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 넌 어디쯤이니? 왜 늦었니? 뭐가 힘드니?"]
사회는 종종 청년들에게 묻는다. 지금 어디쯤이고 무엇을 하길래 늦냐고. 진학, 취업, 결혼 등 그들은 수많은 질의응답 속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최진영 작가의 단편 소설 「어디쯤」에서도 ‘나’의 아버지는 계속 어딘가로 가라고 아들을 재촉한다. 하지만 블랙홀에 빠진 듯 ‘나’와 검은 파카의 사내는 “성원빌딩인지 선원빌딩”(91p)인지 확실히 알 수도 없는 곳에 도착하지 못한다. 소설의 길이는 짧지만, 인물들은 대략 8시간 동안 추위 속에서 목적지를 찾고 그렇게 소설은 “아직이냐?”라고 묻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결말은 명확한 해결 없이 불안정한 상태로 마무리된다. 그렇게 다시 소설 첫 장으로 돌아오게 만든다.
소설에서 강박적으로 걸려 오는 전화는 전원을 꺼버리고 싶을 정도로 집요하다. 어디로 가고 싶은지나 잠시 쉬고 싶은지 물어보지 않는다. 목적을 알 수 없는 질문과 그렇기에 정확하게 대꾸할 수 없는 답들로 인해 시끄럽게 울려대는 전화는 끊기질 않는다. 지금부터 우리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아볼 차례이다.
1. 직진 후 건널목을 건너 우회전, 한동안 직진, 그리고 다시 좌회전
소설 「어디쯤」에는 두 가지 길이 나온다. 말(語)의 길과 실제 길. 전화 너머로 ‘나’에게 말하는 아버지와 안의 말은 쉽게 목적지를 찾을 수 있는 길이 나이다. 시점 인물이 걷고 있는 실제 길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독자는 시점인물과 함께 조잡한 약도를 보며 길 위에서 직진 후 우회전, 건널목을 건너 다시 우회전, 한동안 직진, 그리고 좌회전을 반복한다. ‘나’와 같은 처지인 남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 역시 전화 너머 누군가에게 ‘아직이냐?’라는 물음을 받았을 것이다. 이처럼 현실의 청년들은 답 없는 인생의 여정에서 정답을 강요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방황하며 주위에서 들어오는 압박은 20대와 30대의 청년 자살률 증가로 드러난다. OECD 평균 청년 자살률은 10.8명이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10만 명당 23명으로 심각한 수치이다. 현실의 이야기이다.
한편, 작가는 의도적으로 소설에서 독자가 읽으면서 현실 세계로, 자신의 주변 상황으로 유추할 수 있는 지명을 정확하게 언급한다. 71쪽에서 국민은행과 우리은행이 마주 보고 있는 공간은 독자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공간이다. 우리가 늘상 걷는 거리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길을 찾지 못하는 화자의 모습에서 더욱 뿌연 안개 속에 갇힌 느낌을 받게 한다. 심지어 목적지를 알 수 없는 인생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청춘과 옆에서 압박과 조언이 아닌 잔소리를 얹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화자가 길을 물었을 때 자신도 이곳이 처음이라고 답하는 또 다른 남자는 자기 갈 길이 바빠서 무시한다. 녹색 빛의 신호등이 꺼질까 봐 빠르게 건너려고 한다. 이는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가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청춘, 모두를 동료가 아닌 경쟁자로 보는 청춘의 모습과 겹친다. 관계의 단절의 본질을 드러내는 지점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한편으로는 무한하고 공포스러운 공간인 백룸(The Backrooms)이 떠오른다. 어디로 가던 똑같은 벽과 바닥이 보인다. 동네를 8시간 동안 헤매고 있으면서 어디인지 알지 못하는 화자의 모습이다. 