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독 진득한 여운이 남는 영화가 있다. 영화관을 나와 평범한 일상을 살다가도 문득, 자꾸만 생각나는 영화가. 알기 전과 후의 내 삶이 조금은 달라진 것만 같은 그런 이야기가 있다. 그 전까진 너무나도 당연했던게 새삼 낯설게 느껴지고, 내 안에 걸린 무언가를 자꾸만 되새김질하게 된다. 내겐 ‘그을린 사랑’이 그런 영화 중 하나였다.
<그을린 사랑>은 <듄> 시리즈, <컨택트>, <블레이드 러너 2049>,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등의 작품을 통해 거장의 반열에 오른 드니 빌뇌브 감독의 초기 걸작으로, 제83회 아카데미상 외국어영화상 후보, 제35회 토론토영화제 최우수 캐나다영화상 수상 등 전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으며 현재까지도 21세기를 대표하는 마스터피스로 추앙받고 있다. ‘반전’을 주제로 한 2011년 작품은 올해 6월 25일 4K 리마스터링 재개봉을 확정했다.
영화는 쌍둥이 남매 잔느와 시몽이 어머니의 충격적인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을 들으며 시작한다. 바로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와 존재조차 몰랐던 형제를 찾아 어머니가 쓴 편지를 전하라는 것. 비석을 세우지도 말고, 세상을 등진 듯 엎드린 채로 매장해달라는 유언 뒤엔 그 두 통의 편지를 무사히 전하고 나서야 제대로 장례를 치러 달라는 조건을 덧붙인다.
레바논 출신 이민자로 캐나다에 정착한 나왈 마르완과 그녀의 두 쌍둥이 자녀 잔느와 시몽. 이들의 삶엔 어떤 사연이 있었던 걸까. 유서를 전달한 공증인에게 반발한 아들 시몽과 달리, 딸 잔느는 모든 이야기의 시작인 어머니의 고향 중동으로 떠난다.
처음부터 끝까지 잔잔한 파격적임에 눈을 뗄 수 없는 작품이었다. 특히 최근 이란과 이스라엘의 전쟁, 끊임없는 전 세계의 크고 작은 분쟁까지 생각해볼 지점이 많았다. ‘그을린 사랑’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모든 것이 불타 황폐해진 풍경 앞에 주저앉아있던 나왈의 얼굴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당신은 틀림없이 말을 잃겠죠
진실 앞에선 모두가 침묵하니까
- 영화 '그을린 사랑' 중
과거 어머니 나왈이 걸었던 길을 따라 잔느가 걷는 길은 순탄하지만은 않다. 수소문해 찾아간 마을에서 홀대를 당하기도 하고, 어머니가 크파르 리앗이라는 정치범 수용소에서 15년간 감옥생활을 했다는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하기도 한다.
‘때론 모르는게 더 나은 진실도 있는 법’이라는 누군가의 묵직한 충고에 그러나, 고통스럽고 괴롭더라도 끝내 알아가기를 선택한다. 이 영화가 관객에게 보여주기로 선택한건 무지한 평화가 아닌 고통스러운 ‘진실’이기 때문이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 드러나는 충격적인 반전은 내가 적이라고 미워하고 해친 사람들이 고스란히 내 가족, 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매우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드러나는 경악스럽고도 비극적인 진실에 관객들은 이 영화를 끊임없이 곱씹게 되고 생각하게 된다.
나지막한 나왈의 목소리로 마무리되는 나레이션은 결국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 그 자체이다. 폭력은 더 큰 폭력을 낳고, 복수는 더 큰 복수를 낳는다는 사실을. 잔인하고 끔찍한 굴레를 끊는 건 결국 위대한 사랑이라는 것까지.
여전히 이렇게나 많은 비극과 폭력 속에서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곳은 어디일까.
끝없는 절망과 좌절 속에서,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을 감싸 안은 위대한 사랑은 여전히 답한다. ‘함께 있는 건 멋진 일’이라고.
사랑하는 아이들아
이야기의 시작은 언제일까?
너희가 태어날 때일까? 그러면 그 시작은 공포란다
너희 아버지가 태어날 때일까? 그렇다면 그 시작은 위대한 사랑이란다
너희 이야기의 시작은 약속이란다
분노의 흐름을 끊어내겠다는 약속
덕분에 마침내 약속을 지켜냈구나
흐름은 끊어진거야
- 영화 '그을린 사랑'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