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인사이트에 글을 기고하기 시작한 것도 1년이 되었다. 글쓰기의 즐거움도 느꼈고 이따금은 진저리나는 괴로움도 느낀 시간이었다. 그간 기고한 43편의 목록을 내려다보며 끝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단 하나 자신할 수 있는 것은 그것 가운데 거짓된 글은 없다는 것이다. 전하려 의도했던 것이 모호해져버린 글도, 이제 와보니 너무도 투박한 글도 있지만 모든 글은 어떠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는 설렘에서 시작되었다. 거짓된 문장을 적지 않으려 전전긍긍한 것만큼은 약속할 수 있다.
그러므로 43편의 글에는 나의 역사가 담겨있다. 지금의 나에게 여전히 유효한 생각도 있고, 순간적으로 옳다고 떠오른 생각도 있다. 그것이 주제가 되어 글이 세워졌는데, 가운데 유난히 여러 번 등장했던 주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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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의 탄생, 그때 그 사람> - 화가의 삶과 그림, 그리고 우리의 인생에 대하여]
이 도서는 화가 별로 목차가 나뉘어있어 그들의 생애와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그전까지 제대로 된 미술책을 읽어본 적은 없었다. 빈센트 반 고흐가 귀를 절단했다는 유명한 일화는 알고 있었지만 그림에도 관심이 적던 나로서는 그들의 삶을 알아볼 관심도 없었다.
책 속 화가들의 생애는 참혹했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아주 평탄한 인생을 산 화가의 이야기는 드물게 떠오른다. 그들의 주위는 늘 어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정 내 불화, 가난, 배신, 실연, 외로움, 비난으로 인해 내면세계에는 여러 겹으로 쌓인 상흔이 남아 있었다.
한 인간으로서 목적과 대의 없이 살아가라 해도 어려울 상황에, 예술가로서 자기에게 씌워진 어둠이 어렵지 않았을까. 그 고통을 견디면서 삶을 주제로 하는 예술을 어떻게 마주할 수 있었을까. 그냥 매일매일 현상 유지하듯 살아가는 삶도 버겁게 느껴졌던 나로서는, 그 어려움을 모두 견디며 끝끝내 삶을 살아가며 작품을 만들어낸 그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해 보였다.
존댓말까지 써가며 형태도 없는 대상을 향해 담담한 어조로 써 내려간 글 속에서 나는 여러 차례 삶의 어려움을 토로했으나 분명히 그것을 극복하고 싶어 했다. 인간에게 주어진 복합적인 어려움과 기쁨을 견디며, 극복하고 마침내 무언가를 이루어내며 살기를 꿈꾸었다. 지금 보아도 믿을 수 없는 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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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라인 피드백 모임 – 좋아하는 사람들은 반짝인다]
문장 한 줄 쓰기도 무서웠을 때 사람들을 만났다. 자책과 아쉬움 때문에 글쓰기를 괴로운 것으로 만들었던 나와 다르게, 그들은 글쓰기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처음에는 윗글의 주제를 ‘글쓰기’로 설정하려 했다. 그러나 대화하며 적어둔 쪽지를 보고 나서, ‘좋아하는 마음’으로 글을 써보자고 결심했다.
이따금 사람들은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갖는지 잊어버리곤 한다. 좋아한다는 마음은 순수한 것이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관심을 기울이고, 비이성적인 감정 변화를 허락할 정도로 마음을 내어주고, 때때로 한탄 어린 푸념을 한다는 것은 가장 진실된 마음이다. 자신에게 솔직한 표현을 허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려움이 있어도 좋아하기를 멈출 수 없는 마음은 더더욱 위대하다. 글쓰기가 마냥 쉽다면 완성된 글을 보고 이렇게나 대단하다 생각할 일도 없을 것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계속 마주해가며 글을 완성해가는 과정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생경한 감탄을 느꼈다. 아직도 그 마음을 찾지 못해서 방황하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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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 전후, 그리고 글을 쓰던 중에도 가장 많이 고심했던 글이다. 처음에 영화를 보고서는 ‘악한 집단과 선한 개인의 대립’을 주제로 쓰겠노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 동안 드문드문 떠오른 문장들은 다른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선(善)이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달성하냐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는 기준은 명료하다. 한순간의 잘못으로 악인으로 전락한다는 것은 당연한 처사일 것이다. 그렇지만 한 순간 청렴하지 못했다 하여 인간이 선인이 아닐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는 결론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영화 속 게르트 비즐러에게 선인(Die Sonate vom ‘guten Menschen’)이란 칭호가 허락되었듯, 노력하는 인간은 마땅히 선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마침 가장 중요한 문장에서 단어 선택 실수를 해버린 탓에 아쉬웠으니, 여기서 다시 한번 선언하자. “인간은 영원히 완벽한 선에 도달할 수는 없으나, 언제나 선으로 나아가는 과정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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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생각해보고 싶다. 나는 43편의 이야기를 꾸역꾸역 써오면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주제는 명료하다. 나는 불완전한 인간이 불가능한 완전에 도달하고자 치열히 노력하는 열정을 주목하고 싶었다.
치열히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주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노력한다고 노력하고, 좋아한다고 좇아갔고, 견디기 어려워도 해내려고 노력했지만 의지는 미약했다. 쉽게 그만두었고 쉬었고 포기하고 싶었다. 목표는 고고(孤高)한데 과정은 미치질 못하니 괴로웠다. 삶이 여러 측면에서 부족함을 마주하는 과정이라면, 글쓰기에 대한 것이 가장 크게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이제야 ‘노력하는 인간’을 향한 꾸준한 의지를 되돌아보며 느끼고 있다. 왜 나는 그만두지 않았을까, 계속 쓰려고 노력해왔던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이것도 이제는 명료하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노력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 재차 노력하고 싶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