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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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근미래의 도쿄라지만 12월의 한국 같고 2018년의 고등학교 같으며 내일의 도시 같다. 단순히 청춘영화로 읽히지만은 않는다. 지나가 버린 추억이라기엔 이 시대와 너무나 유관한 이야기기에 그렇다. <해피엔드>는 과거의 향수에 취하는 대신 미래의 청춘이라는 도구로 현재의 우리를 흔든다.

 


흔들리기와 흔들기.jpg

 

 

1.

온 세상이 흔들린다. 지진이 종종 찾아오고 코우는 계속 다리를 떤다. 유타는 그 모든 징조를 말없이 바라만 본다. 쿵쿵 흔들리는 물체는 그 진동을 따라 점점 멀어진다. 책상 위를 쾅쾅 두드리면 연필이 조금씩 들썩거리는 모습처럼 그렇다. 그러니까 흔들린다는 건 언제나 지금과는 다른 무언가를 약속한다. 외로운 사람에게 그런 변화란 지진 같아서, 성큼 맞이하기엔 예측 불가능하다. 끼어들기엔 무언가 변할 것만 같아 두렵다. 건드리지 않고 빠져나오는 게 최선이다.

 

흔들리는 게 싫다고 흔드는 것까지 싫은 건 아니다. 흔들리지 않고 흔들면 된다. 아무에게서도 멀어지지 않고 재미를 보면 된다. 가만히 있기엔 젊지 않은가. 그래서 유타는 흔들고 싶다. 대신 친구들과 같이 흔들고 싶다. 교장에게 골탕을 먹이고 싶고 교칙에 반항하고 싶고 테크노 클럽에 가고 싶다. 청소년에게 일탈은 유대와도 같아서 함께 반항하는 것만큼 쉽게 우정을 담보 받는 방법이 없다. 규칙에 엿 날리고 빵뎅이 흔들고 모가지로 박자 타다 보면 어깨동무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유타와 코우, 밍, 아타, 톰. 인종도 성격도 출신도 제각각인 아이들로 구성된 음악연구부도 그 결과물일 것이다.

 

하지만 흔들리는 세상과 흔들리는 시점이다. 각자의 이유로 흔들리는 그 진동을 따라 친구들은 유타로부터 둥둥둥 멀어진다. 외로운 마음에 혼자라도 클럽에 찾아갔더니 유타를 반기는 건 내진설계 건물 공사판이다. 초승달 같은 그림자를 품던 미러볼은 바닥에 처박혀 있다. 흔들리는 게 싫다고 흔드는 것까지 싫은 건 아니라니까요.

 

 

2.

어른들은 흔들리든 흔들든 위험한 건 매한가지라고 한다. 그 위협으로부터 대피할 거대한 건물을 세우자고 한다. 여러분 지진이 올 겁니다. 건물을 지어야 합니다. 다 지은 건물이 여러분을 지켜줄 것입니다. 다 지었다고? 이런. 너희는 못 들어와. 여기는 자격 있는 사람만 들어올 수 있거든.

 

땅이 꺼진다면 건물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요소가 망가지면 시스템이 무슨 기능을 한단 말인가. 지진을 막는 건 건물이 아니라 섭리고, 사회는 어쨌거나 공진하며 진보한다. 흔들리는 사람, 흔드는 사람. 이들은 어디에나 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과연 재앙인가.

 

 

3.

코우에게 유타는 건물 짓는 사람 같다. 테크노 궁전을 지어 놓고 창문은 다 닫아둔 채 그 안에서만 뛰노는 아이 같다. 그 속에서 영원히 함께하기엔 코우는 바깥세상과 너무 깊이 관여되어 있다. 재일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계속해서 신분을 증명해야 한다. 엄마 가게에는 비국민이라는 모욕적인 낙서가 적힌다. 밤의 길거리를 시끄럽게 한 건 유타가 튼 음악인데 의심받는 건 코우다. 흔들리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코우에겐 건물 말고 궁전 말고 나라가 필요하다. 다만 좋은 나라. 진동을 묵살하는 내진설계 아파트 말고 함께 흔들려 줄 나라. 마음 맞는 친구들과 일궈낸 동아리방을 일방적으로 파괴하지 않는 나라. 24시간 내내 감시하는 대신 한명 한명 들여다봐 주는 나라. 일본인이라기엔 한국인 같고 한국인이라기엔 일본인 같은 코우까지도 국민으로 삼아 오래오래 지켜줄 나라. 이방인을 내쫓지 않는 나라. 어쩌면 국적을 부여하지 않는 나라. 그런 민주적이고 포용적인 공동체.

