 사람의 대화를 화자는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통해서 독자는 오히려 화자에 대한 신뢰도를 낮출 수도 있다. 그렇기에 개인적으로 작가가 하나의 장치를 추가했다고 생각한다. 바로 소설 78쪽에서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정직한 사람들 중 하나이다.”라는 문장을 통해서이다.
작가 피츠제럴드의 거울이라고 할 수 있는 닉에게 신뢰를 주고자 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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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액자 소설에서는 화자인 ‘나’가 들은 이야기를 다시 전달하는 구조를 가진다. 이러한 전달의 과정에서 앞에 전달됨의 과정이 생략되는 경우도 있다. 즉, 바깥 이야기인 외화와 속 이야기인 내화의 관계가 얼마나 붙어있는지에 따라서 생동감이 달라진다.
서사 구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①누가, ②무엇을, ③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가에 있다.
『위대한 개츠비』는 ①닉 캐러웨이라는 ‘나’가 화자로 등장하여 ②이웃집에 사는 개츠비가 가진 사랑과 꿈 이야기를 3인칭 관찰자 시점과 1인칭 주인공 시점을 번갈아 가며 전달한다. 액자 속의 화자와 액자 밖의 화자, 즉 외화와 내와의 화자가 동일하다.
개인적으로 소설에서보다 영화에서 더 시각적으로 액자 구조를 표현한 지점이 있다고 보았다. 이때 영화는 여러 버전의 개츠비 영화 중 2013년도에 개봉한 바즈 루어만 감독의 작품을 말한다.
닉의 반복되는 대사와 카메라 기법이었다. 닉은 “난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바깥에 있었다.”라고 톰과 여자들과 함께 놀 때 창문 밖으로 뉴욕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한 번 말하고 개츠비의 부탁으로 데이지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둘이 이야기할 수 있게 자리를 피했을 때 나무 밑에서 두 번 말한다. 외화와 내화의 화자가 동일할 때 한 인물이 안과 밖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는 표현을 통해서 액자 구조를 보여준다.
다음으로 영화는 22분쯤에 뉴욕이라는 도시의 모습을 근경에서 원경으로 줌인, 아웃하는 장면을 사용한다. 이는 소설의 액자 서사를 시각화하는 좋은 영화적 장치가 된다고 생각한다. 액자 안에 있는 닉의 모습과 이를 회상하는 액자 밖에 있는 닉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더 나아가 독자는 1920년대 미국의 모습을 21세기 우리의 모습으로 변형시켜서 생각해 봐야 한다. 1920년대 미국은 과잉의 시대이자 광란의 시대이다. 아메리칸 드림, 미국의 꿈을 소설화한다면 가장 온전하게 옮겨놓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열심히 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 는 막연한 희망을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것이다.
막연한 희망으로 인해서 발생한 문제점도 있다. 지나친 자본주의 추구와 빈부격차이다. 이는 소설 속에서 “미국인들이란 어쩌다 아예 농노가 되고 싶어하는 경우는 있어도 절대로 소작농은 되고 싶어하지 않는 법이다.”(112쪽)라는 문장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농노는 되지만, 소작농은 싫은 아메리칸 드림이 휩쓸고 간 미국의 정서가 직접적으로 화자에 의해서 드러난다.
그리고 ‘나’에 의해서 발화되는 개츠비는 희망찬 사람이자 무척 예민한 사람이다. 희망차고 예민한 사람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길, 자신이 그곳에 속하길 바랐다. 그래서 제임스 개츠라는 이름을 버리고 금주령이 내려진 시대에 불법적인 일을 하면서까지 부를 축적하고자 했다. 물론 이면에는 사랑을 쟁취하기 위함이었지만 말이다.
결국 개츠비는 명문가 자제이자 옥스퍼드를 졸업한 학생이며 동시에 전쟁 영웅이라는 위대한 인물을 만들어냈다. 이 과정에서 개츠비는 ‘과거는 바꿀 수 있다’라는 전제에 긍정한다. 과거를 돌이킬 수 없다는 화자의 말에 개츠비는 바꾸는 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개츠비가 바꾸고자 한 과거는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크게 가난했던 자신의 과거와 데이지의 과거일 것이다. 전자에서는 아메리칸 드림의 대전제가 되는 가난하든, 아니든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한다. 후자에서는 데이지가 톰을 사랑했던 과거를 지우면서 스스로가 생각한 완벽한 미래 계획을 실현하는 것이다.
