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 정말 문제가 있나 봐.”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의 주인공 테드가 문득 충격적인 얼굴로 하는 말이다. 그는 ‘hopeless romantic’이다. 우리말로 하면 ‘못 말리는 낭만주의자’ 정도 되겠다.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낭만적인 사랑을 믿는 사람, 이는 어떤 역경에도 사랑이 있을 거라 믿는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에게 문제가 있을 거라 생각하기 시작한 그 순간의 테드는 말 그대로 ‘hopeless’, 희망이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
희망을 잃은 로맨티스트는 냉소적으로 변한다. 나에게 문제가 있을 거라 믿고, 나와 맞는 짝은 결국 없을 거라 믿게 된다. 나도 그랬다. 자기혐오와 무력감, 관계에 대한 냉소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다 <사랑의 생애>의 1장을 펼치자마자, 그 무력감의 정체를 확인하며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 사랑은 누군가에게 홀려서 사랑하기로 작정한 사람의 내부에서 생을 시작한다.
- 이승우, <사랑의 생애>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기를 원해서 사랑한 적이 없다. 사랑은 내가 선택하고 수행하는 능동적 행동이 아니라, 당연히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 또한 아니다. 책은 이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이 전제는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아니,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통념을 아주 쉽게 깨뜨린다. 사랑은 계약이라는 생각을 많은 이들이 한다. 특히 결혼생활을 꾸릴 사람의 경우 경제적 요소를 고려할 수밖에 없기에.
그렇게 우리는 흔히 사랑을 '자격'으로 생각한다. 예쁘거나 잘생긴 사람, 학벌 좋고 번듯한 직업을 가진 사람만이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저마다 다른) ‘사랑받을 수 있는 조건’들을 스스로 만들어내며 스스로를 고문한다. '나는 여기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받지 못할 거야.'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사랑을 자격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오만함이다. 이승우 작가는 이 통념을 기꺼이 무너뜨려준다. <사랑의 생애> 속 형배, 선희, 영석, 준호를 통해.
<사랑의 생애>는 그들의 유통기한이 있는 - 때로는 이미 지나버린 - 다양한 관계의 양상을 통해 사랑에 대해 탐구한다.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연상시키지만 보다 관념적인 문장들로 가득하다. 그렇지만 사랑만큼 정의 내리기 어려운 것도 없기에, 이 관념적인 문장들은 가슴에 쉽게 와닿는다.
준호는 거의 폴리아모리 수준으로 아주 당당하게 바람을 피우고 다닌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모두를 사랑하기에 그렇다. 준호의 사랑의 생애는 짧다. 금방 피어나고 금방 사라진다.
영석은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이다. 모든 것이 처음이고 서툴러서 애틋하지만, 그래서 더 위험하기도 하다. 첫사랑이 들어오자, 영석은 끊임없이 사랑한다는 말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렇게 요구하는 자신에게 매료되어 상대를 보지 못한다.
선희는 하나의 사랑을 통과한 사람이다. 사랑이 불러일으키는 모든 감정을 정직하게 겪고 흘려보냈기에, 그녀는 다음 사랑 속에서는 자신을 지키는 법을 조금 더 알고 있다.
제각기 다르게 사랑하면서도 누구나 ‘사랑한다’는 한 가지 표현을 쓴다. 사랑하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 말고 다른 말로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한다’고 같은 말을 하면서 다르게 사랑한다.
- 이승우, <사랑의 생애>
독자들이 가장 욕하면서도 공감할 인물은 형배다. “난 널 사랑할 자격이 없다"라는 말로 헤어짐을 이야기하는 그는, 사실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실은 외로움을 인정하기 두려워한다. 외로움을 인정하기보다는 차라리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편이 덜 아프기에 그 말을 선택한다.
형배의 어머니도 비슷하다. 남편이 자신을 떠난 이유가 '예쁘지 않아서'라는 해석을 기꺼이 택한다. 실제 이유가 '사랑받지 못해서'라는 진실을 인정하는 것이 너무나 아프기 때문이다.
사랑을 한낱 자격의 문제로 끌어내리는 것, 언제든 획득하거나 잃어버릴 수 있는 ‘겨우 자격 따위’의 문제로 끌어내리는 것은 실은 굉장히 오만한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렇지만 이 외로움을 인정한다는 것은 사실 어렵다. 나의 나약함을 순순히 인정하고 내보인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인정할 수 있으려면, 사랑을 받아봐야 한다. 받아보지 못하면, 줄 수도 없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받아본 경험이 없는 사람의 삶보다 문제 되는 것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달라고 구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의 삶이다. 대개의 경우 무엇을 받아본 경험이 없는 사람과 무엇을 달라고 구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동일인이다. 원하는 것을 받은 경험이 없는 것보다 원하는 것을 달라고 구해본 경험이 없다는 사실이 이 사람의 내부를 더 심각하게 충격한다. 원하는 것을 받지 못한 경험이 아니라 원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경험이 더 근원적이고 더 뿌리 깊다. 원하는 것을 받지 못한 경험에 의해 생긴 상처는 대상이 되는 재화를 얻음으로써 치료가 되기도 하지만 원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경험에 의해 생긴 상처를 낫게 할 재화는 없다.
- 이승우, <사랑의 생애>
그래서 이 책이 결국 증명해 내는 것은, 사랑을 못하고 있다면, 그건 주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주는 법을 모르는 것은 사실 받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이미 받았다는걸’ 몰라서.
사랑을 '선물'과 같다. 강요할 수 없고, 내가 줄 수 있을 때 주어야 하며, 무엇보다 - 받는 사람이 받아줘야 완성된다. 생각보다 우리가 잘 못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 ‘받는 법’이다. 받는 법은 곧 믿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받고 있다는 걸 믿는 것이다.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작가는 절대적 사랑, 기독교적 사랑을 암시한다. 비록 나는 무종교인이지만, 기독교 특유의 절대적 사랑이라는 개념은 참으로 신기하고 감동적이다.
그래, 당신은 마땅히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소설이어서, 좋았다. 다만 마지막 결말은 다시 쓰고 싶었다. ‘찐사랑’을 찾은듯했던 준호가 다시 사랑을 가볍게 보는 장면들은 사람마다 호불호가 갈릴 것 같다. 아직 각종 조건에 사로잡힌 불완전한 인간의 나약함을 의도적으로 날카롭게 그린 것일까. 이 절대적인 사랑이 얼마나 착각하기 쉬운지, 유지하기 어려운지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몸 안에 사랑이 살기 시작한 이상 아무 변화도 생기지 않는 경우는 없다. 그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다른 사람과 다를 뿐 아니라 사랑하기 전의 자기와도 같지 않다. 같을 수 없다. 사랑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이승우, <사랑의 생애>
아름다운 메시지에 비해 현실적인 결말은 조금 받아들이기 씁쓸하다. 그럼에도, 나와 테드처럼 낭만을 꿈꾸지만 지쳐가는 사람들에게 꼭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의 마지막 화에서 테드는 애타게 찾아왔던 운명의 상대를 드디어 만난다. 아주 예상치 못한 순간에. 선물을 예상치 못하게 받은 것이다. 그때 테드가 느끼는 것은 '한없는 감사'다. 그 모든 방황들이 여기까지 이끌어줘서 감사하다고 테드는 회상한다.
실망하는 자는 사실 무언가를 믿어보고 싶었기에 실망한 자다.
hopeless romantic에게 필요한 희망은 다름 아닌 감사다.
나의 다음 사랑으로 이끌어주는 것들에게 그저 한없이 감사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