 

코우의 작은 나라, 즉 학교는 그 정반대다. 흔들림 없이 편안해야 해서 모든 일을 학생들 모르게 진행한다. 그 과정에서 배제되는 아이들이 생겨나도 개의치 않는다. 24시간 AI 감시 시스템을 도입할 때도, 음악연구부 동아리방을 폐쇄할 때도, 시위에 나간 담임선생님을 휴직시킬 때도 그렇다. 학생들은 어떠한 전조현상 없이 찾아온 모든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AI 감시 시스템을 비롯한 은밀한 억압은 2025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아서 관객 역시 학생들 사이에 앉아 그 변화를 소화해 내야 한다. 거북함을 체험한 우리는 근미래를 앞둔 현시대가 섬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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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궁전을 빠져나왔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기웃거리기만 하던 코우는 동급생 후미의 시위대 속으로 진입한다. 그러면서 어떠한 해방을 느꼈을 것이다. 손잡고 옳은 방향으로 나란히 전진하는 작은 나라가 정말 있구나. 그 나라에 속하기 시작하면서 코우가 유타의 안락한 궁전을 더욱 비관하는 건 당연해 보인다. 세상의 진동을 모르는 체하며 흔들리지 않으려 애쓰는 유타. 음악에 몸을 묻고 흔들기만 하는 유타. 그런 유타가 코우는 비겁해 보였을 테지만 유타 없었을 코우를 상상해 보면 그렇지 않다. 회식 자리에서 저항가요를 나눠 부르는 시위대 동지들을 보며 웃기만 하던 코우가 교장실을 점거하는 친구들 앞에서 노래를 선창했다. 농성에 성공하고도 마음껏 기뻐하지 못하는 후미에게 즐기는 것도 중요하다고 일깨워 주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코우 역시 흔드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알기 때문일 것이다. 성대를 흔들며 노래하고, 고개를 흔들며 춤추며, 어깨를 흔들며 웃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지 알기 때문일 것이다. 유타와 쌓아온 반항과 유흥의 추억이 코우를 얼마나 충만하게 만들었는지 알기 때문일 것이다. 기분 좋은 게 이상한 세상이라지만 그럼에도 미소와 테크노는 필요하다. 실없이 웃는 유타가 필요하다. 흔들 줄 아는 재치가 필요하다.

 

 

5.

소싯적 엉덩이 좀 흔들어 봤다면 알 것이다. 흔들리지 않고 흔드는 방법은 없다는 것을. 하체가 흔들리지 않고는 엉덩이를 흔들 수 없고 상체가 흔들리지 않고는 고개를 흔들 수 없다. 누구보다 열심히 흔드는 유타가 그것을 모를 리 없다. 궁전 속에서 리듬 타던 유타가 흔든 건 엉덩이나 고개뿐만이 아님을, 그 반동으로 코우와의 관계 역시 흔들리고 있음을 유타는 알기보다 느낀다.

 

그렇기에 감시 시스템을 철회하려면 교장을 골탕 먹인 범인이 자수해야 한다는 교장의 말에 유타는 흔쾌히 흔들려준다. 늘 그랬듯 장난스러운 말투로 쿨하게 자백한다. 공범인 코우가 장학금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기에 함께 자수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선언한다. 코우의 눈을 바라보지만 대답을 재촉하지 않는다. 유타의 선택은 침묵한 코우에게 죄책감을 얹어줄 테지만 코우의 상황을 안다면 유타도 그 누구도 코우를 원망할 수만은 없다.

