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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디아스포라는 기원적으로 '흩뿌려짐'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으며, 본래 고향이나 조국을 떠나 다른 지역에 흩어져 살아가는 민족 집단과 그들의 경험을 지칭한다. 한국적 디아스포라는 고려시대 몽골의 침략으로 시작된 초기 이주에서부터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함경도와 평안도 주민들의 만주 이주가 있었고, 1860년대부터 1910년대까지는 재해와 기근을 피해 러시아 연해주와 만주로의 농업 이주가 진행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강제징용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대규모 이주가 중국, 일본, 하와이, 멕시코 등지로 확대되었으며, 이 시기 해외 한인들은 독립운동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국제결혼, 해외입양, 노동이주 등 다양한 형태의 디아스포라가 발생했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시기에는 광부와 간호사들이 독일 등 유럽으로 파견되었고, 1980년대 이후에는 미국, 캐나다, 호주 등으로의 유학과 이민이, 1990년대부터는 중국, 러시아, 중앙아시아 등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의 역이주 현상이 나타났다. 현대 한국 디아스포라는 약 750만 명으로 추산되며 전 세계 170여 개국에 분포하고 있다.


최근 이러한 내용을 다루는 작품이 출간됐다. 폴 윤의 <벌집과 꿀>이 그것이다. 작품은 일본 에도 시대부터 현대까지의 시간들, 사할린 섬, 바르셀로나, 런던 등의 다양한 시공간을 배경으로 한국 디아스포라의 특수성을 넘어 보편적인 인간 경험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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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경험의 상징적 은유


 

책의 저자인 폴 윤은 뉴욕시에서 태어난 한국계 미국인 작가로, 그의 작품 세계는 개인적인 경험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특히 그의 할아버지가 북한 난민으로 한국에 정착하여 고아원을 설립했다는 배경은,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디아스포라와 '집'에 대한 탐구의 중요한 동기가 된다. 이는 단순한 문학적 관심사를 넘어선 작가 자신의 정체성 탐색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은 정체성, 소속감, 문화 충돌, 이주, 이산, 집, 그리고 가족 재건과 같은 주제들을 깊이 있게 다룬다.  그의 작품에서 '가족'과 '집'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은 그가 흩어져 살았던 가족 구성원들과 만나지 못했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단순히 외부적 사건(전쟁, 이주)으로 인한 가족의 분산뿐만 아니라, 내면의 '고아' 상태와 '재건'의 욕구를 동시에 다루는 깊이를 부여한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잃어버린 가족사를 재구성하고, 독자들에게 보편적인 인간의 연결 욕구를 전달한다. 작가 자신이 "나는 자라면서 대부분 진정으로 집에 있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그 느낌을 찾기 위해 여행했다"고 말한 것은,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이 겪는 이산과 방랑의 경험이 단순히 외부적 상황에 국한되지 않고, 내면의 '집'을 찾아가는 보편적인 인간의 여정을 대변함을 시사한다.


<벌집과 꿀>은 출간 이후 평단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으며 그 문학적 위상을 확고히 했다. 이 작품은 2023년 스토리 프라이즈를 수상했으며, 조이스 캐롤 오츠 상 롱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또한 2023년 타임지 선정 10대 소설 및 필독서, 뉴욕 타임즈 북 리뷰 편집자 선정 도서로 선정되었고, 뉴요커, 배니티 페어, 라이브러리 저널, 일렉트릭 리터러처, 뉴욕 공립 도서관 등 다수의 권위 있는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소설 속 인물들은 "말 그대로 그리고 비유적으로 고아"이며, "가족의 자신만의 버전"을 찾고 "어떤 의미에서든 집을 찾고 싶어 한다". 생물학적 가족은 전쟁과 이주로 인해 흩어지거나 사라진 경우가 많고, 인물들은 종종 홀로 남겨진 채 살아간다. 이러한 가족 해체는 한국 디아스포라의 핵심적인 비극 중 하나이며, 이는 작품 속 인물들이 겪는 가장 깊은 고뇌의 원천이 된다.


'고아'라는 비유는 단순히 부모의 부재를 넘어, 역사적 격변 속에서 뿌리 뽑히고 단절된 정체성을 상징한다. 이러한 '고아'들이 '자신만의 가족'을 찾는 과정은 혈연 중심의 전통적 가족 개념을 넘어, 새로운 유대와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현대인의 보편적인 욕구를 반영한다. 인물들이 겪는 '고아' 상태는 단순히 물리적 고립을 넘어 정서적, 문화적 단절을 의미하며, 그들이 '집'과 '가족'을 찾는 과정은 외부 환경에 대한 적응뿐만 아니라, 내면의 상실감을 치유하고 새로운 소속감을 형성하려는 깊은 심리적 여정이다.


