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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 오면 한국은 언제나 깊은 슬픔을 상기시킨다. 꽃 피는 계절, 웃음소리가 번지기 좋은 봄날이지만, 대한민국의 역사 속 5월은 그렇지 못했다. 언제나처럼 일상을 만끽하던 어느 봄날은 순식간에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날의 ‘춘래원’도 마찬가지였다.


광주에 위치한 작은 중국집 춘래원은 그 당시의 ‘평범함’을 응축한 공간이었다. 짜장면 한 그릇이 팔릴 때마다 행복하게 웃으며 피가 섞인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이 한 지붕 아래서 밥을 나눠먹고 삶의 목표를 이야기하며 서로의 등을 기대던 작고 따뜻한 집었다. 겉으로는 티격태격하기도 하고 가끔은 격렬하게 다투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웃음이 스며들던 춘래원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우리의 보금자리'일 것이다. 그 당시 모든 대한민국의 사람들이 그러했듯 사람 사는 냄새와 삶의 온도가 느껴지는 장소였다.


춘래원을 구성하는 인물은 총 다섯이다. 겉으로는 퉁명스럽고 무뚝뚝하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가족을 생각했던 주인 신작로, 한쪽 다리를 저는 장애가 있지만 꿋꿋하게, 애교스럽게 삶을 개척하던 그의 동생 순이, 춤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배달부 백만식,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 모두의 버팀목이자 다정한 안식처가 되어주는 다방 아가씨 오미란.

 

다섯 사람의 꿈은 크지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내는 것뿐이었다. 언젠가는 서울을 함께 구경하고, 언젠가는 결혼을 하고, 그렇게 평생 춘래원에서 계속 함께 웃고 떠들며 늙어가는 것이 그들이 그리던 미래이자, 그때까지 예정되어 있었던 미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일상은 단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무너져 내린다. '짬뽕' 한 그릇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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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짬뽕]은 "5.18 민주화운동이 짬뽕 한 그릇에서 시작되었다"라는 엉뚱하고도 기묘한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언제나처럼 손님들을 맞이하며 짜장면과 짬뽕을 준비하던 신작로는 어느 순간 탕수육까지 요청하는 큰손 고객의 주문을 받게 되고, 신나하며 고고장에 가려 준비하던 백만식의 등을 떠밀어 배달을 보낸다. 그렇게 울며 겨자 먹기로 배달을 하던 백만식은 군인들을 만나게 되는데 군인들은 배가 고프다며 짬뽕을 빼앗으려 하고, 이를 막으려던 백만식과 벌어진 실랑이는 어느새 총성과 함께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진다. 그리고 그 사건은 춘래원의 전부였던 다섯 사람의 삶에 균열을 낸다.

 

신작로는 짬뽕 한 그릇이 불러온 비극 앞에서 괴로워한다. '군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간첩 의혹'을 받게 된 순간, 그저 ‘의심’만으로도 모든 것이 증거가 되던 시대의 공포가 그를 덮친다. 그는 붉은 간판, 붉은 식탁보, 짜장면을 만들기 위한 밀가루조차도 ‘빨갱이’의 증거로 몰릴까 두려워하며 점점 망상에 사로잡히고, 결국에는 가족이라 믿었던 이를 고문 속에서 거짓 자백으로 팔아넘기게 되는 악몽에 시달린다. 그렇게 신작로의 괴로운 시간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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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동안 굳건히 무대를 지켜온 연극인 만큼, 연극 짬뽕의 모든 연출은 클래식하게 구성되어 있다. 거창하거나 화려한 장치 없이, 오래된 방식과 익숙한 구성으로 관객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특히 연극이 시작하는 순간, 실제로 관객을 무대 위로 초대해 짜장면과 짬뽕을 나눠주며 유쾌하게 안내사항을 전달하는 순간 무대는 객석까지 확장되어 배우와 관객이 함께 숨 쉬는 공간이 되고, 관객은 단순한 관람자가 아닌 ‘춘래원’의 손님이 된다.


큰 무대 장치 없이도 자연스럽게 전환되는 장면들, 무대 곳곳을 활용한 배우들의 동선, 그리고 생활감이 묻어나는 연기 속에는 20년 동안 이 무대를 지켜온 노련함이 오롯이 담겨 있다. 작은 극장 안, 무대 위를 가득 채운 배우들의 열연을 따라가다 보면 처음엔 소소한 유쾌함에 미소를 짓다가, 어느새 눈물이 앞을 가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웃음과 눈물, 허구와 현실이 뒤엉켜 피어오르는 이 무대 위에서 서로의 훌쩍임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어느새 20년 전의 봄,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된 40년 전 봄의 광주로 들어가 ‘춘래원’의 식구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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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끝내 춘래원에는 봄은 오지 않는다. 결혼을 기다리고, 서울을 기다리고, 연인을 기다리던, 말 그대로 봄을 기다리던 이들은, 그 봄의 한가운데에서 시간이 멈춰버린다. 그렇게 허망하게 남겨진 신작로의 슬픔 속에서 연극은 막을 내린다. ‘춘래원’은 그렇게 봄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시대에 휩쓸려간 이름 없는 사람들의 기록으로 남는다.

 

5.18 민주화운동의 비극을 결코 가볍게 다루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일상과 유머 속에 녹여낸 연극 [짬뽕]은 20년 넘게 무대 위를 지키며, 지금도 여전히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무엇을 잊지 않아야 하는가." 그 시절을 살지 않았던 세대에게도 이 연극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아주 작은 춘래원의 온기와, 그 안에 있었던 다섯 사람의 꿈을, 그리고 그들이 대표하는, 대한민국 수많은 이들의 멈춰버린 봄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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