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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푸념을 쏟아낸 다음 날이었다. 나는 여느 직장인처럼 잠이 모자랐으므로 평소보다 한 잔 더 많은 커피를 마시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다음날 출근이 하루 더 남은 목요일이었다.


나는 극장에서 바로 마주하는 충격이 좋아 공연에 대한 사전정보 없이 공연장에 들어가길 선호하는 편이다. 이번에도 후기나 공연 정보를 전혀 찾아보지 않고 표를 교환하고 들어가는 길에 건네받은 팜플렛만을 빠르게 훑어본다. 공연이 시작하기 약 5분이 남은 시간 동안 파란 배경에 견고딕체로 쓰여진 제목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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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면에는 한 문장이 적혀있고, 까만 옷과 진한 메이크업을 하고있는 앳된 소녀 하나가 의자에 앉아 노려보고 있다.


“나 견고딕체로 말한다. 내 인상 내 인성 내 인생에 신경 끄라고!”


청소년기의 방황과 세상에 대한 거부감에 대해 말하려는 것인가. 범상치 않은 차림에 약간 긴장하며 팜플렛을 열자 시놉시스와 작품 설명이 써 있다. 일명 견고딕걸, 수민에게는 그보다는 훨씬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작품 <견고딕걸>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살인을 저지르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건, 그 뒤에 남겨진 이들의 갈들과 고통을 다루고 있다. 가해자의 쌍둥이 자매 수민의 여정을 통해 뜻하지 않게 세상에 던져진 우리의 삶이 미래에 어떤 질문을 던지며 살아갈 것인지 질문하고 그 대답을 마주하는 연극이다. 또한 남겨진 짐을 짊어지고 은둔했던 삶과 이별하는 ‘견고딕걸’ 수민을 통해 대면의 의미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여기까지 읽고 나자 안내 방송이 흐르고 공연이 시작된다. 곧이어 조명이 꺼지고 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견고딕걸은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그것도 지하철에서 친구를 밀어 의도적이고 명백한 살인을 저지른 이후 자신의 목숨까지 끊은 한 인물(김수빈) 주변의 삶을 담은 연극이다.


어떤 일이 우리를 좌절하게 하더라도 ‘리셋’하고 다시 살아갈 수 있다며 강사로 이름을 떨친 최진희(엄마)와 결론을 통해 삶을 이해하는 남극의 과학자 김우철(아빠)은 그녀가 왜 목숨을 끊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게다가 이번 사건은 단순 자살이 아니라 멀쩡한 한 사람을 함께 죽음으로 끌고 간 타살 이후의 자살이 아닌가. 둘은 슬픔과 죄책감에 잠식된 채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자 고군분투한다.


수빈의 쌍둥이 언니인 김수민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함께 삶을 공유해 온 동생이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하자 자신의 삶까지도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녀는 끈질기게 따라붙는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성형을 하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한다. 하지만 수빈으로 인해 죽은 친구의 각막을 이식받은 천재 해커 소녀 윤미나로 인해 집에서 나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나서게 된다.


수민에게 그것은 바로 ‘수빈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며 같은 삶을 공유했던 한 사람’으로써 피해자의 가족을 찾아 사과하는 것이다. 둘은 사과를 위한 여정에 나서다 피해자의 심장을 이식받은 강현지를 찾아 함께 가족들을 만나러 가자고 설득하고, 죽은 이들 그 주변의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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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한 사건으로 인해 내동댕이쳐진 작품 속 인물들은 마치 싱크홀에 빠진 것과 같다. 딸이 왜 갑자기 살인을 저질렀는지 이해하고 싶던 엄마 최진희는 각종 책과 자료에서 딸의 병명을 찾으러 천착하고 꾸준히 가해자 부모 모임에 나가며 수빈을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아버지 김우철은 슬픔에 잠겨 남극에서 목숨을 끊으려한다. 방안에 갇혀 지내던 수민은 윤미나, 강현지와 여정을 겪으며 가해자의 언니인 자신이 즐겁게 웃어도 되는 걸까 혼란스러워한다.



1000px견고딕-걸_1ⓒ김솔.jpg

 

 

작품에는 수빈이 친구를 지하철에서 밀어버렸던 이유나 그녀가 자살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이 작품이 관심 있는 건 수빈이가 그래야만 했던 사건의 원인과 결과, 납득할만한 이유를 밝혀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 연극은 삶의 한 지점에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에 반응하는 인물들의 태도에 관심을 보인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아버지 우철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애도를 시작하며, 사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던 엄마 최진희는 현실을 직시하고 다시 한 번 사람들 앞에 강사로 서고자 애쓴다. 수민도 나름대로 자신이 해야하는 일을 찾아가며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을 자신의 삶에 편입하고 통합하는 과정을 겪어낸다.


세상에는 정말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난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일, 최선을 다해 성실히 살면 더 나은 삶이 기다리고 있을거라 믿었으나 결국 우리를 불시착하게 만드는 일 말이다. 이 연극을 본 날 나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 연극은 사실 별다른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세상을 살다보면 언제든 누구에게든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으며 각자만의 방식으로 마주봐야 하고 용기 내 한 발씩 발을 뻗을 때만 앞으로 다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할 뿐이다.


견고딕체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으로 딱딱하고 진지한 느낌을 준다. 까만색으로 칠해진 견고딕의 틀에 갇힌 수민과 가족들은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며 다시 세상으로 나온다. 연출에는 일부 아쉬움도, 독특한 매력과 사운드를 가진 매혹적인 장면도 있었지만 그 자체가 별로 중요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수민의 삶을 가만히 따라가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눈 앞에 놓여진 최선의 삶을 살다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또 다시 굽이굽이 돌아가며 앞을 찾아가는 시간들이 각자의 삶을 비춰보게 한다. 현장에서 직접 연주하는 피아노와 베이스, 드럼의 음악과 효과음도 분위기를 더해줬다.


작은 극장에서도 적절한 무대 연출과 통통 튀는 매력으로 인간 삶의 한 단면을 포착해 충실히 표현해낸 섬세한 연극이었다.


견고딕걸은 지난 2022년 공연예술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에 선정됐으며 지난 3월 29일부터 이달 13일까지 서울 종로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공연됐다.

 

 

small견고딕-걸_풀샷5ⓒ김솔.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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