특히, 책에 수록된 동명의 단편 ‘벌집과 꿀’은 이 핵심 주제를 함축하여 보여준다. 단편은 1880년 연해주로 이주한 고려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 러시아인 군인이 자신의 삼촌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구성된다.


단편은 남편의 폭력에 지친 여자가 남편을 죽이며 시작한다. 여자는 그동안 남편이 저지른 만행을 폭로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둘이 결혼했다는 이유로 묵살하고, 남편의 동생은 혈육의 복수를 위해 여자를 목메달아 죽인다. 이 끔찍한 연쇄의 장면을 청각장애인인 딸은 모두 목격했고, 사람들은 모두 그 딸을 두고 귀신들린 아이라고 손가락질하기 바쁘다. 주인공은 이를 안쓰럽게 여겨 그 아이를 데려와 돌본다는 내용이다.


둘이 함께 지내게 된지 한달이 흐르고, 동네 사람들이 ‘아이와 동침하는 남자’라며 떼를 지어 찾아온 날, 주인공은 아이에게 벌꿀을 나르는 벌을 이용하여 벌집을 찾는 법을 알려준다.


“몇 분 뒤, 벌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벌은 공중을 맴돌며 원을 그렸고, 찻잔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그 벌을 따라갔고, 아이도 저를 따라왔습니다. 더 이상 벌이 보이지도 소리가 들리지도 않게 되자, 저는 가만히 서서 찻잔을 들어 올리고는 벌이 돌아오길 기다렸ㅅ브니다. 그러자 벌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더 멀리 숲속으로 나아갔고, 그러ㅡㄴ 동안 저는 여자의 딸에게 이건 제가 선교사에게서 배운 요령이라고 말해줬습니다. 우리는 길을 만들어내고 있는 거라고요.”


이 구절은 꿀로 벌을 유인하여 벌집으로 가는 길을 찾는 행위를 묘사한다. 이는 물리적인 집이든, 소속감이든, 혹은 가족의 재건이든,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과정을 상징한다.


디아스포라의 맥락에서 생물학적 가족이 흩어지거나 사라진 경우가 많은 상황에서, 인물들은 종종 "말 그대로 그리고 비유적으로 고아"가 되어 "자신만의 가족"과 "어떤 의미에서든 집"을 찾으려 노력한다. 여기서 '벌집'은 오랫동안 갈망해온 고향이나 공동체를 의미하며, '꿀'은 그러한 연결을 통해 얻게 되는 달콤한 결과, 즉 위안과 안식, 또는 삶의 영양분을 상징한다.


이러한 이미지는 윤의 많은 인물들이 겪는 끈기와 적극적인 추구를 강조한다. 그들은 단순히 집이 나타나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흔적을 만들며' 안정과 연결을 향해 나아간다. 또한 '벌집'은 디아스포라 공동체 자체를 은유하기도 한다. 즉, 흩어진 사람들이 새로운 유대와 지지 체계를 형성하기 위해 함께 모이는 모습은 마치 벌들이 새로운 벌집을 만드는 것과 같다. 그리고 '꿀'은 이러한 공동체가 보존하는 공유된 경험, 문화, 그리고 새로운 유대가 제공하는 양분을 의미한다. 궁극적으로 "벌집과 꿀"은 이산의 경험 속에서 삶을 재건하고 소속감을 찾으려는 인물들의 힘들지만 희망찬 여정을 상징하는 핵심적인 메타포로 기능한다.

 

 

 

푸코의 헤테로토피아 그리고 ‘벌집과 꿀’


 

이때, 푸코의 헤테로토피아 개념으로 <벌집과 꿀>을 읽는 것은 디아스포라 경험의 복합적 공간성을 이해하는 데 특히 유용하다. <벌집과 꿀>처럼 디아스포라 문학은 공간성에 주목함으로써 이산의 경험과 정체성 형성 과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이주민들에게 공간은 단순한 물리적 배경을 넘어 문화적 기억과 정체성이 협상되는 장(場)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고향에서 떠나 새로운 땅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이주민들은 '여기'와 '저기' 사이의 경계에 위치하며, 이러한 '경계적 공간'은 전통과 변화, 소속과 이질감이 동시에 공존하는 복합적 특성을 지닌다. 디아스포라 문학은 이러한 공간들을 통해 뿌리 뽑힘의 트라우마와 새로운 소속감 사이의 긴장, 그리고 초국가적 정체성의 형성 과정을 드러낸다.


