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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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화창함과 무더위, 습기를 머금은 여름이 찾아왔다. 여름만큼 호불호가 강한 계절이 또 있을까. 여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입 모아 말하는 장점은 낭만성에 있다. 초록색으로 빛나는 잎사귀, 다가올 바캉스로 부푼 마음, 차가운 바다에 담근 발, 밤하늘을 수놓은 불꽃놀이 등 여름이 품고 있는 낭만은 아무리 불쾌지수가 높을지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요소로 꼽히곤 한다.

 

튀르키예의 여성 인권을 다룬 <무스탕: 랄리의 여름>(2015)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여름을 전면적으로 드러낸 영화이다. 포스터와 스틸컷, 예고편에 담긴 여름의 색감은 아름다운 서사를 기대하도록 한다. 그러나 작품 속 여름은 그다지 낭만적인 계절로 묘사되지 않는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된 인물인 다섯 자매의 표정은 러닝타임이 길어질수록 생기를 잃어가며 여름의 온도와 낭만은 점점 느껴지지 않게 된다. 왜 그녀들의 여름은 이토록 싸늘한 것일까. 그녀들은 여름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영화의 골조를 이루는 상반되는 키워드를 통해 그녀들이 감내해야 했던 잔인한 여름으로 들어가 보자.

 

 


집 안과 밖: 폐쇄와 자유


 

부모를 여의고 시골 친척 집에서 살아가는 다섯 자매―소냐(일라이다 아크도간 분), 셀마(툭바 선구로글루 분), 에체(에릿 이스캔 분), 누르(도가 제이넵 도구슬루 분), 랄리(구네스 센소이 분)―는 나이와 성격이 전부 제각각이지만 돈독한 우애를 유지한다. 어느 날, 평범한 일상을 지내던 자매들은 하교 후 바닷가에서 남자아이들과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는 이유로 갑작스런 외출 금지를 당한다. 억울한 자매들은 그저 게임이었다고 해명하지만 돌아오는 건 매질과 욕설, 그리고 병원에서 행해지는 ‘순결 검사’이다. 심지어 화장품, 휴대전화, 컴퓨터, 옷, 스타킹 등 집안 어른들의 입장에서 ‘탈선’으로 여겨지는 사적인 물건까지 전부 압수된다. 이는 보수적인 이슬람 문화에서 자매들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없는, 경계 위반적인 일탈로 해석하고 단죄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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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매들에게 허용된 생활 반경은 좁디좁은 집 안이 전부다. 또래 친구들이 학교에 가서 활발히 공부하고 뛰어놀 때, 자매들은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대부분의 시간을 요리와 바느질, 청소로 채울 뿐이다. 걸음걸이와 의상까지 통제의 대상이 되고, 집 밖을 나가는 건 꿈도 꿀 수 없다. 그녀들의 외출이 허용될 때는 남자인 삼촌이 동행할 때, 또는 야외에서 유쾌한 술자리를 벌이는 남자들에게 필요한 음식을 가져다줄 때뿐이다. 그녀들에게 바깥세상이란, 처벌을 단단히 각오해야지만 그 공기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히잡을 쓰지 않고도 마음껏 집 밖으로 나설 수 있고 이성과 바다에서 놀아도 혼나지 않는, 자유가 몸에 새겨진 남자들과 자매들의 처지는 사뭇 대조된다.

 

‘떠나고 싶다’, ‘여기만 아니면 돼’ 같은 말만 반복하며 답답함과 따분함을 느끼던 자매들은 나름대로 저항을 해 보기도 한다. 첫째 소냐는 몰래 벽을 타고 내려가 남자 친구를 만나고 동생들은 이를 비밀에 부친다. 강제적으로 입혀진 ‘똥색 누더기’를 벗어던진 언니들은 비키니를 입은 채 창으로 새어 나오는 햇빛으로 선탠을 즐기고, 넷째 누르와 막내 랄리는 바닥에 이불을 펼치고 수영을 한다. 하지만 탈출을 바라는 마음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다. 좁은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공기를 마시는 건 목을 더 타게 한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녀들은 폐쇄적인 집을 벗어나지 못한다. 마치 랄리가 던지는 공이 사방을 둘러싼 담벼락을 맞고 다시 돌아오는 것처럼.

