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선착순 세상’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어느 날은 정류장 한참 뒤에 선 버스를 타기 위해 모두가 달리자, 나도 속도에 맞춰 달렸다. 조금만 기다리면 정류장에도 버스가 설텐데, 달리면서도 내가 왜 달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남들 뛰면 덩달아 나도 달리는 이 문화 덕분에 우리 사회의 빨라짐에는 끝이 없다. 이럴 때일수록 재빠르게, 가장 빠른 자를 위한 자리를 점해야 한다. 매일을 뒤처지지 않기 위해 허덕인다.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빽빽한 퇴근길 지하철에 올라탔다. 노약자석 앞, 벽에 몸을 기대고 숨을 골랐다. 노약자석에 앉은 이들과 어쩔 수 없이 간간이 눈이 마주쳤고, 그중 중년 부부가 눈에 들어왔다. 노약자석에 앉을 자격이 부여되는 나이란 없다. 20대인 내가 "노인의 자리를 넘보는" 그들을 탓하거나 그들의 ‘자격’을 운운할 수는 없는 법이다. 세상은 선착순이니까. 먼저 앉는 사람이 임자인 선착순의 시스템은 어쩌면 가장 합리적이고 안정적인 규칙이니까. 논리적이고 당연한 세상의 이치다. 그들을 평가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괜히 깜깜한 창에 비친 나를 바라봤다. 지하철은 그날따라 심히 덜컹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할머니가 보행기를 끌고 지하철에 올랐다. 지하철역이 아닌 밀림을 헤치고 온 듯, 지친 할머니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몸이 보행기에 꼭 맞게 구부정하고 작았다. 그 보행기와 땀방울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또 한 번 밖을 내다봤다. 연거푸 들리는 할머니의 한숨에 마음이 반복적으로 쪼그라들었다. 가시방석에 앉은 것만 같아도 비켜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하철이라는 사회엔 가장 합리적인 선착순과 경쟁의 법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타인이 가진 불편함의 크기를 나이를 기준으로 잴 수도 없다. 보행기를 끄는 할머니가 옆에 있다고 해서 중년 부부가 일어나야 할 분명한 근거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그렇게들 살아남지 않는가. 신속히 자리를 점한 이의 선택이 절대적인 세상이지 않던가.

삼각지역에 다다랐을 즈음, 나는 내심 할머니가 아무 말도 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던 건지, 화들짝 놀랐다. “허리가 너무 아프다”는 육성의 '호소' 때문이었다. 허리를 부여잡고, 혼잣말하듯 말했지만 정확히 부부를 향해 호소하는 할머니였다. 부부는 약속이라도 한 듯, 눈을 꾹 감았다. 방금 전까지 대화를 나누던 그들이 눈을 단단히 감고 침묵했다. 들리지 않는다는 듯, 있는 힘껏 할머니의 보행기를 마주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이제 할머니는 두 사람을 물리적으로 밀쳐내고 자리를 쟁취하지 않는 이상 앉을 수 없다. 할머니가 타기 한참 전에 그들이 쟁취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여유라곤 증발한 이 퇴근길 지옥철에서는, 누군가의 처절함에도 그저 눈을 감아버리는 게 몸도 마음도 편한 길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궁금했다. 부부는 왜 눈을 감았는가? 보란 듯 눈을 감았는데 왜 괴로워보였나? 스스로가 양보의 주체라는, 호소의 대상이라는 인식은 마음의 어느 구석에서 기인하는가?

어느 곳에도 닿지 못하고 허공에 맴도는 호소에 무력해진 할머니는 한숨만 내쉰다. 이내 안 되겠다는 듯, 어깨를 톡톡 쳐서 그들을 부른다. 어차피 다음 역에서 내린다고, 허리가 너무 아파서 그런데 잠시 양보해 줄 수 있냐고 애원한다. 내 기억이 맞다면, 애원이 맞았다. 몇 번의 고개 숙임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눈을 뜬 아저씨는 본인들도 다리가 아파서 일어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누가 그 자리에 앉는 것이 정의이고 옳게 된 것인지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가장 올바르고 착한 이가 바랄 만한 상황은 무엇일까? 마지못해 아저씨가 일어나고, 할머니는 자리를 얻어냈다. 마음이 쿵쾅댔다. 해결인가? 쪼그라든 이 마음이 이제 펴질 수 있는가? 9-2호칸 노약자석에 비로소 평화가 찾아온 것일까?
 
진정 사건의 해결이고 종결인 건지, 스스로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들었다. 끝까지 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약속대로 다다음 역에서 내리려고 하는 할머니가 자리를 점하기 위해 급히 올라타는 인파에 순식간에 휩쓸렸기 때문이다. 내려야 한다고 외치는 할머니의 모습에 나까지 덩달아 여기 할머니가 내리고 있다고 소리쳤다. 사람들은 모든 소리를 삼켜 버리며 꾸역꾸역 올라탔다. 문이 닫히고 있다는 소리와 동시에 할머니는 가까스로 지하철을 탈출한다. 할머니가 내리자마자 부부는 "왜 자꾸 옆에서 중얼거리냐"며 할머니의 호소에 불만을 표한다. 부부는 귀한 자리를 양보했고, 할머니는 앉았지만, 그 무엇도 해결되지 않았다. 속이 꼬여 가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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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착한 척’과 ‘위선’이라는 말로 더 좋은 세상을 위한 노력과 실천을 비꼬아 안정을 찾곤 한다. 내가 참여할 수 없다면 차라리 무의미한 실천이라고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 나 달려나가기에도 바쁜 세상이다. 관련 없는 이에게 베풀어서 얻는 게 딱히 없다는 건 모두가 안다. 그런데, 사람으로 태어난 우리는 뒤도 안 보고 달려가다가도, 양심이라는 돌부리에 필연적으로 걸려 넘어지곤 한다. 중년 부부가 그때 눈을 감았던 건,따끔따끔 찔리는 양심의 감각을 피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할머니의 보행기와 땀방울, 한숨을 외면했던 이유도 전혀 다르지 않다.
 
교양 수업 때 들었던 “가짜 위선이라도 일부러 떨어야 하는 시대”라는 문장이 이따금 떠오른다. 일부러라도 남을 살피는 그 '착한 척'이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 빠르고 불편한 세상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보여주기식 양심에서 나올지도 모른다. 생전 처음 보는 타인이라도 그 사람의 어려움이 나의 양심을 자극한다면, 아무리 밟아도 자라나는 측은지심을 건드린다면, 잠시 나의 것을 포기할 수도 있는 게 진정 합리적인 인간의 마음이자 가장 자연스러운 '시스템'이지는 않을까.

선착순 세상의 정당성을 다 같이 질문해 볼 수 있다면 좋겠다.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맞닥뜨릴 때의 불편한 감정을 외면하기 위해 모두가 최선을 다하지만, 가장 합리적인 그 규칙을 따라잡느라 숨차는 이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사회의 다양한 칸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 가장 무섭다고들 하는 양심을 부러 꺼내보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쉼없이 달려나가는 세상에 양심으로 제동을 거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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