푸코의 '헤테로토피아' 개념으로 볼 때, 디아스포라 공간은 지배 문화와 이주민 문화가 충돌하고 협상하는 '다른 공간'으로서, 대안적 정체성과 공동체가 형성되는 중요한 장소가 된다. 헤테로토피아는 사회의 주류 공간과는 다른 원리로 작동하는 '다른 공간' 또는 '타자의 공간'을 의미한다. 이는 현실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지만 지배적인 사회 질서와는 다른 논리로 기능하며, 일상적 공간에 균열을 내거나 그것을 전복하는 역할을 한다. 푸코는 헤테로토피아적인 장소가 사회의 규범적 공간 배치와 권력 관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하여, 다양한 시간성과 정체성이 공존할 수 있는 장소로서 나아가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봤다.


푸코의 헤테로토피아는 사회 내에 존재하지만 지배적 공간 질서와는 다른 원리로 작동하는 '다른 공간'을 의미한다. 이는 여섯 가지 원리를 통해 특징지어지는데, 다음과 같다.


① 모든 문화는 헤테로토피아를 창조한다.

② 헤테로토피아는 시간에 따라 기능이 변할 수 있다.

③ 하나의 실제 장소에 여러 공간을 병치시킨다.

④ 헤테로크로니아(시간의 단절)와 연결된다.

⑤ 개방과 폐쇄의 시스템을 가진다.

⑥ 나머지 공간들과 관계하여 환상의 공간이나 보상의 공간으로 기능한다.


<벌집과 꿀> 속 장소들은 이 여섯 가지 원리를 모두 반영하지만, 특히 네 번째와 여섯 번째 원리를 반영한 부분은 탁월하다.


"다양한 지역적, 역사적 배경"에 걸친 이질적인 이야기들로 구성된 폴 윤의 단편집 그 자체는  하나의 실제 장소 안에 양립 불가능한 공간들을 병치시키는 푸코의 원리를 예시한다. 독자는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시간과 장소가 공존하는 문학적 헤테로토피아에 진입한다. 개별 이야기 내에서도 인물들은 종종 과거와 현재, 기억과 경험, 꿈과 현실 등 여러 현실을 넘나든다. "치매로 현실과 과거를 오가는" 해환의 이야기는  이러한 시간적 병치의 대표적인 예시로, 한 개인의 의식 속에 다른 "시간들"이 층층이 쌓여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서사 기법은 푸코의 "헤테로크로니아"(시간의 헤테로토피아) 개념과도 일치한다. 폴 윤의 이야기는 단순히 역사적인 것을 넘어, "역사의 깊고 혼탁한 진창"이  현재를 어떻게 능동적으로 형성하고 간섭하는지를 보여주며, 인물들의 삶 속에서 다양한 역사적 시간들이 충돌하는 복잡하고 비선형적인 시간적 헤테로토피아를 창조한다. "복잡한 유산" 과 "전쟁의 지속적인 영향" 은 단순히 시간이 축적된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능동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푸코는 헤테로크로니아를 시간을 축적하는 공간(박물관, 도서관) 또는 덧없는 공간(축제)으로 정의한다. 폴 윤의 이야기는 "500년에 걸친 한국인 디아스포라"를 다루며, "집단 기억과 한국인 디아스포라"를 탐구한다. 그러나 폴 윤 작품의 역사적 요소는 과거의 수동적인 축적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인물들의 현재 삶을 능동적으로 "괴롭히고"  "얽어맨다". 예를 들어, "전쟁의 지속적인 영향"  또는 "소녀가 겪었던 끔찍한 일들" 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트라우마이다. 이는 폴 윤의 헤테로크로니아 활용이 푸코의 시간 축적 예시를 넘어, 다른 역사적 시간성들이 어떻게 서로 간섭하여 과거가 살아있는 능동적인 힘으로 작용하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현재를 창조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역사적 트라우마가 현재를 끊임없이 병치하고 교란하는 지속적인 헤테로토피아로 기능하는 방식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드러낸다.


푸코는 헤테로토피아의 여섯 번째 원리로 환상의 공간과 보상의 공간 개념을 들었다. 둘은 모두 현실 세계와는 대비되는 특별한 기능을 수행하는데, 환상의 공간은 매춘가처럼 일상적 현실의 질서와 규칙이 해체되어 인간 존재의 분절된 특성을 드러내는 공간으로, 현실 공간의 더 큰 환상성을 폭로한다.


반면 보상의 공간은 일상 현실의 혼돈과 무질서에 대응하여 완벽하게 질서 잡히고 조직된 대안적 공간을 창조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정서적, 심리적 보상을 제공한다. 이에 대한 예로는 초기 미국의 청교도 식민지나, 남미의 예수회 식민지처럼 완벽하게 정돈되고 규제된 공간을 들었다.


이 두 가지 개념은 책의 첫 번째 단편인 ‘보선’에 잘 드러난다. 보선은 뉴욕의 무역회사에 소속된 화물트럭 운전사였다. 그러나 그 회사는 사실 장물을 거래하고 있었고 보선은 이 사건에 잘못 휘말려 어느 겨울 맨해튼과 뉴저지를 잇는 다리 위에서 붙잡힌다.


