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국립현대미술관과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이 공동주최한 <론 뮤익> 전시가 한 달 만에 누적 관람객 수 18만 명을 돌파했다. 일 평균 방문자 수는 무려 5000여명으로 집계되었다. 이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 이래 최고 기록이다.
나는 지난 4월 28일 해당 전시를 감상했다. 평일 낮의 방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시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특히나 젊은 관람객이 많아 전시에는 ‘줄 서는 전시’, ‘MZ들을 사로잡은 전시’ 등의 수식어가 붙었고, 소셜 미디어와 인터넷 뉴스 기사는 연일 해당 전시의 대외적 흥행을 다루었다. 나는 전시를 직접 감상하여 왜 이토록 많은 이들이 론 뮤익에 열광하는지 알고 싶었다. 론 뮤익은 누구인가? 우리는 왜 초대형 해골더미를 보기 위해 줄을 서는가?
론 뮤익 Ron Mueck은 누구인가: 그의 작품을 마주하다
<마스크 2>, 2002
이번 전시는 김영하 작가의 오디오 가이드와 함께했다. 평소 나만의 생각과 방식으로 전시를 관람하는 것을 선호해 오디오 가이드를 잘 듣지 않는 편이다. 다만 이번 전시는 론 뮤익 작가의 작품 세계에 대해 보다 깊이 알고 싶다는 마음이 컸기 때문에 가이드를 활용해보았다.
전시장에 들어선 우리가 가장 처음 마주하는 것은 뮤익의 거대한 자화상, 그의 마스크이다. 익히 아는 반가운 얼굴(?)에 친숙함을 느꼈을 감상자들도 여럿 있었을 테다. 2002년 제작된 <마스크 2>는 몇 해 전 리움에서 먼저 선보여진 바 있다. <인간, 일곱개의 질문>이라는 제목의 전시에서도 뮤익의 마스크가 전시의 시작을 알렸는데, 이번 전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뮤익의 예술세계, 필모그래피에서 마스크가 지니는 상징성, 그 위상을 알 수 있는 지점이다.
금방이라도 눈을 뜨기엔 다소 깊이 잠든 듯한 모습이긴 하지만, 숨소리가 들리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극사실주의’적인 조각이다. 하지만 비현실적으로 큰 크기와 텅 비어 있는 뒷면은 그 친숙함을 금새 낯섦으로 바꾸어 버린다. 현실과 비현실,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흔들 만큼 지극히 사실적인 형태와 표현에 집중하면서도, 그것의 확대와 축소를 통해 그 균형을 더 공고히 하는 것, 감상자가 조각을 관찰함으로써 그 너머의 이야기를 상상하게 하는 것. 이것이 뮤익의 조각이다.
<침대에서>, 2005
과거 영화와 TV 프로그램의 특수 분장, 사실적 모형 제작의 분야에 몸 담았던 뮤익은 이때의 기술적 경험을 바탕으로 이러한 정교한 예술적 표현이 깃든 조각을 만들 수 있었다. 1996년 예술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이래로 근 30년간 그의 작품 수는 총 48점에 불과하다. 뮤익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길게는 수 년의 시간이 걸린다. 그가 (진부한 표현이지만) 마치 조각에 숨을 불어넣는 피그말리온처럼, 작가 스스로 공들여 작품을 빚어내는 전통적인 수작업의 접근 방식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해부학적 디테일과 재료, 그리고 조각 속에 담긴 이야기는 감상자 개개인이 상상하는 그 너머를 따라간다는 점에서 가장 현대적이다.
‘그의 작품에는 실제 인물의 정신을 떠올리게 하는 힘이 있다.’ (RonMueck Leaflet, 2025)
한 중년의 여성이 전시장의 한 가운데서 베개를 겹쳐 베고 이불을 덮고 누워 턱을 괜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잠들기 전 내일의 중요한 일정을 가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그저 빨래가 다 되길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침대에서>는 누구나 공감할 순간, 보편적 인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뮤익의 대표작이다.
엘름그린&드라그셋, 'SPACES', APMA, 2024.
