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폭정으로 고통받는 나라, 사라. 이곳의 수도 소라울에는 왕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쥐 죽은 듯 사는 왕의 형 영유과 그의 딸 영윤해가 살고 있다. 아버지의 강요 아닌 강요로 잔혹한 종마금과 원치 않는 혼인을 하게 된 영윤해는 약혼자 종마금이 자신을 죽여 혼담을 없던 일로 만들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그로 인해 종마금에게 살해당하기 직전, 알 수 없는 목소리에 각성한 영윤해는 마법으로 커다란 곰개를 소환하여 종마금을 처단한다.
허나 이 일을 계기로 종마금 집안에 원한을 산 영윤해는 왕명에 따라 북방의 국경 지역인 술름으로 유배와도 같은 원정을 떠난다. 그곳에서 만난 다르나킨이라는 유능한 기병의 도움으로 차츰 국경 생활에 적응하던 영윤해는 국경 밖 초원에 우뚝 선 인공물 거문담을 맞닥뜨리며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그러던 어느 날, 술름으로 찾아온 옛 약혼자 은난조로부터 ‘1021’이라는 숫자를 알게 된 그녀는 그 숫자가 자신과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배명훈 작가가 데뷔 20주년을 맞아 새로운 소설로 우리 곁에 돌아왔다. <미래과거시제>, <청혼>에 이어 이번 신작까지. 의도하진 않았으나 그의 책을 리뷰하는 건 벌써 세 번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세계에 이미 매료되어 있었나 보다. 마지막 장을 넘긴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건만, 벌써 그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1. 독창적인 한국형 판타지
사실 판타지는 어려운 장르다. 마법, 이종족 등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다루는 만큼 현실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 보이지만, 그로 인한 공백은 온전히 작가의 상상력으로만 채워야 한다. 그렇기에 성공한 판타지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이야기를 잘 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야기를 쓰는 것을 집을 짓는 일에 비유하자면, 다른 장르들과 달리 SF와 판타지는 집을 지을 터를 고르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쉽게 말해 이야기가 발을 딛고 있는 세계가 먼저 매력적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기병과 마법사>는 어떠할까. 줄거리에서 소개했듯 이야기의 무대는 ‘사라’라는 가상의 국가다. 이 이름은 아마도 ‘신라’에서 따왔을 것이다. 도읍인 ‘소라울’은 ‘서울’과 ‘서라벌’을 합친 지명으로 보인다. 사라의 백성들은 온돌집을 짓고, 북쪽 국경에는 드넓은 초원과 마목인(유목민족)이 살고 있다는 묘사로 보아 지역은 한반도 북쪽 어디쯤을 모티브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판타지 소설들이 서양의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삼는 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차별화된 행보다. 그렇다고 해서 동양의 무협지 세계관을 따라가지도 않는다. ‘전우치’ 같은 도사들이 활약하는 것도 아니다. ‘마법사’의 존재를 통해 판타지 소설로서 장르적 클리셰를 챙기면서도, 서양의 중세 배경 판타지의 또다른 마스코트라 할 수 있는 기사는 우리 문화권의 ‘기병’으로 재탄생시켰다. 지극히 한국적이면서도,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배명훈 작가만의 독창적인 세계관이다.
2. 농부의 성실함으로 쓴 소설
물론 독창적이라고 해서 꼭 그 소설이 훌륭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 뒤에 준비된 이야기가 엉성하다면 독자는 금방 떠나 버릴 테니. 그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기병과 마법사>가 거둔 성과는 탁월하다. 마치 농부가 쓴 소설 같다. 세계를 일구는 솜씨부터 전장의 수싸움을 치밀하게 그려내는 면모가 성실함을 넘어 집요하기까지 하다(실제로 배명훈 작가는 이를 위해 수많은 사료와 군사학 논문을 참고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그 정점이 바로 소설 속에서 펼쳐지는 ‘전투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술름으로 온 후, 영윤해는 세 번의 큰 전투를 치렀다. 처음엔 마목인 추장인 토르가이와, 그다음엔 소라울의 토벌군과, 마지막엔 위요제(칸)와 더불어 그녀를 술름으로 불러들인 흑막과도 싸웠다. 단순히 누구를 베고, 쓰러뜨리는 것을 넘어 진(陣)의 배치와 전술, 두 개의 거대한 덩어리가 어떻게 움직이고 부닥치는지까지 빼곡히 그려내는데, 어찌나 생생한지 활자 너머로 그 난잡한 전투 현장이 또렷하게 상영되었다.
