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흥미로운 Opinion을 공유할 수 있게 해준
Literati의 팀원들에게 감사를 전하며
“초록색 얼굴에 긴 칼집 흉터, 그리고 긴 무쇠 못이 가로로 박힌 괴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는가?
녹색의 흉측한 외모는 놀이공원의 귀신의 집이나 테마파크의 공포 체험 등에서 사용하기에 딱 좋으며, 이 캐릭터는 으스스-한 할로윈이면 빠지지 않는 인기 코스튬 중 하나이기도 하다.그래서 우리는 이 괴물의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괴물의 이름은 무엇일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 프랑켄슈타인!”이라고 외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매우 안타깝게도, 틀렸다. 그는 이름이 없다.
최근 학교에서 진행하는 독서 페스티벌에 참여하게 되었다. 한 학기 동안 총 세 권의 작품을 읽고 팀원들과 토론을 진행하며, 각 팀의 색깔을 보여줄 수 있는 방식으로 각 작품을 엮어 발표하는 프로그램이다. 개인적으로 혼자 진행하던 독서를 누군가와 함께하고, 결과물까지 도출해내야 한다는 점에서 처음엔 다소 부담이 있었지만, 오히려 책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고 있다.
우리 팀의 첫 토론 책이 바로 이 ‘Frankenstein’이다. 지난 팀원들과의 첫 토론 중 나를 사로잡는 인상 깊은 질문이 있었다.
자아 정체성과 이름은 어떤 관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영국의 소설가 메리 셸리(Mary Shelley)의 소설 Frankenstein은, 현재까지 다양한 희곡과 뮤지컬로도 재구성되어 오래도록 사랑받고 있다. 그런데 소설명이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인 Frankenstein은 사실 이 괴물을 만든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Victor Frankenstein)의 이름이다.
우리가 대표적으로 알고 있는 녹색의 거대한 남자는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단지 monster라고 불릴 뿐, 그 어떤 ‘제대로 된 이름’을 갖지 못한다.
The monster, the creature, demon 등 그 흉측한 외모 만을 꼬집어 내듯, 이 괴물은 소설 내내 시시각각 제멋대로 불린다. 괴물의 외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있자면, 외모 지상주의의 유구한 역사를 보는 것만 같다. 아마 그가 연예인 차은우와 같은 외모를 가진 존재였다면, 이 소설의 줄거리는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해본다.
하지만 독서 토론을 진행하면서, 그의 외로운 정체성이 단순히 외모 때문만은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정체성 형성에 있어서 외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지만, 우리 팀은 그가 ‘무명자’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존재’에게 있어서 ‘이름’은 무엇이기에 이토록 영원히 한 존재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오늘, 팀원들과 나눈 의견들을 다시금 공유해보며, 이 글이 각자의 이름을 곱씹어 보는 기회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가정이라는 뿌리, 이름이라는 씨앗
교직 과목을 이수하게 되면서, 아동의 발달과 심리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게 되는 요즘이다. 과거 나의 어린 시절을 반추해보며, 부모님과 맺어왔던 심리적 관계를 찬찬히 떠올려 보기도 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부모님이 ‘나’라는 인간 하나를 키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서툰 애씀을 겪으셨을지 생각하면, 한층 더 감사한 마음이 들곤 한다.
소설 속 빅터 프랑켄슈타인(Victor Frankenstein)과 괴물의 관계는 흔히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해석된다. 그런데 이 둘의 관계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감사하기는커녕 괴물에게 프랑켄슈타인은 오히려 엄청난 학대를 저지른 파렴치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학대의 시발점은 바로 ‘이름’의 유무라고 생각한다.
Y: 저는 ‘이름’을 지어주는 게 부모가 책임을 갖고 자식에게 해줘야 할 의무 중 하나라 생각해요. 일반적으로 부모는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아이는 그 이름으로 불리며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사회적 활동을 시작하게 돼요. 즉, 이름은 부모가 자녀의 바람직한 성장을 위해 반드시 고려 해야 할 요소이며, 아이는 이름에 담긴 정성 어린 의미를 통해서 부모의 애정을 확인할 수도 있죠. 그러나 소설 속 괴물은 자신만의 이름을 갖지 못해요.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부모와 유사한 역할을 하지만, 정작 아이가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될 ‘이름’을 마련해 주지 않죠. 결국 괴물은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울타리를 마련하지 못한 채 나간 사회에서 혐오를 받게 돼요. 그에게 이름이 없다는 건 사회 속에서 받은 상처를 다독여 줄 가족이 없다는 점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또한, 어린아이의 자아 정체성 형성 과정에서 ‘이름’, 더 나아가 가족과 부모의 애정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생각해요.
“아이를 키우는 데에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아이란 존재는 절대 홀로 자랄 수 없다. 그리고 그 성장 과정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바로 부모다.
