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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고도를 기다리며>는 두 명의 방랑자가 끊임없이 '고도'를 기다리는 이야기이다. 그들은 황량한 길가에서 고도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낸다. 실없는 대화와 농담, 사소한 행동들을 반복하며 고도를 기다리지만 고도는 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전령 역할의 소년만이 등장해 "내일은 고도 씨가 꼭 올 것"이라는 기약 없는 약속만을 남긴다.


고도가 누구인지, 왜 두 주인공이 고도를 기다리는지는 결코 나오지 않는다. 희곡을 쓴 사무엘 베케트 역시 고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알았다면 작품에 썼을 것"이라며, 애초에 명확한 정답이 없다는 듯 말했다. 관객은 극이 끝날 무렵 자신만의 답, 자신만의 고도를 상상하게 된다. 일종의 열린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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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파크컴퍼니

 

 

 

오지 않아도 기다리고 싶은 존재


 

고도는 무엇일까? 누구에게는 신, 누구에게는 자유다. 어떤 이들은 작품 속 십자가 언급을 들어 고도가 신일 것이라 짐작하고, 또 어떤 이는 늘 무대 위에 있는 나무나 그에 돋아난 새싹에서 고도를 읽는다. 그러나 중요한 건 고도의 정체보다, '고도를 기다린다'는 행위 자체일 것이다.


극 중 두 주인공들은 기다림이라는 '노동'에 매여 있다. 고도를 기다린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하루 종일 한곳에 머문다. 그러나 그들은 고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심지어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 자체를 종종 잊기도 한다. 노동은 목적을 잃어버리는 순간 무의미해진다. 기다림의 시간 속, 주인공들은 ‘포조’와 그의 노예 ‘럭키’를 마주친다. 포조는 럭키에게 줄을 매고, 럭키는 주인을 끌고 간다. 이 기묘한 구조는 오늘날 빠르게 발달하는 기술과 인간의 관계를 닮았다. 특히 럭키가 잠시 '생각하는 모자'를 쓰고 갑자기 온갖 말을 퍼부으며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가지려 할 때는 그 누구도 럭키를 통제하지 못한다. 인공지능이 우리의 말을 듣지 않는 끔찍한 미래처럼 보인다. 기술에 의존한 인간은 이를 통제하지 못할 때 노동에서 소외된다.


그러니 고도를 단순히 노동 끝의 성과나 보상으로 생각해 보면, 기다림은 기약 없는 도박이 된다. 우리는 고도를 기다리는 걸까, 고도를 만난 후의 나를 기다리는 걸까? 인간은 시공간의 공백을 느끼는 순간 본능적으로 불안을 느낀다. 그리고 이 공백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에게 무언가를 기다리자고 족쇄를 채운다. 그래서 나는 고도를 '미래에 올 존재'가 아니라, 극중 무대 위의 나무처럼 늘 존재해왔으나 인식되지 않은 무엇으로 상상해 보고 싶었다.


연극을 보면서 문득 한 배우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그는 신인 시절 늘 '붉은 악마'와 함께였다고 말했다. ‘붉은 악마‘는 수많은 붉은 의자, 즉 텅 빈 객석을 뜻한다. 그래도 그는 그 시절이 너무 행복했다며 인터뷰를 이어갔다. 물론 더 많은 관객들을 만나고 싶지만 그 기다림조차 충만한 것이다. 마치 어린 왕자를 기다리는 여우처럼 말이다.


그러니, 이 극에서 '고도'는 바로 '관객'일지도 모른다. 관객이 오지 않아도 공연을 올릴 배우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꽤나 일리 있는 답이지 않은가? 무대 위 배우에게는 관객이, 작가에겐 독자가, 마케터에겐 고객이 고도일 수 있다. 성과가 당장 보이지 않아도, 도리어 그 기다림이 존재 자체를 만든다. 극이 끝날 때까지 고도는 영원히 도착하지 않지만,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극은 고도를 기다리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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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파크컴퍼니

 

 


무엇인지 몰라도 기다리는 힘


 

문제는 고도에 대해 잘 모를 때다. 두 주인공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 막연함을 견뎌내는 두 주인공의 각자 다른 기다림의 태도 역시 주목할만하다. 물론 둘 다 고도를 함께 기다리기는 하지만, 둘의 태도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상대적으로 에스트라공(고고)은 고도를 기다리지 말고 '갈 때가 되었다'라고 자주 말한다. 블라디미르(디디)는 어쨌든 고도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낙관론자이다.


디디는 상대적으로 더 에너지가 있어 보이지만, 감정 기복이 좀 더 크다. 반면 늘 어딘가에서 얻어맞으며 등장하는 고고는 은근히 더 울적해 보인다. 그리고 고고는 왠지 고도가 와도, 오지 않아도 상관없어 보인다. 그에게는 '기다림'보다 '휴식'이나 '종결'이 더 중요한 가치처럼 보인다.


그들은 기다리다 지쳐 나무에 목을 매면 어떨까 얘기를 나누기도 한다. 섬뜩한 얘기로 들리지만 결국 이런저런 핑계를 대다가 대화의 목적을 또 잃고 마는 웃픈 대화로 흘러간다. 극이 마무리될 무렵 어느덧 둘은 고도가 오지 않을 것임을 인정한다. 두 주인공은 드디어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다만 무대에서 완전히 퇴장하지 않고, “가자”를 외치는 순간 둘의 모습이 정지되며 끝난다. 그래서 그들이 완전히 떠났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관객의 몫이다.


"가자."

"안 돼."

"왜?"

"고도를 기다려야지."

"아, 그렇지!"


작품에서는 이 말이 가장 많이 반복된다. 우리가 무언가를 결심할 때 안에서 벌어지는 내적 갈등처럼 들린다. 그들은 또 똑같은 대화를 반복했을까, 아니면 정말로 다른 곳으로 향했을까? 나는 그들이 왠지 다른 곳으로 드디어 발걸음을 옮겨, 고고가 바랬던 잠을 오랜 시간 잤을 것 같다. 디디는 조금 더 활달하게 지내다가 고고처럼 잠을 청했을 것 같다. 사람이라면 모두가 바라는 편안한 휴식 말이다.


사람은 삶에는 이유와 목적이 있다고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믿음이 있는 자는 결국 더 실망하는 자이기도 하다. 실망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그래서 무언가를 믿거나 기대하기를 거부하는지도 모른다. 둘 중 어느 기다림의 태도가 버티기 더 수월할지는 모르겠다. 믿는 자는 더 실망하지만, 믿지 않는 자는 고독하니까. 다만 이 무한한 기다림 속 두 주인공은 이따금씩 서로에게 잠시 위안을 얻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두 주인공이 서로를 향해 "이리 와, 내가 안아줄게"라고 말하는 장면들은 어느 쪽이든 고된 기다림을 이따금씩 견딜 수 있게 하는 것이 결국 연대와 공감임을 보여준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사무엘 베케트의 대표 희곡이자 '부조리극'의 대명사인 작품이다. 삶은 '목적이 없어도' 살아볼 만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일깨워 주는 작품이다. 2025년 한국 공연은 극만큼이나 많은 사랑을 받아온 두 거장, 신구 배우와 박근형 배우의 마지막 호흡이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했다. 다음 번 이 작품을 볼 때의 나는 어떤 고도를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하다. 오지 않아도 내가 기꺼이 기다릴 그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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