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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때로는 우연한 만남이 더 긴 여운을 남길 때가 있다.

   
이 일기는 내가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서 만난 한 할머니와의 일화를 당시 적었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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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8일

 

오늘 7년 만에 파리에 왔는데,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렸고, 아무것도 몰랐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건축이라는 전공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던 시기에 이런 엄청난 도시에 왔었다니. 파리에 다시 돌아와 느낀 건,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찾았다는 것과 그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모든 것들이 지금은 내 모든 감각을 간지럽힐 만큼 좋아졌다는 것이었다. 너무 신기했다. 7년이라는 시간 동안 마치 새롭게 태어난 사람처럼, 내 취향과 인생의 방향이 많이 바뀌었다. 앞으로의 내 7년은 또 어떻게 바뀔까? 기대감과 설렘으로 가득 찬 하루였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아르누보 작품을 구경하다가 바깥 풍경이 너무 예뻐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한 할머니가 불어로 말을 걸어오셨다. 불어는 잘 모르지만, 할머니께서 저 건너편 건물이 루브르 박물관이라고 설명해주시는 것 같았다. 감사하다고 말씀드리니, 다른 장소들까지 설명해주셨다. 옆에는 튈르리 가든, 그 앞에는 콩코르드 광장, 그 사이에는 샹젤리제 거리가 쭉 이어져 있다고 하셨다. 웃으며 말씀을 듣다가 할머니가 나에게 파리에서 공부하느냐고 물으시길래, 네덜란드에서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불어는 못 하느냐고 하셔서 전혀 모른다고 했더니, 갑자기 영어로 더듬더듬 말씀하시는데 생각보다 너무 잘하셔서 깜짝 놀랐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할머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가워하셨다. 알고 보니 할머니의 딸의 딸, 즉 손녀가 케이팝에 푹 빠져 있다고 했다. 휴대폰과 컴퓨터로 매일 케이팝을 보고 따라 춤추며 노래한다고, 할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셨다. 들고 있던 가방까지 바닥에 내려두시고 손녀딸이 추는 춤사위를 따라하시는 할머니의 몸짓이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크게 웃어버렸다.

 

할머니가 네덜란드의 어느 도시에서 왔냐고 하시길래 흐로닝언이라고 했더니 전혀 모르시는 눈치였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영어랑 독일어를 쓰느냐고 물으셔서, 더치어를 쓴다고 하니 그제서야 더치어의 존재가 기억난다는 듯이 “아!” 하셨다. 할머니가 내 전공을 물으셔서 건축 디자인이라고 하니, 내심 뿌듯한 얼굴로 파리를 잘 왔다고 하셨다.


나도 오르세 미술관을 참 좋아한다고, 기차역에서 미술관으로 용도가 바뀐 게 흥미롭다고 말씀드리자, 할머니는 이 미술관이 기차역일 때부터 보셨다고 했다. 당시에는 기차역 운영이 어려워질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고 하셨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내가 한국어 팸플릿을 들고 있었는데, 할머니께서 한국어에 관심을 보이셨다. 그래서 내가 한국어 숫자 읽는 법을 알려드렸고, 할머니는 내 목소리를 따라 읽으셨다.


할머니는 예전에 중국어도 배우셨다며 중국어 발음을 알려주셨다. 그런 할머니를 보며 젊은 시절 눈을 반짝이며 공부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화가 끝나갈 무렵 사진을 같이 찍어도 되냐고 여쭸더니, 정중히 거절하셨다.

 

대신 손녀에게 우리의 만남을 꼭 말하겠다고 하시며, 즐거운 여행이 되길 바란다는 덕담과 함께 쿨하게 퇴장하셨다.

 

*

 

오르세 미술관을 방문한 그날은 평범한 하루처럼 시작됐지만, 우연히 만난 한 사람과의 짧은 대화가 내게 꽤 오랫동안 여운을 남겼다. 할머니의 따뜻한 목소리가 내 기억 속에 오래 남을 것처럼, 나도 언젠가 누군가의 기억에 그런 사람으로 남을 수 있다면 그것만큼 아름다운 일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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