감옥에서 일종의 소속감을 느끼던 그는 수감생활이 끝나자 다시 떠돌이가 된다. 그는 제대로된 직장을 구할 수 없어서 동료 수감자에게 추천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고 카지노에서 경비원으로 일하게 되며, 작은 시골마을에 정착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함께 일하는 동료 경비원이 카지노에 아이를 데려왔다가, 그 아이가 사라지게 되고 온 동네 사람들과 함께 아이를 찾아 다닌다. 이 과정에서 보선은 자연스럽게 마을에 편입하게 된다.


이는 현대 사회에 나타나는 환상의 공간과 보상의 공간을 잘 보여준다. 우선, 전자는 현대 사회에서 현실의 규칙과 시간이 일시적으로 중단되고 환상적 경험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특히 카지노는 24시간 조명이 밝게 유지되며 시계가 없어 시간 감각을 상실하게 만들고, 현실의 사회적 규범과 제약에서 벗어나 일시적 해방감을 제공한다.


현대의 보상의 공간은 ‘고향’의 이미지로 혼돈스러운 사회에 대한 대안으로서 제시되곤 한다. 엄격한 규율과 질서, 명확한 가치체계 등이 존재하여 현실의 불완전함에 대한 정서적, 심리적 보상을 제공한다.


한편, 이 이야기는 궁극적인 헤테로토피아인 '배'를 상징하기도 한다. 배는 목적지 없이 무한한 바다를 항해하는 공간이자, 문명과 야만, 동양과 서양, 식민지와 본국 사이를 오가는 경계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배는 "공간 없는 공간"이자 "위치 없는 위치"로서, 고정된 장소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자체적인 규칙과 질서가 작동하는 완벽한 헤테로토피아적 특성을 지닌다. 또한 배는 경제적 발전과 제국의 확장을 위한 도구인 동시에, 다양한 문화와 사람들이 만나고 섞이는 교차점이 되어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하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보선’의 끊임없는 이주와 정착하지 못함은 그의 이름처럼 말이다.

 

 

 

글을 마치며,


 

현재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반이민 정서와 포퓰리즘의 물결은 디아스포라 공동체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유럽의 극우 정당들이 "자국민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이주민을 사회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미국에서는 "아메리카 퍼스트" 담론이 이민자들을 배척하는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아시아 각국에서도 외국인 혐오 정서가 증가하면서, 수세기에 걸쳐 형성된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이 존재론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배타적 민족주의와 경직된 국경 개념에 기반한 포퓰리즘은 복잡하고 다층적인 현실을 단순화하여 이해하려 한다. 그들이 제시하는 "순수한 민족", "고유한 문화", "명확한 경계"라는 허상은 오늘날 상호연결된 세계에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재 방식 자체를 왜곡하는 위험한 환상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폴 윤의 『벌집과 꿀』이 제시하는 대안적 비전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작품은 포퓰리즘이 강요하는 배타적 정체성에 맞서는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우선,  가족 개념의 확장이다. 혈연 중심의 전통적 가족 개념을 넘어, "자신만의 가족"을 찾고 구성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현재의 배타적 공동체 담론에 대한 강력한 대안이 된다. 생물학적 연결보다는 상호 돌봄과 연대에 기반한 선택적 가족과 공동체의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민족이나 국가라는 거대 담론을 넘어선 인간적 유대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이는, 공간에 대한 새로운 상상을 기반으로 한다. 물리적 영토와 경계에 집착하는 포퓰리즘적 사고와 달리, 작품은 정서적이고 문화적인 "집"의 개념을 제시한다. 진정한 소속감은 출생지나 국적이 아닌, 서로를 돌보고 이해하는 관계 속에서 형성됨을 보여준다. 이는 "벽을 쌓자"는 배타적 공간 정치학에 맞서, "다리를 놓자"는 포용적 공간 상상력을 제공한다.


<벌집과 꿀>이 궁극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혐오와 배제의 정치학을 넘어선 연대와 포용의 가능성이다. 작품 속 인물들이 "길을 만들어내며" 벌집을 찾아가는 것처럼, 우리 역시 기존의 경직된 경계와 편견을 넘어 새로운 공존의 길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 디아스포라의 경험이 단순한 고통과 상실의 서사가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더 넓고 깊은 연대를 형성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희망의 서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어디가 고향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이다. 포퓰리즘이 제시하는 분열과 배제의 답변 대신, 폴 윤은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연결될 수 있는, 상처를 딛고 치유로 나아갈 수 있는 인간적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것이야말로 혐오와 분열로 얼룩진 현재를 넘어서기 위해 우리가 간직해야 할 소중한 통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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