 

 


신부 수업과 축구: 수동과 능동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다섯 자매는 요리와 바느질을 할머니로부터 배운다. 물론 가사 일을 배우는 게 나쁠 건 없으나, 문제는 그 배움이 ‘조신한 신부’라는 틀에만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자매들의 미래 계획이나 꿈은 신부 수업에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되며 그 누구도 자매들의 개성을 존중하지 않는다. 가정에 헌신해야 하는 여성에게 학업이나 커리어는 하등 쓸모없기 때문이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수행해야 하는 사람의 얼굴이 밝을 리가 있을까. 들뜬 얼굴로 신부수업을 진행하는 할머니와 다르게 자매들의 얼굴에서는 소량의 즐거움이나 보람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마음이 동하는 일은 뒤를 생각하지 않고 내달리게 하는 성질이 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매들은 탈출을 감행하는데 바로 랄리가 그토록 좋아하는 축구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서다. 한 차례 삼촌에게 경기를 보러 가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가 거절당한 전력이 있지만, 반복되는 일상과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에 질려 버린 자매들은 후폭풍을 예견하면서도 결국 외출을 결심한다. 이번이 아니면 다음 기회는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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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숙한 집안과 다르게 축구 경기장은 시끌벅적하다. 그녀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너나 할 거 없이 마음껏 소리를 지르고 신나는 만큼 춤을 춘다. 능동의 공간에서 자매들은 얌전함이나 희생정신을 강요받는 여성이 아닌 그저 축구팀을 응원하는 관중으로서 존재한다. 압박이 사라진 공간에서 자매들은 비로소 마음의 능동성을 발산하는 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수많은 관중에 섞여 축구 경기를 즐기는 순간, 자매들은 그토록 바랐던 해방감을 맛본다.

 

활기를 띤 이들의 얼굴을 보면 마치 함께 경기장에 와 있는 듯 절로 가슴이 벅차지만, 동시에 주체성을 상실한 그간의 일상을 복기해 보면 씁쓸함이 감돌고, 곧 다가올 처벌이 얼마나 지독할지 짐작하며 마음을 졸이기도 한다. 결국 딱 한 번, 욕망이 이끄는 대로 행동했다는 이유로 집의 담장은 높아지고 철조망까지 세워진다. 이제 집은 더욱 삼엄한 감옥이 되고 자매들의 신세는 매초 감시를 받는 죄수로 전락한다.

 

 


결혼과 운전: 순응과 탈출


 

영화에서 결혼은 여성에게 가장 중요한 통과의례이자 삶의 종착지로 나타난다. 죽기 전에 손녀들을 전부 결혼시키는 것이 소원이라는 할머니는 차례대로 자매들의 혼담을 시작한다. 어린 나이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할 상황에 놓인 자매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저 “난 남편 얼굴도 모르고 결혼했어. 그래도 사랑하게 됐지. 너도 그럴 거야.”라고 합리화하며 결혼을 서두르는 데 집중한다.

 

