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 속 진실은 곪다 못해 썩어 문드러져 악취를 풍긴다. 전공 작품 중 가장 짙게 기억에 남은 이 비극이 ‘rotten’이라는 단어로 유지되고 종결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존재할 것이다. 그 중 분명한 점은, 이 가족이 독자들, 또는 자기 자신들로부터 오랫동안 숨겨온 진실이 점점 부패하고 뼈대가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I feel rotten and blue", "Ways of rottenness", "damned rot", "rotten accusation" 등의 대사들로 오닐은 ‘부패의 이미지’를 시사한다. 타이론 가족의 감정과 진실은 숨겨지고 와전되어 종국엔 의도치 않게 진솔하고 폭력적인 방향으로 분출된다. 이들의 진실은 억지웃음과 잔잔히 깔린 긴장감으로 고요히 묻혀있다가 지칠 대로 지친 가족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 부패한 진실을 가장 잘 인지한 인물은 타이론 가의 둘째 아들, 에드먼드라고 볼 수 있다. 문학 전공자로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지점은 그의 전지적이고 시적인 대사들이었다. 4막 중 그가 던지는 뼈 있는 말들이 타이론 가의 세월을 마구 파헤친다.
"who wants to see life as it is, if they can help it?“
-"할 수만 있다면, 누가 인생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싶겠어?"
현실보다는 '안개' 속 세계를 지향하고, 삶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은 곧 고통이라고 표현하는 에드먼드는 약을 통해 행복하고자 하는 어머니 메리와 닮아있다. 고귀한 예술인으로서 숭고하고 초현실적 삶을 살고자 했던 메리와 유사하게 에드먼드는 지독한 현실의 악취로부터 ‘시’를 통해 도피한다. 시는 시인이 연출하는 극이자 영화와도 같다. 시를 쓰는 순간, 보편적 인식은 파괴되고 현실과 역사도 뒤틀린다. 그제야, 완전한 상상의 나래가 펼쳐진다. 다시 말해, 시를 쓰는 동안만큼 시인은 자유로워진다. 어떤 이야기도 가능한 세상이라니, 눈이 번쩍 뜨인다. 에드먼드도 그랬을 것이다. 그는 도피하는 존재인 동시에 가족 중 거의 유일하게 문제를 직면하려는 욕구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그의 시는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외려 고전적인 관습에서 벗어나 파괴적인 힘을 지녀야 가치 있는 시라고 주장하는 그의 모습에서 시의 기능을 잠시 떠올려볼 수 있다. 지긋지긋한 죄의식과 파헤치기조차 두려운 가정사로부터 벗어나 온몸으로 고통을 극복하는, 그런 무모함이 가능한 세계. 에드먼드를 정의하는 시는 그가 현실로부터 도피함으로써, 또는 그 모든 것을 파괴함으로써 온전하게 '존재'할 수 있도록 돕는다.
"The fog was where I wanted to be"
- “안개 속이 내가 있고 싶던 곳이었어.”
"As if I was a 'ghost' belonging to the fog and the fog was the 'ghost' of the sea. It felt damned peaceful to be nothing more than a ghost within a ghost"
- "마치 내가 안개에 속한 ‘유령’이고, 그 안개는 바다의 ‘유령’인 것처럼 느껴졌어. 유령 속의 또 다른 유령일 수 있다는 사실에 평온해졌어."
에드먼드는 자신이 안개 속에서 유령과도 같아질 때 비로소 평화를 느낀다고 말한다. 그리고 달리고 달려 자신의 집, 그리고 집이 상징하는 가족이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그 순간에 평화를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 말을 하는 와중에도 고통스러워하는 에드먼드의 모습은 오히려 그가 유령이 아닌, 인간이자 시인, 그리고 가족의 '아픈 손가락'인 막내 아들로서 존재해야만 하는 다면체 인간임을 상징한다. 또한, 가족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곤란한' 존재임을 시사하기도 한다. 아프고 허약한 몸, 곧 부서질 것 같으면서 자신과 가장 닮은 어머니, 자신에 대해 끝없는 증오를 느끼는 형, 소리 없이 붕괴한 가족. 그 모든 불안정을 감내하던 그에게 시란 얼마나 큰 존재였을까.
"You have a poet in you but it's a damned morbid one"
- "너 안엔 시인이 있어, 하지만 몹시 병적인 시인이지.“
아버지 제임스 타이론은 셰익스피어를 읽으라고, 고전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라고 에드먼드를 질타한다. 그러나 에드먼드는 고전적이며 아름답고, 세상에 만연하는 시적 표현들로 문학적 소양을 쌓고자 시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 그에게 유의미한 것은 시의 초현실적 기능이었을 것이다. 시인 에드먼드에게 시란 현실 도피와 낭만 추구의 도구보다는 밑바닥의 감정을 휘갈기는 현장이었을 수 있다. 아름답지는 않지만 진실한 시를 추구했을지도 모르겠다.
냉소가 묻은 에드먼드의 말들은 타이론가의 견고한 '합의된 묵인'을 흔들만큼 치명적이다. 그의 비관적이고 우울한 구절들은 타이론 가를 유지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때문에 극 내내 시를 읽는 심연과도 같은 목소리가 제임스를 괴롭힌다. 그 '괴롭힘'으로 인해 타이론 가의 세월이 점점 드러난다는 점에서 에드먼드의 시는 그 무엇보다 진실하고, '병적'이기에 강력하다. 극 중 유일하게 에드먼드가 편안해(?) 보이는 순간은 그가 술을 마시며 무의식적으로 시 구절을 되뇌일 때이다. 삶을 똑바로 볼 바엔 시에 흠뻑 취해있고자 하는 시인 에드먼드. 안개가 잔뜩 낀 날에는 문득 에드먼드만의 상상력과 고통이 담긴 시집이 읽고 싶어지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