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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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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영화 <그을린 사랑>의

내용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는 사람이 얼마나 악할 수 있을지 알지 못했고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상상하지 못했다. 신은 인간에게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을 준다고 하지만, 사실 시련은 자신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을 골라 찾아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까닭 없는 악의에 사고처럼 일상을 잃어버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고 선량한 소시민들에게도 불구대천의 원수가 한 명쯤 있는 게 이상하지 않다.

 

이 보편적이고 불행한 세상의 진리보다 더 신기한 것은, 끔찍한 일을 당한 보통의 사람들 대개가 바라는 것이 하나로 모인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그것은 자신의 피해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아니라 재발 방지 방안 마련이다. 이들은 피해의 당사자가 되어 타인의 고통에 대한 깊은 공감을 자연스럽게 수행하며 비극의 굴레를 끊기를 소망하게 된다. 그 어느 것보다 슬프지만 위대한 공감의 달성이 아닐 수 없다.

 

세계가 전쟁을 하는 잔인한 시대, 영화 <그을린 사랑>은 관객을 순수한 고통의 경험의 목격자로 끌어들이며 공감과 화해의 가치를 전한다. 나아가 쌓여가는 증오가 사랑을 전소시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사랑과 용서의 힘을 말하고 있었다.

 

 

 

증오의 고리 속에서도 사랑을 잊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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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을린 사랑>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유언에 따라 두 통의 편지 전달을 요청받은 쌍둥이가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와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형제를 추적하는 내용이다. 이 과정에서 두 자녀가 미처 알지 못했던 어머니 '나왈 마르완'의 과거와 충격적인 진실이 밝혀진다.

 

영화는 두 가지의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그 두 가지 의문은 바로 쌍둥이의 가족의 행방과 둘의 어머니 나왈이 자식들에게 아버지가 전쟁에서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던 일에 관한 의문이다. 영화에서 나왈의 과거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찾아올 때마다 이 의문에 대한 답은 계속 바뀐다. 어떤 확신이 찾아오면 그것을 배반하듯 자꾸만 더한 불행을 나왈에게 안겨주기 때문이다. 충격적인 반전은 그러한 무수한 불행 중 나올 수 있는 가장 불행한 경우의 수에서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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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의 원인은 바로 도처에 널린 증오에 있었다. 증오는 나왈의 과거를 그보다 더 이전의 과거로부터 떨어뜨리고, 아주 오래 전 형성된 믿음을 뿌리채 뒤흔든다. 시간이 흐르며 나왈이 목격하고 경험했던 폭력과 상실은 나왈 당신에게 눈덩이처럼 불어나 돌아온다. 난민 애인의 존재를 들켜 형제의 손에 그가 죽는 걸 지켜봐야만 했던 일, 원치 않게 첫째 아들을 곁에서 떠나보내야 했던 일, 일면식도 없던 어린 아이를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했으나 결국 지키지 못한 일, 내전의 근원을 죽였던 일.......

 

대부분 나왈의 의지에서 벗어난 것이었으나 한 가지는 명확하다. 결정적으로 나왈은 자신이 품었던 격정적인 분노로 인해 정말 많은 것을 잃었다는 것이다. 이슬람의 풍습과 주변의 시선, 내전,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상실은 나왈의 가슴에 증오라는 불을 붙였다. 불행의 원인이라 생각했던 사람을 죽였지만, 사실 나왈의 앞에는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그것은 나왈이 저지른 죄에 대한 정당한 대가라고 하기에는 지나친 일 뿐이었다. 나왈 또한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깊이 후회했다. 번듯하고 타당한 명분이 있었지만, 영혼까지 파괴할 수 있는 가공할 힘을 인간 한 명 한 명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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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돌이켜 보면 나왈에게 중요했던 것은 사랑이었다. 그 모든 일의 중심에는 분노에 가려진 사랑이 있었다. 폭격으로 아들을 잃었을 거라는 절망감, 눈앞에서 아무런 죄 없는 사람들이 총알 몇 발에 스러져 버리는 순간의 고통, 아들을 드디어 만났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자신의 마음을 파괴했던 남자였다는 걸 알게 된 순간의 엄청난 충격의 뒤에도 말이다. 나왈의 분노는 그러므로 정의감이나 대의 같은 거창한 것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감정에서 출발해 시대의 비극에 자신의 가족들을 겹쳐 보며 폭발한 감정이었다.

 

분노를 발산한 대가로 나왈은 감옥에서 노래를 부르며 긴 세월을 견뎌야 했다. 사실 나왈이 고문을 거센 저항이 아닌 노래로 견뎌낼 수 있었던 이유는 같은 힘으로 들이받는 것보다 그것을 흘려보내는 편이 훨씬 덜 고통스럽다는 것을 이미 경험으로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겪을 수 있는 온갖 고통을 겪고 손에 넣은,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은 그 누구도 해칠 수 없는 노래였다.

 

결국 나왈을 가둔 이들은 노래를 멈추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하게 되고 나왈은 그 일로 무척 끔찍한 정신적, 육체적 폭력을 경험하게 된다. 애석하게도 나왈의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 나왈은 무한한 사랑의 대상이 증오의 대상으로 성장했다는 모순을 직접 마주하고 정신을 놓아버린 것이다. 그 후 나왈은 죽음을 앞두고 이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정하고 진실을 알리기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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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왈이 자신의 고통에 대한 보상을 바라고 진실을 나누기를 택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나왈 자신이 그러하듯 잔느와 시몽은 물론 그의 아들이자 쌍둥이의 아빠 또한 아무것도 모를 때로 결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나왈은 외면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진실을 통해 오해를 바로잡고 증오에 잡아먹히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특히 나왈의 과거를 하나씩 찾아나서는 쌍둥이에게 나왈의 선택이 갖는 의미는 무척 크다. 그것은 쌍둥이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송두리째 흔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쌍둥이들은 고통스러운 어머니의 과거와 자신들의 탄생에 감춰진 비밀을 알게 되고 수영장에서 서로를 끌어안는다. 그 순간 수영장은 트라우마의 공간에서 서로의 존재 자체에 대한 용서와 위로의 공간으로 변모한다. 환영받지 못했던 자신들을 향해, 어머니가 받았던 벌과 같은 자신들의 존재에 대한 깊은 슬픔과 공감을 나누며 나왈이 겪었던 고통을 쌍둥이가 간접적으로 느끼고 달래는 것이다.

 

나왈이 남긴 편지 두 통은 증오의 굴레를 끊고 미래를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다면 나왈의 삶과 하등 상관이 없어 보이는 우리에게 이것이 갖는 의미는 어떨까. 나왈이 쓴 편지의 의미를 안다면 우리는 '목구멍에 걸린 칼과 같아서 뽑기 힘든' 고통스러운 지금의 시대를 잊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비극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목구멍 속에 품은 칼을 삼키며 그것을 끊어내야 하지 않을까. 결국 우리의 분노가 사랑으로 사그라들 수 있기를, 사랑을 위해 분노하지만 증오로 이어지면 사랑을 잃을 수도 있음을 망각하지 않기를 오늘도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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