첫째 소냐가 가족을 설득한 끝에 남자 친구와 결혼을 약속하자마자 집안 어른들은 둘째 셀마의 남편감까지 구해 합동결혼식을 올리도록 종용한다. 랄리의 표현에 따르면 “내친김에 둘을 해치”운 셈이다. 얼굴은 알지만, 애정은 없는 남자와 결혼하게 된 셀마는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식을 올린다. 중대한 결정에서 당사자의 의견 따위 중요하지 않음을 셀마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식 당일, 홀로 울고 있는 셀마를 향해 랄리는 결혼이 싫으면 이스탄불로 도망가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애당초 집안의 강요로 사회적 연결고리가 단절된 채 지내온 셀마에게 독립할 힘이 있을 리 없다. 반항을 포기한 셀마의 얼굴을 보며 랄리도 말하기를 멈춘다. 그 누가 함부로 셀마를 탓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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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들은 순응을 택했지만 막내 랄리에게는 여전히 저항할 힘이 남아있다. 그녀는 ‘세상은 원래 그런 거야’라는 식의 사고를 거부하고, 두 언니의 결혼을 시발점으로 삼아 이스탄불로 도망갈 계획을 세운다. 이때 탈출의 핵심은 운전이다. 빠르고 멀리, 누구도 잡지 못하도록 나아가는 방법. 운전을 해 본 적 없던 랄리는 축구 경기를 보러 갔을 때 도움을 받았던 트럭 기사 야신(부락 이깃 분)에게 몰래 도움을 청한다. 랄리의 절박함을 느낀 야신은 그날부터 시간을 쪼개어서 랄리에게 운전을 가르쳐준다. 처음 잡아 본 운전대는 흔들리고, 트럭은 마음처럼 매끈하게 나아가지 못하지만 탈출의 물꼬를 튼 랄리의 얼굴은 해맑은 미소로 가득하다.

 

랄리의 운전 실력이 늘어가면서 결혼 준비에는 속도가 붙고, 남겨진 자매들의 울적함은 극심해진다.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위태롭게 흔들리던 셋째 에체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 것이다. 이쯤 되면 에체가 죽음을 택한 이유에 결혼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하지만, 집안 어른들은 감정을 회복할 새도 없이 넷째 누르의 결혼마저 정해버린다. 한 인간의 목숨보다 전통을 따르려는 의지가 앞서는 현실에서 랄리의 차가운 분노는 더욱 고조된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탈출을 준비하던 랄리는 누르의 결혼식 당일, 집안 식구들이 새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문을 걸어 잠근다. 자신과 언니들을 억압하던 감옥 같은 집을 역으로 이용한 것이다. 랄리와 단둘이 남은 누르는 웨딩드레스를 벗어던지고 랄리와 동행하기로 한다. 이스탄불에서 지내는 학교 선생님의 집 주소, 그간 모아둔 돈과 차 열쇠를 챙긴 랄리는 삼촌의 차를 타고 마침내 탈출에 성공한다.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앞이 잘 보이지 않아도, 길이 울퉁불퉁해도, 운전 실력이 서툴러도 랄리는 계속 나아간다.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라 맹세한 사람처럼 질주한다.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할퀴었던 장소가 시야에서 완벽히 사라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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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무스탕: 랄리의 여름>은 현 시류와 멀리 떨어져 있는 영화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여성이 사유물 취급을 받거나 수동성만을 강요받는 건 옛날 일이며,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은 동등하게 일을 하고 자기 의사를 펼치지 않냐는 반박, 영화는 극단적인 예시이며 오히려 영화가 과거를 반복하는 데 그칠 뿐이라는 쓴소리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어떤 목소리는 여전히 갇혀 있어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과연 우리는 각자의 험난한 여름을 버티고 서 있는 수많은 랄리의 삶을 잘 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우리가 그들의 삶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들의 현재를 과거로 치환시키는 건 아닐까. 우리에게는 더 많은 목소리가 필요하다. 웃음과 울음과 분노가 섞인 목소리들이. 벽을 뚫고 나와, 다른 목소리와 공명하며 세상을 움직일 목소리들이.

 

영화의 제목인 ‘무스탕’은 가축이었다가 야생으로 돌아간 말을 뜻한다. 이는 전통적인 여성상을 강요받다가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된 랄리의 은유로 해석된다. 영화는 랄리와 누르가 이스탄불에 도착하며 막을 내리지만, 우리는 이들의 미래를 상상해 볼 수 있다. 마치 초원을 내달리는 야생마처럼 소신을 굽히지 않고 나아갈 소녀들의 미래를 말이다. 그 미래에서는 목소리를 잃지 않을 것이다.

 

어떤 계절도 고통으로 기억되지 않기를 바란다. 잔인한 여름을 버텨내고 힘껏 달려 나갈 이 땅의 랄리들에게 뜨거운 연대의 메시지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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