목적지는 사막의 신기루처럼 일렁인 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좌회전과 우회전을 반복하는 순간 골목길 너머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다. ‘나’ 역시 결말에서 마주친 내리막길 아래에 무엇이 있을지 몰라 지쳐있을 뿐이다. 백룸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설 속 사라진 지하철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디쯤」의 공간을 믿을 수 없고 환상으로 보게 되는 첫 시작점인 지하철이다. 지하철이 없어지는 순간 어디론가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진 것이기에 말 그대로 갇히게 된다. 방황할 수밖에 없는 공간 속에 갇힐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하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2. 오답지와 정답지 사이 어딘가
아버지로 대변되는 기성세대는 그들이 생각하는 성공을 약도의 목적지로 그려두고 청년들의 걸음을 오답과 정답으로 가른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의 약도’는 자신이 걸어온, 경험해 온 답안지이지 구시대적 틀이다. 화자 역시 “어른들은 언제나 그들이 아는 길을 가르쳐주었다”(80p)라고 말한다. 약도는 왔던 길과 다시 가야 할 길이 같다는 점에서도 상징적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가야 할 곳을 더 미궁으로 빠뜨리고 정확하지 않은 오답지에 불과하다. 그리고 두 번째 약도가 등장한다. ‘편의점 직원의 약도’는 영수증 뒷면에 그려져 있다. 여전히 가야 할 곳, 약도가 역할 해야 하는 순간은 모호하다. 이때 편의점이란 공간의 특수성이 돋보인다. 24시간, 매일매일 그곳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쳇바퀴를 굴려야 하는 사람의 삶이 공간적 요소로 활용된다. 소설에는 추운 거리에 있다가 편의점으로 들어가는 순간이 두 번 나온다. 처음은 배가 고파서 들어간 69쪽의 편의점, 다음으로는 모텔 대신 들어간 77쪽의 편의점이다. 이때 모텔에서 편히 쉴 생각을 할 수 없이 사회에 내몰리고 있는 청춘들의 모습이 보였다. 동시에 아버지의 전화가 걸려 온다. 기성세대의 압박이다.
이와 같은 기성세대의 강압적인 모습은 TRPG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설의 ‘검은 파카 남자’와 ‘나’는 플레이어가 움직이는 캐릭터 말에 불과할 뿐이다. 좋은 말을 선택해야지 빠르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엄친아’와 ‘엄친딸’과 같은 단어는 학력/외모지상주의 추구와 동일시된다.
남자를 보며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미야자키 하야오, 2002)의 가오나시가 연상되었다. 가오나시는 얼굴이 없음을 의미한다. 남자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즉, 나를 상징하는 나만의 것이 상실된 채 검은색 무언가로 형상화된다. 가오나시는 영화에서 특정한 목적지 없이 치히로를 따라다니기만 하고 늪의 바다역까지 동행한다. 남자도 길을 잃고 목적지를 찾아 헤매는 처지이다. 가오나시는 목소리가 없고 치히로에 의해 변화하듯, 남자 역시 기성세대이자 사회가 정해준 목표를 따르며 자신의 진짜 목소리나 가야 할 길을 찾지 못하는 청년 세대의 혼란스러운 정체성을 상징한다. 스스로의 의지나 욕망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아직이냐?’는 타인의 재촉에 의해 움직인다. 결국 가오나시는 외로움과 욕망, 관계 맺기의 어려움을 상징한다는 점과 주인공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길을 헤맸다는 점에서 검은 파카의 남자와 외형뿐만 아니라 작품에서 상징하는 바도 연결된다.