두 가지 방향 모두 제임스 개츠가 아닌 위대한 개츠비일 때 실현이 가능하다. 하지만 독자는 개츠비의 계획이 성공했다, 실현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개츠비는 죽었고 데이지는 떠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개츠비 역시 맹목적인 신념처럼 매달리게 되는 잘못된 아메리칸 드림의 단면을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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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배경은 1922년 뉴욕으로 개츠비의 저택에서 끊임없이 거대한 파티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영화에서는 닉의 대사(‘기록적으로 폭등하는 주가. 월스트리트의 연이은 호황. 파티는 점점 더 화려해지고 쇼는 점점 더 대담. 빌딩들은 높아지고 도덕은 무너졌다. 금주령은 역효과’)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
이 모든 게 각 인물에게 적용되어 나타난다. 특히, 데이지라는 인물을 통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 그녀는 개츠비가 사랑하는 대상이자 톰의 아내이며 상류층 여성이다. 또한, 자본주의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닉과 개츠비는 그녀를 비유하며 직접적으로 “돈으로 충만한 목소리야”(151쪽)라고 말한다. 태어날 때부터 상류층이었던 그녀의 두 손을 뻗었을 때 닿는 것은 사랑, 돈, 혹은 재고할 필요가 없는 현실 같은 것들이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하얀 궁전에 사는 공주였고 그렇기에 소설의 결말에서 개츠비만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톰 역시 상류층 사람으로 인종차별적인 모습을 보이며 돈과 이기심 속에서 단단하게 숨었다.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누구나’에 인종의 차등을 두는 모습이 드러난다. 소설에서는 톰이 읽는 책인 『유색 인종 제국의 발흥』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또한, 이 시기는 미국 역사상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이다. 이 당시는 전쟁의 끔찍한 참상과 이유 없는 죽음이 삶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깊은 허무감과 회의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또한, 사람들의 가치관이 쾌락을 추구하며 삶에 환멸을 느끼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급격한 경제 성장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었지만, 개츠비와 같이 도덕적 해이와 부패가 이면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은 시대적 특징을 잘 담아내고 있다. 즉, 시간적 배경에 독자는 주목하게 된다. 이 소설이 시대가 바뀜에도 끊임없이 각 시대상에 적용하여 바라보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다.
시간적 배경을 보았다면 공간적 배경도 살펴봐야 한다. 『위대한 개츠비』에서는 공간의 다름이 중요한 이야기 주제가 된다. 이스트에그(서부)와 웨스트에그(동부), 그리고 잿더미 계곡이 이에 해당한다. 이스트에그는 톰과 데이지가 거주하는 공간으로 과거부터 상류층이었고 많은 부를 유산으로 받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반대로 개츠비와 닉이 거주하는 웨스트에그는 재즈 시대에 부를 축적한 신흥 부자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그렇기에 두 지역은 지리적 차이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차이 또한 갖고 있다. 그리고 빈곤한 계층이 모여 사는 잿더미 계곡은 사회 최하위 계층 사람들이 무기력하고 고달픈 삶을 살고 있는 장소로 나타난다.
서부와 동부의 다름도 중요하지만, 잿더미 계곡에 대해서 더욱 집중해서 살펴봐야 한다. 이곳은 아메리칸 드림의 문제점이자 모순을 담아놓은 장소다. 산업화로 인한 극심한 빈부격차를 가져왔고 그 결과 일부의 상류층만 희망을 가지게 됐다.
즉, 개츠비가 찬탄할 수 있는 녹색 불빛조차 없이 거대한 닥터 에클버그의 눈만을 본다. 얼굴 없는 두 눈은 마치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속 빅 브라더를 떠올리게 한다.
사회가 가지는 신념이 올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갈 때 우리는 닥터 에클버그의 눈과 빅 브라더의 눈을 떠올릴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설과 영화가 가진 유사점 중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결말이리라고 생각한다. 화자는 거의 동일한 대사를 동일한 장소에서 말한다.
“개츠비는 오직 저 초록색 불빛만을 믿었다. 해가 갈수록 멀어지기만 하는 가슴 설레는 미래를, 그것은 이제 우리 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무슨 문제인가. 내일 우리는 더 빨리 달리고 더 멀리 팔을 뻗을 것이다…. 그러면 마침내 어느 찬란한 아침…. 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쉴새없이 과거 속으로 밀려나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224-5쪽)
“개츠비는 녹색 불빛을 믿었다. 썰물처럼 멀어져갔던 완벽한 미래를 그땐 놓쳤지만 이젠 상관없다. 내일, 우린 더 빨리 달릴 것이다. 팔을 더 멀리 뻗을 것이다. 그러다보면 어느 찬란한 아침. 우린 세찬 물결에 끊임없이 과거로 밀려나면서도 결국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영화 속 닉의 대사)
개츠비가 바라본 녹색 불빛은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처럼 작용한다. 그 불빛-데이지와의 만남-을 손을 뻗어 잡고 나면 우리를 매혹했던 물체는 사라지고 만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 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은 변화하게 마련이다. 과거는 변화한다. 하지만 변화하기에 이전의 것을 없애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늘이 지나면 찬란한 아침이 찾아오고 내일을 살아내는 것처럼 과거로 밀려남과 앞으로 나아감은 동시에 진행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