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5월이라니. 한 달이 끝날 때마다 ‘시간이 왜 이렇게 빠르냐’는 뻔한 말이 나오는 걸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이 늘 새삼스럽다. 나시와 반바지조차도 거추장스러울 여름이 어서 오기를 기다리다가도, 그러면 한 해의 반절이 지나버렸다는 뜻일 테니 벌써부터 아찔해진다. 어김없이 커가는 달력의 숫자와 달리 성장하는 기미가 영 안 보이는 것 같은 내 모습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2025년의 3분의 1이 지난 지금, ‘Happy new me!’를 외치며 새 사람으로 거듭나고자 했던 새해 결심에 얼마큼 다다랐는지 가늠해본다.
어제보다 단 하나라도 나은 사람이 되자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며칠, 몇 달이 쌓이다 보면 언젠가 만족스러운 모습에 도달할 수 있을 테니까. 작년을 마무리 짓고 올해를 맞을 당시 나는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소개해야 할지 몰랐고, 나에 관해 대체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지 막막했다. 고유한 나라는 존재가 없는 것 같았고,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한 스스로를 믿고 의지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날 때면 잔뜩 긴장했다. 속이 텅텅 빈 나를 시시해하며 굳이 다시 볼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판단 내릴 것 같았다. 속이 알차게 꽉 들어찬 듯한 친구들을 만나고 온 날에는 열등감과 부끄러움에 몸서리쳤다.
1월에는 거의 매일 일기를 썼다. 일기 쓰기라는 루틴을 꾸준히 실천하면서 성취감을 얻고 싶었고, 무엇보다 자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뭐든 써야만 했다. 나를 자주 압도하는 불안을 한 줄 한 줄 문장으로 풀어내다 보면 그것의 형체가 조금은 뚜렷하게 보였다. 그러면 대상에 맞는 해결 방법도 자연히 떠올랐다. 일기를 쓰며 무수히 많은 땅굴을 파고 들어갔고, 그곳에서 나를 위로할 여러 문장을 길어 올렸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문장들이지만 몇 개 공유해보자면, ‘남은 남이고, 나는 나다.’, ‘실패가 나를 만든다. 한사코 실패하자.’,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생각하자.’ 같은 것들이었다. 이런 문장들을 다이어리에 적어놓고 기도하듯 외웠다. 덕분에 조각나있던 자아를 엉성하게나마 이어 붙일 수 있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은 왜 이렇게 간사한 건지, 겨우 살 것 같아지니까 금세 또 스스로를 살피는 일에 게을러졌다. 지난 세 달을 돌이켜보면, 한 달 중 절반은 쇠락의 길을 걷고, 이삼일 정도는 아예 바닥을 찍었다가, 그 뒤로 1주 반 동안 다시 도약하는 패턴으로 살았다. 월초에 야심차게 세운 목표들은 손쉽게 무너졌다. 4주 중 정신 똑바로 차린 날이 고작 일주일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다짐한 일 중 대다수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하락세 시기의 나는 기록도 자주 건너뛰고, 그러니까 당연히 성찰도 거의 하지 않으면서 막연한 불안에 덜덜 떨면서 살았다. 나는 틈만 나면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부류가 아니라서 일부러 일기를 쓰며 생각에 집중하는 시간이 있어야 정신 위생을 챙길 수 있는데, 그런 것도 귀찮다고 미뤄버렸다. 생각도 상상도 이렇게나 하지 않으면서 글을 쓴다고 나대는 게 가끔 민망하다.
이렇게 보니 거의 제자리만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 같다. 기어코 더 나아진 점을 떠올려본다.
우선 맷집이 조금은 강해진 것 같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덜 회피하게 됐다. 여전히 사소한 문제에도 두려워하고 끔찍해하지만, 마냥 덮어두고 외면하지는 않는다. 문제를 정면 돌파하는 친구들을 옆에 두다 보니 물든 것 같기도 하고, 심리적 결벽증이랄지 지나친 완벽주의를 조금은 내려놓은 덕분도 있는 것 같고.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곧장 개선해서 더 나은 하루를 보내고 싶은 의지가 더 커진 탓도 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이 생겼을 때에도, 예전 같았으면 오롯이 완벽한 상태로 누리고 싶어서 한참을 미뤘을 텐데, 이제는 조금 모자라더라도 최대한 빠르게 실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덕분에 나와 내 주변이 조금씩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하고 있어서, 일상의 기본값 자체가 조금씩 올라가고 있는 기분이다.
또 하나는, 더 많이 기록하게 됐다는 것. 일기를 매일 쓰는 것은 아니지만, 작년과 비교했을 때 훨씬 자주 많은 양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노트나 개인 노션 페이지에 일기를 쓰고, 직접 만든 일일 회고 양식에 맞춰 하루에 즐거웠던 일 3가지나 잘한 점과 배운 것 등을 기록하고, 책이나 아티클을 읽었을 때 인상 깊은 구절이나 짤막한 감상을 적기도 한다. 그렇게 기록한 문장들은 미래의 나를 구한다. 기억력도 안 좋은 데다 한 달의 반절 이상을 날리는 나에게, 과거의 내가 길어내 저장해둔 문장들은 정말 약수와도 같다. 우울에서 허우적거리던 나를 구하고, 무기력해진 나를 일깨운다. 조금은 더 현명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렇게 생각하면 같은 곳을 맴도는 것 같아도 나름 나선형처럼 성장하고는 있구나, 싶다.
그럼에도 욕심은 난다. 기왕이면 더 빠르게, 더 많이 나아지면 좋겠는데. 이 마음가짐으로 또 거창한 5월과 여름 계획을 세운다. 아마 또 2주는 어영부영 보낼 것이다. 사실 이미 그렇게 보냈다. 그렇지만 이번에 남은 3주는 알차게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어제보다 오늘 딱 하나만 더, 오늘보다 내일 또 하나 더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조금 열심히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인데. 미래의 나에게 배반당하더라도, 스스로를 불신하며 좌절하는 것보다야 매번 의기양양한 게 더 낫지 않을까. 그러니 또 나는 기세 좋게 마음을 먹어야겠다. 이번 5월이 끝날 때는 ‘Happy better me’ 정도는 말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