“다르나킨은 상대 보병 진영 일선의 맨 오른쪽 밀집대형 가까이로 말을 몰았다. 좌기대에 따로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다들 알아서 그 뒤를 따랐다.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가까이. 화살 사정거리 안까지 다가가자, 다르나킨은 밀집한 창병을 향해 화살을 쏘아댔다. 별다른 명령은 내리지 않았지만, 대략 5백 기의 좌기대가 그를 똑같이 따라 했다. 간격을 좁힌 채 돌격에 대비하던 적 보병은 화살 공격을 맞고도 대열을 넓히지 않았다” (66p)
“동쪽에서 북소리가 울리자 토르가이의 창병이 서서히 전진했다. 손에 든 창은 길이가 사람 키의 두 배였다. 한 줄에 열다섯 명씩 여덟 겹으로 선 창병 일선이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다가왔다. 좌우로 길게 늘어선 네모와 네모 사이에는 빈틈이 있었는데, 그 사이로 창병을 뒤따르는 이선 기병이 보였다…….창병이 술름군 보사대의 사정거리 안쪽까지 진격하자 대영솔의 가마 오른편에서 사격을 알리는 휘가 올랐다. 때를 맞춰 한꺼번에 쏘는 일제사격이었다. 두 차례의 파도가 서에서 동으로 몰아쳤다. 그래도 토르가이의 창병은 파도가 닿는 순간에만 잠깐 움찔했을 뿐 진군을 멈추지 않았다.” (115~116p)
“다음 휘가 올라갔다. 나팔 소리가 들렸다. 토르가이의 병력은 모두 전선에 붙들려 있었다. 궤멸당한 우측면을 뺀 모두가 전선을 밀어내는 데 투입되어 있었다……그 순간 사라의 중장기병이 속도를 높였다. 창을 수직으로 들고 돌격 속도로 질주해 왔다. 정예 중장기병의 일격에 정향 마목인 군대의 우측 대열이 확실히 무너졌다. 무너진 곳은 술름의 보창대가 에워싸 정리했다.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차례차례, 토르가이의 그 악명 높은 창병의 숲이 착착 쓰러졌다.” (125~126p)
3. 가장 근원적인 판타지
판타지 세계의 질료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뭐가 됐든 일단 믿지 않고서는 이 기상천외한 세계에 몰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가장 근원적인 판타지라고 할 수 있다.
<기병과 마법사>는 그런 믿음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 안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믿는 쪽과 믿지 않는 쪽. 후자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영윤해의 숙부이자 폭군인 ‘영위’다. 영위는 자신의 형보다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로 인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자신을 믿지 못했고, 자기 자리를 빼앗길까 늘 전전긍긍했다. 오죽하면 신하들을 안심시킨 후 제거하기 위해 12년 간 성군 흉내를 냈을 정도였다. 결국 영위는 스스로가 불러온 불신과 불안의 지옥에 갇혀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영윤해의 옛 약혼자이자 조력자인 은난조도 굳이 따지자면 믿지 않는 쪽이었다. 숫자 ‘1021’과 거문담에 얽힌 미스터리를 파헤치느라 술름에 머물던 은난조는 자신이 영윤해를 연모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나 그는 자신의 감정을 믿지 않았다. 그 감정이 영윤해가 부린 마법 때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물론 그녀는 그런 마법을 부리지 않았다. 애초에 부릴 줄도 몰랐다).
한편 반대편에는 대표적인 인물로 다르나킨이 있다. 다르나킨은 소설 속에서 영윤해의 행보를 처음부터 지지하고 믿어주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물론 그도 잠깐이나마 영윤해를 의심한 적은 있었다. 세상을 파괴하는 짐승이 돌아오는 걸 막으려는 그녀의 마법이 실은 짐승을 불러오는 주술은 아닐까 하고.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그녀에 대한 믿음을 회복한 다르나킨은 마지막까지 영윤해와 함께 하기를 결심했고, 결말에 이르러 그 믿음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
주인공인 영윤해 역시 믿는 쪽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술름에 온 후, 세상을 지켜야 하는 예언자로서의 책임을 깨달은 영윤해는 꿈속에서 마법을 연마했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기약 없이 이어지는 수련에 영윤해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오죽하면 자신이 정말 예언자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럴 때마다 꿈속에서 만난 야만족 예언자 ‘마로하’는 그녀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도록 달랬다. 그리고 그 믿음은 끝내 그녀 자신만의 마법으로 실현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영윤해 본인으로부터 시작된 이 믿음이 등불처럼 조금씩 번져 나갔다는 것이다. 처음엔 다르나킨을, 그다음엔 지주인 한채주를 끌어들였다. 술름의 유력 가문인 채가, 동가와도 다리를 놓았다. 술름 밖에서 활동하는 마목인들과 거상 하살루타와도 손을 잡았다.