여러 후기를 찾아보면 많은 이들이 뮤익과 마찬가지로 현대 조각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에서 마우리치오 카텔란을 연상하기도 한 듯 했다. 나는 지난 해 인상깊게 감상했던 엘름그린&드라그셋의 SPACES 전시도 떠올랐다. 그들의 조각과 공간은 실제 사람과 장소의 크기와 같다는 점에서 물론 뮤익의 왜곡되고 축소, 확대된 조각 자체의 낯섦과 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다만 내가 비슷하다고 느꼈던 지점은 비단 극 사실적이고 정교한 표현에 국한되지 않는다. 조각의 외형 너머의 정신, 즉 보편적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을 그들의 서사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 바로 두 전시의 공통점이라는 생각이었다. 물론 SPACES의 경우 관객들이 마치 현실 같은 비현실의 재구성된 공간에 숨은 섬세한 단서의 조각들을 발견하게 하여 사회적 메세지를 재치 있게 전달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치킨/맨>(2019), <쇼핑하는 여인>(2013)
뮤익은 보다 고요한 방식으로 그들 조각 속 우리의 이야기를 상상하게 한다. <치킨/맨>(2019)에서 그는 아무런 설명 없이 나이 든 남자와 닭이 테이블에서 마주보고 대치하고 있는 형상을 내보인다. 오직 남자와 닭 사이 얽힌 시선과 거리로 인해 촉발된 이 심리적 대결은 바라보는 우리로 하여금 긴장되게 하고, 다음 행동을 기다리게 한다. 누가 먼저 움직일 것인가? 이것은 무슨 대결인가? <쇼핑하는 여인>(2013)은 양 손에 무거운 짐을 잔뜩 들고 품 속에 아이를 안은 여성의 조각이다. 우리는 그의 표정과 정지된 몸짓을 통해 상황의 맥락을 금새 읽어내고 상상할 수 있다. 나는 이 조각을 보며 쉬지 않고 울다 잠든 아이를 안고 장을 본 뒤 집으로 향하는 횡단보도를 건너기 직전의 지친 여성을 상상한다. 내 몸의 반쯤 밖에 오지 않는 작은 조각이지만 무엇보다 익숙하고 친숙한 어머니라는 떠올리고 그가 겪는 상황에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왜 초대형 해골더미를 보기 위해 줄을 서는가: 그의 작품 너머 우리를 마주하다
그리고 론 뮤익의 예술 세계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작품이 남는다. 100개의 대형 두개골 조각을 전시 공간마다 다르게 구성하는 <매스(Mass)>는 이번 전시에서는 두개골들이 마치 상단의 창문을 향해 타고 올라가는 듯한 형세로 벽면 한쪽을 가득 자리잡고 있었다. 아슬아슬 불안정한듯 차곡차곡 안정적으로 쌓인 그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다양한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뮤익은 작품 <매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두개골은 복잡한 오브제이다. 우리가 한눈에 알아보는 강렬한 그래픽 아이콘이다. 친숙하면서도 낯설어 거부감과 매력을 동시에 주는 존재다.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주의를 끌어 외면할 수 없게 만든다.” – 작품 해설 발췌, 2025.
<매스>, 2016-2017
보편적으로 상징하는 ‘메멘토 모리’는 삶과 죽음을 동시에 이야기하는 것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필연적 통찰로 이어지는 <매스>는 그 낯섦과 친숙함이 공존하는 묘한 상징 앞에서 우리가 인간 존재의 유한성, 혹은 무한성을 동시에 연상하게 만드는 듯했다.
뮤익의 세계는 28점의 작품을 모두 감상한 이후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의식 속으로 이어진다. 나는 전시에서 파생된 다양한 키워드를 더 깊이 사유할 수 있는 문학작품들을 소개하고 읽어볼 수 있도록 한 <인생 극장> 연계 프로그램이 가장 인상깊었다.
<마지막 거인>, 프랑수아 플라스
<마지막 거인>은 개인적으로도 아주 좋아하는 동화인데, 전시장에서 만나게 되어 아주 반가웠다. 게다가 내가 생각하는 이번 전시의 핵심 키워드, ‘친숙한 낯섦’과 가장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크고 작은 뮤익의 조각들을 보며, 우리와 다르지만 또 같은 보편적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동시에 인간 존재를 성찰하기에 이른다. 특히 세계, 자연 속에서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어떤 존재가 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 사람들에게 꼭 읽기를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우리는 왜 이 초대형 해골더미를 보기 위해 줄을 서는가? 왜 많은 이토록 많은 이들이 뮤익의 전시를 찾는가? ‘화제성은 화제성을 낳는다’ 물론 소셜 미디어와 포털 사이트에서의 전시에 관한 화제 몰이와 작가 자체의 유명세도 전시의 흥행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였을 것이다. 다만 나는 분명 많은 이들이 나와 같이 친숙하면서도 낯선, 낯설고도 친숙한 어느 조각들이 들려주는 너머의 이야기에 공명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아가 나의 삶을 돌아보고 인간 보편에 대해 성찰할 수 있었던 전시였다.
작업실의 뮤익, 고티에 드블롱드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