3. 변주되어 반복되는 대화
소설에서 짧게 반복되는 전화는 총 8번 나온다. 78쪽의 아버지와 ‘나’의 대화는 89쪽에서 변주되어 반복된다. 작가가 글에서 반복된 상황이나 대사를 쓰는 것은 의도적인 선택이 작동한 것이다. 반복은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압박을, 변주는 그 압박 속에서 인물의 심리나 관계가 미묘하게 변화하거나 파탄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네, 아버지. 근데요./말해라./………/못 찾겠니?/……거기 꼭 가야 합니까?/왜, 힘들어?/왜 가야 합니까?/가보면 알아. 손해 보진 않아./(중략)/아버지는 가보셨어요?/서둘러라. 많이 늦었어. 도착하면 전화해. - 78p
넌 어디냐./………/제발 정신 차려. 난 하루하루가 너무 아깝다./도착했니?/아뇨, 아버지/그럼, 아직도 아직이냐?/아버지, 그 빌딩 이름이 정확히 뭐죠?/내가 적어주지 않았니./알아볼 수가 없어요./길을 따라 가./이름을 알려주세요, 아버지./나도 잘 기억은 안 난다면. 길을 따라가면 돼./(중략)/아버지는 가보셨냐고요./………/아버지는 어디 계세요?/내 걱정은 마라. 난 괜찮다./아뇨, 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시느냐고요. - 88~89p
처음에는 아버지에게 끌려가는 대화이지만, 한참을 헤매고 여러 골목길을 지나간 후 다시 걸려 온 전화에서 화자는 집요하게 묻는다. 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시냐고. 사실 아버지도 그곳에 가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 비슷한 대화처럼 보이지만, 세세하게 뜯어보면 여러 지점이 변주되었다. 우선, ‘나’의 침묵은 아버지에게로 옮겨 갔다. 더 이상 무기력하게 당하지만은 않고 아버지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작은 변화와 저항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반대로 아버지의 침묵은 질문에 대한 회피, 무지, 혹은 자신의 권위가 흔들리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드러낸다.
결국 작가의 의도적인 변주와 반복 속에서 중의적으로 해석할 틈이 생기는 순간이 있다. 소설 82쪽에서 “아빠가 맞았어.”와 “안 가요.”는 기성세대가 제시한 옳은 길을 따르는 인물을 제시하는 이유로 ‘안’의 이름이 부정이나 반대의 뜻을 나타낼 때 쓰이는 ‘아니’의 준말로 해석할 여지가 생긴다. 소설에서 안의 아빠는 자기 집을 두고 비하하는 행인과 싸움이 붙어 크게 다친다. 이때 맞다는 동사는 ‘그렇다 또는 옳다의 뜻을 나타내는 말.’임과 동시에 ‘외부로부터 어떤 힘이 가해져 몸에 해를 입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소설에서 안은 화자와 다르게 목적지를 찾아 가라는 화자의 아버지의 말에 일부 동조한다. 빨리 찾으라고 말하거나 직장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화자에게 쉽게 이직하라는 말을 내뱉는다. 그저 지금 자신의 용건이 더 중요하고 친구들에게 남자친구의 회사를 말하기 창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안은 기성세대에 동조하고 그들의 정답지를 따라가는 사람이다. 또한, ‘안’이 사는 동네로 안 간다는 택시 기사의 말은 ‘안’과 ‘나’가 다르기에 한 곳에서 만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안’이 ‘나’에게 오지 않는다는 의미와 ‘안’이 ‘나’와 다른 길로 간다는 의미다. 소설에서 두 사람은 단 한 번도 같은 공간에 있지 않는다. 결국 두 사람이 다시 싸우고 헤어지게 되는 결말은 이미 예견된 것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반복되는 대화에서 독자는 변주된 의미를 찾게 된다.
대부분의 독자는 소설 「어디쯤」의 첫 장을 보면서 ‘과연 갈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가진다. 못 간다고 생각할 수도, 끝내 블랙홀 같은 검은 구멍에 도착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독자가 어디 있냐는 점이다. 소설 90쪽에서 화자는 “갑갑증이 올라왔다. 이곳에 있지 않은 이에게 이곳을 설명해봤자 바보 취급이나 받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곳에서 갑갑증을 경험하는 독자라면 그 길을 걷는 동안-혹은 소설을 읽는 동안- 누군가‘어디쯤’이냐고 물을 때 갑갑증을 이겨내어 ‘어딘가’라고 답할 때쯤 성원, 아니 선원일지도 모르는 한 빌딩을 찾고자 하는 욕망을 이룰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