이중 가장 극적인 순간은 위요제(칸)의 마음을 사는 장면이다. 처음 위요제는 영윤해를 의심했다. 초원의 풀들이 불길한 모양을 그리며, 그 중심으로 영윤해의 거처를 지목했기 때문이다(다르나킨이 잠깐이나만 영윤해를 의심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허나 세상을 파괴하는 짐승이 마침내 제모습을 드러낸 순간, 위요제는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윤해를 향해 겨누었던 창을 내려놓고, 군사들을 몰아 술름군의 대열에 합류했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서로를 향해 전의를 불태우던 이들이 거대한 악의에 맞서 한 편이 되는 이 모습은 배명훈 작가의 다른 소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소설 <청혼>에서 궤도연합군을 이끄는 데 나다 장군은 사령부로부터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시달렸다. 오죽하면 사령부가 파견한 감찰군은 외계함대와 전투를 벌이는 순간에도 데 나다 장군의 기함을 조준하고 있었다. 하지만 데 나다 장군은 기가 막힌 전술로 자신을 겨누고 있던 감찰군의 칼끝을 적을 향해 돌렸다. 그것도 모자라 감찰군을 선봉 삼아 적과 맹렬한 전투를 벌였다. 허나 그것이 곧 데 나다 장군이 신뢰가 회복됐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자신을 향한 불신을 이용했을 뿐이었다.
그에 반해 영윤해는 자신을 향한 위요제의 의심을 진짜 믿음으로 탈바꿈했다. 단지 눈앞에 세상을 파괴하는 짐승이 등장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앞에서 알 수 있듯 영윤해의 행보는 늘 그런 식이었다. 자신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믿음을 주어야 했다. 한채주에게는 성주 자리를 약속을 했고, 하살루타와는 시장의 독점권을 두고 거래했다. 한때 토르가이를 따랐던 마목인들이 술름군에 합류했던 건 그녀가 연마하던 마법을 실제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위요제의 합류도 그러한 일들의 연장선이었다. 이렇듯 영윤해 본인에게서 시작해 꼬리를 물고 이어진 믿음의 연대는 초원을 하나로 묶었다. 나아가 위기가 마지막으로 고조된 순간, 아주 특별한 힘을 발휘했다.
4. 너를 구하는 마법
“그럼 너를 구해.” 종마금에게 살해당하기 직전, 꿈속의 마로하가 영윤해에게 전한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스스로를 구하라는 건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이제는 그 의미를 알 것 같다.
초원의 기적을 만든, 이 믿음의 연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아주 작고 작은 존재가 제모습을 드러낸다. 마로하의 응원이 아니었다면 언제든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았을 영윤해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주었던 믿음과 달리 이것은 어떠한 약속도, 거래도, 근거도 없다. 이 믿음을 지탱하는 건 오로지 영윤해 본인의 의지뿐이다.
그렇기에 영윤해의 믿음은 소설 속 등장하는 모든 존재를 통틀어 가장 연약했다. 하지만 그 믿음이 결국 그녀 자신을 구했고, 그녀의 세상을 구했다. “너는 제일 약한 고리지만, 그래도 제일 특별한 고리야.” 마로하가 이런 말을 했던 것도 괜한 이유는 아니었던 셈이다.
세상에 불안이 차오르면 타인에 대한 믿음도 옅어진다. 이런 시대에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만 믿고 챙길 것 같지만, 오히려 그런 시대일수록 스스로를 놓아버리는 사람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런 의미에서 그동안 우리가 순서를 잘못 생각하고 있었나 싶은 요즘이다. 사실 세상이 불안해진 것도 우리가 스스로를 믿지 못해서였던 걸까. 자기 자신조차 믿지 못하니 다른 사람도 믿지 못하게 된 걸까.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마법이 필요한 순간이다. 너를 구하는 마법. 나아가 우리 모두를 구하는 마법. 모든 판타지의 근원이기도 한 그 마법은 잔뜩 웅크린 채 지금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제일 약한 고리지만, 그래도 제일 특별한 고리인 우리 자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