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don Gallery Weekend (런던 갤러리 주간)
지난 6월 6일부터 8일, 런던 각지에 소재한 126개의 갤러리들이 참여한 미술 주간 LGW(London Gallery Weekend)가 개최되었다. 2021년부터 매년 6월 첫째 주에 진행되는 이 행사는 기관과 시장 사이의 네트워크 강화와 대중의 참여를 촉진하며 그 규모를 넓혀가고 있다.
다양한 갤러리들이 이 주간을 기념하여 전시 오프닝뿐만 아니라 아티스트와 큐레이터가 함께하는 패널 토크, 퍼포먼스, 오픈 스튜디오 등을 운영한다. 아침 식사, 음료, 바베큐를 무료로 곁들인 토크 프로그램도 있다. LGW의 공식사이트에서 가이드 투어 일정과 큐레이터, 콜렉터, 예술가 등 다양한 문화예술계 전문가들의 코스 추천도 참고할 수 있다.
LGW의 프로그램 목록. 프로그램 운영 시간과 갤러리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마음에 드는 행사를 클릭하면 예약 가능하다.
출처: LGW 공식 사이트 화면 캡쳐
LGW는 런던 소재 갤러리에 속한 실무자들이 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회적 기업*의 형태로 운영되어 수익 창출을 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프로그램과 투어는 무료로 참여 가능하다. 운영, 홍보, 대외협력 등에 필요한 비용은 참가하는 갤러리들의 회원비와 외부 재단의 후원금으로 조달한다.
*영국에서는 CIC라는 명칭을 지닌다. Community Interest Company의 약자다.
LGW 나들이를 다녀보았다: Elizabeth Xi Bauer의 패널 토크
영국에서의 생활을 준비할 때부터 LGW를 알고 있었기에 이 기간 동안 운영되는 프로그램을 꼭 즐기고 싶었다. 처음으로 방문했던 갤러리는 Elizabeth Xi Bauer. 이곳에서 참여했던 패널 토크가 가장 즐거웠다. 이 갤러리는 런던에만 두 곳의 지점을 둔 작은 갤러리로, 국제적 아트페어 참여보다는 영국 내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그렇지만 다학제적 탐구를 이어오고 있는 다양한 국적의 예술가들을 런던에 소개하고 있다. 이번 토크에 참여했던 작가도 Elizabeth Xi Bauer과의 협업으로 영국 미술계 진출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토크의 주제는 지난 4월에 오픈한 전시 “+Days+Nights”를 다뤘다. 전시의 마지막날을 LGW 기간과 맞춰 토크로 마무리하는 자리였다. 이 전시는 벨기에 출신의 1946년생 미니멀리스트 작가 반 스닉(Van Snick)과 이스라엘 출신의 1983년생 작가 아브라함 크리츠만(Abraham Kritzman)의 작품을 함께 선보인다. 두 작가 모두 현실에서 느낀 감각을 그들만의 시각적 언어로 개념화하여 추상적 형태로 표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Elizabeth Xi Bauer의 패널토크. 왼쪽부터 학예사 베네딕트(Benedicte), 글로벌 미술시장 플랫폼인 아트넷의 유럽 리포터 로슨(Lawson), 전시에 참여한 예술가 아브라함 크리츠만, 그리고 사회자 밥스(Babbs)다.
출처: 직접 촬영
크리츠만은 역사적 신화와 동시대 사회가 지닌 서사를 철, 나무, 도자기 등 다양한 재료로 표현하고 있으며, 반 스닉은 십진수 체계(0-9)와 대응하는 작가만의 컬러 팔레트를 구성하여 밤-낮, 존재-부재 등의 이중성을 색채로 표현한다. 위 사진의 패널들 뒤에 있는 채색된 상자들이 그의 작품이다. 사실 요즘 시대에 색면 추상을 표방하며 작은 박스를 작품으로 내놓는 것은 날로 먹는 행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첫인상이었으나, 해당 작품이 1988년에 제작되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는 설명을 들으니 그 가치에 공감이 갔다.
크리츠만의 “Through the Night with C and C - Around the World & Mountains”(2025). 나무 패널에 도자기.
출처: 직접 촬영
세부 맥락은 다르지만 ‘추상’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두 작가의 작품을 같은 공간에 함께 전시했다는 점에서 지난 해 페이스 갤러리 서울에서 열린 이우환과 마크 로스코의 전시가 생각나기도 했다. 페이스의 전시가 동서양 거장의 만남을 주요 테마로 삼았다면, 이 전시는 원로 작가와 신진 작가의 만남을 보여주는 듯했다.
토크의 진행도 재미있었다. 갤러리에서 제공하는 음료와 함께 작가와 큐레이터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반 스닉의 작품에 드러나는 ‘이중성(Duality)’, 전시 공간에서 작품을 설치할 때 중요한 것, 동시대 추상 미술의 흐름 등에 대한 패널들의 이야기가 오갔다. 방문객들의 질의응답 시간도 흥미로웠다. 갓 미술을 즐기기 시작한 이들이 전시를 감상하는 방법부터 전시에 선보일 두 작가의 작품들을 선정하는 큐레이션 과정까지 청중들의 관심사를 알 수 있는 다양한 질문들이 오갔다.