우리는 성장 과정에서 거친 세상의 풍파를 맞이하게 된다. 그 속에서 자존감이 꺾이고,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성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는 순간들도 찾아오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그런데 가만히 놔두어도 아픈 상처에,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이라고 부르며 상처에 소금을 뿌리듯 낙인을 찍어버린다. 그에게 애정 어린 이름 하나 건네는 대신, 끝끝내 ‘괴물’로만 존재하게 만든 것이다.
인간을 넘어 모든 생명체에게 ‘가정’은 단순한 혈연 관계의 생활 공동체를 넘어선다. 생물학적 유대를 넘은, 정서적 유대를 바탕으로 한 따뜻한 가정은 아이가 세상을 향해 자신의 정체성을 꽃피울 수 있는 그 무엇보다 단단한 뿌리가 된다.
프랑켄슈타인이 이 불쌍한 어린 영혼에게 행했던 학대에 다시 한번 분노하며, 부모님의 애정 어린 고민 아래 만들어진 온기 가득한 나의 이름을 곱씹어 보게 된다.
이름이 피어나는 순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하나의 꽃이 되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한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이다. 이 시는 단순히 ‘이름’을 가지는 것 자체를 넘어, 그 이름이 누군가에 의해 불릴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아주 잘 보여준다.
팀원 H는 이렇듯 사회적 상호작용에 기반한 이름의 의미에 주목했다.
H: 저는 괴물에게 이름이 없는 것이 괴물의 사회적 고립을 보여준다 생각했어요. ‘이름’은 자아 정체성 형성 뿐만 아니라 사람 간의 상호작용을 위해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거든요. 누군가 이 세상에 혼자 존재한다면 ‘이름’이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결국 이름은 누군가 불러줄 때 의미가 있는 것이고,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를 구분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에요. 이런 점에서 괴물에게 이름이 없는 것은 그가 이 사회 속에서 소통하고 교류할 이 없이 단절되어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번, 우리는 ‘불리는’ 존재이다. 학창 시절부터 가슴팍에 명찰을 달고 다녔던 한국인들에게 ‘이름’은 타인에 의해 불리는 하나의 수단이라는 점이 더욱 크게 와닿을 것이다. 나를 위한 수단인 동시에, 타인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는 이름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누군가의 호명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자신의 정체성을 무의식적으로 환기시키는 것은 아닐까?
만일 괴물이 이름을 가졌더라도, “따스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러 줄 사람이 존재했을까?”라는 물음을 떠올려 본다면, 과연 그의 이름은 유의미할 수 있었을지,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된다.
정체성의 파편: 나의 이름들
팀원 S는 또 다른 흥미로운 관점을 공유했다.
S: 이름이 없는 이유가 메타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괴물은 가장 큰 정체성을 부여받지 않아 어떤 인간성을 지니지 못했고, 그렇게 정체성 형성의 기회를 빼앗긴 채 살아가게 됩니다. 만약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한 존재인 괴물이 스스로 정체성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면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었을까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되더라고요. 우리 사회에선 스스로 이름을 짓는 존재들이 있죠. 예명을 짓는 연예인, 혹은 평생 살아갈 이름을 정하는 트랜스젠더가 그와 같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어떻게 알려질 것인지 정하여 삶의 방향을 살아가죠. … (생략)
SNS 사용이 활발한 시대인 만큼, 우리는 손쉽게 여러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계정 하나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필수적으로 자신의 아이디를 만들어야 한다. 앞서 ‘이름’이라는 것이 부모가 만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는 전통적 관점에서 벗어나, ‘이름’의 현대적 관점을 짚은 의견이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은 하나의 이름을 가져야 한다는 일대일 매칭은 이제 더 이상 현대 사회에서 성립되지 않는다. 스스로를 정의하는 각각의 다른 이름들, 그리고 그러한 명명 과정을 통해 우리는 각 위치에서의 역할을 정의 내릴 수도, 자신의 소망을 담아낼 수도, 내가 걸어온 발자취를 담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 앞으로 어떻게 세상을 살아나가고 싶은지를 담아 스스로에게 새로운 이름 하나를 선물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렇게 소설 Frankenstein을 바탕으로 ‘이름’에 대한 여러 관점을 나누고 있자니, 스튜디오 지브리의 대작으로 평가받는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센(치히로)을 향한 하쿠의 대사 한 마디가 떠오른다.
“하지만 네 진짜 이름을 잊으면 안 돼. 진짜 이름을 잊어버리면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게 되니까.” (いいかい、絶対に自分の名前を忘れちゃダメだよ。あの人に名前を奪われるとね、帰れなくなるんだ。)
‘이름’은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화, 소설 등에서 큰 의미를 담고 있는 메타포적 장치로 사용된다. 이처럼 ‘이름’은 인간 사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이며, 팀원들과 다양한 의견을 공유하고 정리해보며 그 의미를 곱씹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 Opinion을 작성하며 다시 한 번 Frankenstein 속 괴물을 떠올려 보자면... 괴물에게 어울리는 멋들어진 이름 하나를 지어주고 싶은 애석한 마음이 든다. 그에게 이름이 있었더라면, 그는 그 안의 잠재력을 발휘하는 존재로 자리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하나의 질문을 던지며 이번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