 

그럼에도 신경 쓰이는 것은 코우만은 코우를 비난할 것이라는 가능성이다. 장학금을 받아 놓고도 멍하니 앉아 있는 코우의 어깨에는 무력함이 들러붙어 있다. 구조를 흔들려는 코우가 구조 밑에 깔려 있다는 한계를 짚고 넘어가는 장면은 잔인하지만 현실이다. 다만 영화는 절망을 적나라하게 비추면서도 냉소에 빠지지 않는다. 코우가 영영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또 한 번 유타를 파견한다. 유타의 응답은 이번에도 유타답다. 머뭇거리는 코우에게 다가가 유쾌히 젖꼭지를 꼬집는다.

 

흔들리는 주파수와 흔드는 주파수가 만나는 그 순간 움직임은 멈추고 진동만 남는다. 찰나의 순간을 정지된 화면으로 붙잡아 두는 연출 덕에, 우리는 유타의 움직임이 그저 스쳐 지나갈 우스운 장난으로만 읽히진 않는다. 짧은 순간 이후에 둘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헤어지지만 아무래도 좋다. 유타가 건넨 농담과 장난과 재미로 무장한 사랑의 진동은 고스란히 코우에게 전달되어서 코우가 또 다른 코우에게 또 언젠가의 유타에게 손 내미는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이 믿음이 유타의 희생에서 온다는 점은 어딘가 찝찝하기도 하지만, 유타와 코우 사이에 피어나는 건 어쨌거나 희망의 형태다. 그것은 여진이 되어서 유타와 코우는, 또 우리는, 현재는, 미래는 잔잔히 흔들릴 것이다.

 

 

6.

영화는 다분히 현재적이지만 고등학생을 지나온 나는 그대로 과거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음악연구부 아이들과 동갑이던 시절의 나는 왜 그토록 괴로워야 했을까. 교무실에서 모욕을 감당하던 내 앞에 담임이 아니라 코우네 담임선생님이 있었더라면. 옥상 문을 잠그고 테라스를 감시하고 담장을 높이던 그 학교 대신, 유타네 악기상점이 있었더라면. 대자보를 써 붙이던 친구가 무섭다고 울었을 때, 내가 후미 옆 코우처럼 더 직접적으로 행동해 줬더라면. 혹은 유타처럼 계속 사랑한다고 말해줬더라면. 그랬다면 나는 좀 더 아프지 않고 어른이 될 수 있었을까. 흔들리되 상처받지 않고, 흔들되 당당할 수 있었을까.

 

아쉬운 건 이 모든 물음은 근미래의 시점이 아니라는 것. 과거형이라 무력한 가정에 그친다는 것. 나는 이미 20대 중반에 와버렸고 회복하지 못한 고등학생의 나만이 이렇게 뻐끔댈 뿐이다. 그게 너무 아쉬워서, 러닝타임 동안엔 듬성듬성 울먹였지만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면서는 오열했다. 그러면서 조금 회복된 나를 마주했다. 엉엉 울면서 시작되는 회복도 있는 것이다. 나 이런 영화가 필요했구나. 다 지나쳐 온 시간도 이만큼 위로받을 수 있구나.

 

미래가 과거를 쓰다듬고 결국엔 현재를 응원하는 경험은 생소하다. 이 낯선 경험을 위해 나는 몇 번이고 이 영화에 마음을 맡긴 채 흔들릴 것 같다.

 

 

7.

개인적인 경험을 배제하고도 <해피엔드>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영화다. 모두가 건물을 세우며 꼭꼭 숨거나 숨기는 시대지 않은가. 그 단단한 혐오를 <해피엔드>는 조용히 흔들고 있다.

 

반쯤 미국인인 톰과 반쯤 대만인 밍, 치마 바지를 입는 아타, 재일 한국인 코우, 그리고 정상성에 속하면서도 ‘비정상’ 친구들 옆에 서는 유타까지. 들쑥날쑥해 보이는 아이들을 품에 안은 근미래의 도쿄는 현재를 향해 뒤돌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표정은 분명 순간이지만 행복의 얼굴이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정말이지 마음속 무언가가 흔들린다. 무언가 변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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