토크가 끝난 후에는 방문객들과 갤러리 관계자들의 자유로운 대화가 이어졌다. 우뇌를 활성화하기 위해 전시를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는 중년 회계사 B와 Elizabeth Xi Bauer에서 갤러리 어시스턴트로 6년간 일해 온 K와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K를 통해 갤러리의 다음 전시와 프라이빗 뷰잉 일정에 관한 정보도 제공받았다.
LGW 나들이를 다녀보았다: 메이페어(Mayfair)의 갤러리 투어
패널 토크를 마치고 버스로 이동하여 런던 서부 중심지 메이페어(Mayfair)로 이동했다. 내셔널 갤러리와 차이나타운 등 유명한 관광지가 많은 소호의 인근 지역으로, 특히 이 일대는 명품 브랜드와 유수의 갤러리들이 밀집되어 있다. 내가 방문한 곳은 데이비드 즈워너(David Zwirner), 막스 헤츨러(Mas Hetzler), 스푸르스 마거스(Sprüth & Magers)였다.
데이비드 즈워너는 미국 출신 작가 조 브래들리(Joe Bradley)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었다. 화려한 색감과 거칠고 과감한 붓터치, 거대한 규모의 회화가 미국 추상회화의 느낌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이 작가는 오는 11월 오스트리아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앞두고 있는데, LGW를 통해 유럽 미술계에 그를 소개하는 경로를 자연스럽게 구성하려는 듯했다.
조 브래들리의 작품.
출처: 직접 촬영
막스 헤츨러도 마찬가지로 미국 출신 작가 제이크 롱스트레스(Jake Londstreth)의 전시를 선보이고 있었다. 갤러리에서 내가 방문했던 6월 8일의 다음 날에 아침에 조찬 이벤트를 열었는데, 이를 뒤늦게 알아서 아쉬웠다. 이 작가의 작업은 캘리포니아의 따스하고 강렬한 햇빛, 한없이 펼쳐지는 자연 풍경과 한 가운데의 고속도로, 그 와중에 보이는 태양광 발전소와 아마존 물류트럭의 전경을 화폭에 담고 있었다. 영국이나 유럽에서는 볼 수 없는 미국적인 풍경이라 유럽의 컬렉터들에게는 신선하게 느껴질 것 같았다.
제이크 롱스트레스의 작품 “Along I-210” (2024). 캘리포니아의 강한 햇빛이 느껴지는 색감이 인상적이었다. 풍경만으로 미국 사회의 자본주의와 생산력의 기반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출처: 직접 촬영
스푸르스 마거스는 2023년 한국의 올해의 작가상 후보였던 갈라포라스 김의 신작을 선보이고 있었다. 이 작가는 박물관의 컬렉션을 화폭에 담아 서구 전시 제도의 유물 분류 체계에서 형성되는 보이지 않는 문화적 서열의 존재를 드러내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아래 사진의 작품 외에도 설치와 추상으로 관객들이 박물관과 미술관의 전시 공간이 지닌 권력을 고찰하게 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갈라포라스 김의 작품. 아직 2025년의 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비슷한 규모의 색연필 작품을 10점 가까이 전시할 정도로 많은 작업을 완성했다는 것이 개인적으로 놀라웠다.
출처: 직접 촬영
해당 작품 외에도 박물관의 유물이나 수장고를 다양한 각도에서 묘사한 작품들이 있었는데, 정확한 투시와 점, 선, 면의 조화를 이루는 사물들의 배치로 회화적으로도 보는 재미가 있었다. 최근 국내 언론과 소셜미디어에서도 활발하게 보도했듯,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이 런던에 새로운 수장고를 개방하여 적합한 시기에 그녀의 작품을 선보였다는 감상도 들었다.
LGW, 그들의 목표는 무엇인가?
토크 프로그램과 음료, 다양한 국가 출신의 작가들의 전시. LGW의 프로그램과 전시는 기대한 대로 즐겁고 유익했다. 영리를 추구하는 민간 갤러리들이 사회적 기업을 설립하며 이런 행사를 주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LGW에 참가한 2명의 갤러리 디렉터가 런던과 뉴욕에 기반한 미술계 언론사인 The Art Newspaper의 팟캐스트에서 관련 내용을 다뤘다.
LGW는 펜데믹으로 위축된 영국 예술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는 취지로 2021년 설립되었다. 참여 갤러리들은 행사를 통해 민간의 자생력 구축뿐만 아니라 영국 미술계의 전시 및 큐레이팅의 질을 높이고 글로벌 아트허브로서 런던의 입지 강화를 도모한다. 그들이 밝힌 LGW의 3가지 핵심 목표는 기관-상업 갤러리와의 관계 구축, 미술계의 자생력 강화, 대중의 참여 촉진이다.
이를 위해 LGW는 다양한 외부 기관과 협업을 이어왔다. 우선 지속적인 민관협업 기회 창출하기 위해 기관에 속해 있는 학예 인력들과 갤러리 관계자들의 네트워크를 형성을 지원하고 있다. 예시로 영국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지원하는 자선단체 Art Fund와 파트너십을 맺어 런던 외 영국 전역의 공공 문화예술 기관에서 근무하는 큐레이터들이 LGW에 방문할 수 있도록 교통비와 숙박비를 지원하는 보조금을 운영한다. 나아가 올해는 영국 미술계를 지원하는 자선 단체이자 연구기관인 Paul Mellon Centre와 함께 해외 기관에서 근무하는 큐레이터들의 LGW 방문 지원금도 신설하여 런던 미술 생태계의 국제적 네트워크 확장을 추진하고 있다.
정부 및 공공 기관과의 직접적인 협업도 이루고 있다. 한국의 미술은행과 비슷한 제도로, 영국 문체부**에서 운영하는 Government Art Collection이 2024년부터 LGW 기간 중 전시된 작품을 소장하는 파트너쉽을 맺었다. 올해는 Henry Moore 재단, Tia Collection과의 협업을 통해 LGW 기간 중 공동 개최를 희망하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전시를 지원하는 기금 20000파운드(한화 약 3700만원)를 신설했다.
이 외에도 유럽 타 도시의 갤러리 및 미술주간과 연계하여 LGW를 홍보하고 있으며, 공공미술, 디지털 아트, 퍼포먼스 등 선보이는 장르의 분야를 넓혀 다방면으로 영향력과 인지도 확장을 도모하고 있다. 이는 미술계 전문 네트워크 확장 뿐 아니라 참여 갤러리들이 새로운 컬렉터와 후원자들을 찾을 기회도 마련하는 데에도 효과적이다.
LGW는 이러한 시도들을 통해 상업 갤러리가 공공 분야에 기여할 수 영역이 넓다는 것을 입증하고, 행사에 참여한 각각의 갤러리가 개별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구조를 형성하여 미술 시장의 자생력을 강화하고 있다. 행사에 참여하는 다양한 관계자와 대중들의 이동으로 지역 기반 관광 및 문화경제 활성화에도 이바지하고 있다. 정부주도의 하향식 행사가 아닌, 민간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상향식 문화 행사가 공공과 시장을 아우르는 영향력을 지니는 점이 주목할 만한 사례다.
**DCMS(The Department For Culture Media&Sport)라고 하며, 흔히 김대중 정부의 “팔길이 원칙” 모델을 최초로 제시한 것으로 알려진 영국예술의회(Art Council England)와는 다른 조직이다.
다가오는 한국의 미술행사, 대한민국 미술축제
한국에도 다가오는 9월 LGW와 유사한 미술축제가 열린다. 바로 “대한민국 미술축제”다. 2015년부터 운영되었으며 2023년까지는 “미술주간”이라는 이름으로 문체부가 주최하여 예산과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예술경영지원센터가 주관을 담당하여 실질적인 운영을 총괄했다. 프리즈 서울 및 해외 갤러리들의 국내 지점 입점으로 인한 국내 미술산업 규모가 확장과 지난해부터 시행된 미술진흥법을 계기로 2024년부터 국내의 아트페어, 비엔날레, 갤러리, 미술관과 다함께 연계한 “대한민국 미술 축제”로 규모를 확대한 듯하다.
2024 대한민국 미술축제 포스터.
출처: 예술경영지원센터 2024 대한민국 미술축제 소개 자료
행사는 약 한달 간 진행되며 서울을 비롯한 다양한 도시에서 미술관 및 박물관 입장 할인과 무료 미술 투어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LGW에서 영국과 해외 큐레이터들의 행사 방문을 지원하듯 해외 미술계 인사들을 국내 작가들에게 소개하는 자리도 마련할 예정이라고 한다. 특히, 9월 초에는 프리즈 서울로 인해 많은 해외 컬렉터들도 한국을 방문하기에 이 시기에는 갤러리에서도 양질의 전시와 오프닝 행사를 개최할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의 블로그에 방문하면 2025년 대한민국 미술축제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가장 매력적인 혜택은 아시아프, 키아프, 프리즈, 광주디자인비엔날레 등 전국의 아트페어와 비엔날레의 할인 입장권을 6월 16일부터 한정수량 판매한다는 점이었다. 특히 프리즈의 티켓은 가격대가 높으므로 방문을 계획중이라면 꼭 예매하기를 바란다.
LGW와 대한민국 미술축제는 자금 조달 방식과 협업 구조가 다르지만 두 행사 모두 국내외 전문가 네트워크 강화, 대중의 미술 참여 확대를 목표로 미술계의 생태계를 강화하는 목표를 지니고 있다. 미술을 공부하고 애호하는 입장에서 이러한 행사들을 계기로 미술계에 새로운 협업과 비즈니스가 많이 생기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