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이 서서히 잎을 틔우는 어느 봄날 성수동을 방문했다.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걷다 보니 하얀 벽에 초록 포스터가 가득한 건물이 나왔다. <틔움>이라는 글자와 요즈음의 날씨, 초록빛 포스터가 모두 같은 결로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아트인사이트는 제1회 기획전 <틔움>을 통해, 그간 활동해 온 다섯 작가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 가장 먼저 들어간 공간에는 나른 작가와 은유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우선 나른 작가의 일러스트를 보면서는, 여성과 남성이 함께 혹은 홀로 있는 모습들을 통해 '연인'의 의미를 고찰해 볼 수 있었다.
연인은 가장 사적인 관계다. 사적인 관계 중에서도 가족이나 친구는 대부분 3명 이상의 집단을 이루지만, 연인은 어떤 경우에서든 단둘의 문제다. 너와 나만이 그 모든 기억을 나누고, 폭이 좁아질수록 나눌 수 있는 감정은 깊어진다. 그 좁고 깊은 곳에서 맴도는 감정들을 이해해 나가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혹은 이해할 수 없다면 그저 인정하는.
은유 작가의 일러스트에는 뚜렷한 스토리가 있었다. 깜깜한 바다와 거대한 사막으로 형상화된 감정적 늪에서 시작해 점차 나아가고 성장하는 여정이었다.
일러스트 에세이 서적이 함께 비치되어 있어 각각의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기도 했다. 작가 자신의 어제와 오늘, 다음을 차근히 되새기고, 지금 이 책을 쥐고 있는 관람객들에게도 안부를 묻는다. 그 다정하고 강인한 마음이 인상 깊게 와닿았다. 희망이 있는 곳엔 필연적으로 그보다 더한 절망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언제나 필요한 법이다.
다음으로 이동한 공간에서는 유사사 작가, 대성 작가, MIA 작가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었다.
유사사 작가의 그림은 주로 펜 드로잉이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그림 스타일이라 시선이 갔다. 캔버스에 작고 반투명한 종이 조각들을 덧대어 표현해 새로움도 느껴졌다.
예술은 결국 나 혹은 타인의 마음속에서 무언가를 길어 올려 형상화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데, 유사사 작가 역시 감정에 형태를 부여하고자 하는 작업물들을 주로 선보였다. 세상은 알 수 없는 것 천지더라도 의미를 찾는 행위만큼은 유의미하기에, 닿을 수 없는 것에 손을 뻗어본 그 흔적들은 어딘가 아름다웠다.
대성 작가는 다양한 장르에 모두 능숙한 듯했다. 장미를 통해 여성의 몸에 대한 시선을 풍자해 낸 것과 같은 묵직한 작품도 있고, 그와는 또 다르게 밝고 쨍한 분위기로 비판을 녹여낸 작품도 많았다.
언뜻 단순해 보이지만 그 그림들의 이면엔 모두 우리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이 들어있었다. 토끼, 늑대, 여우와 같은 귀여운 동물 캐릭터들 역시 자유로운 상상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약자, 자본주의 등을 상징한다. 거대한 주제를 마냥 거대하게만 표현하는 대신 경쾌함을 곁들인 덕에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끝으로 MIA 작가의 경우, 북 아티스트라는 분야가 굉장히 독특하고 신선하게 다가왔다. 북 아티스트는 책의 형태로 작품을 표현하는 사람이다.
'벤치'는 푸른 벤치와 주변 풍경을 프렌치 도어 구조로 담아낸 책, '나는 이제'는 안쪽의 화려하고 다채로운 그림과 바깥쪽의 탁한 하늘 그림을 연결한 책이었다. 관람객이 직접 책을 이리저리 넘기고 편지를 펼쳐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일방향적인 전시가 아닌, 독자가 참여해서 완성된다는 점이 현대적이고 새로운 의미를 주었다.
마지막 공간에서는 전시 관련 굿즈를 살펴보고 구매할 수 있었다. 상설 경매 역시 진행되고 있었다. 작가들에게 직접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창구도 마련되어 있어, 문화예술은 '소통'임을 강조하는 아트인사이트의 마음이 세심하게 느껴졌다.
본 전시는 오는 4월 14일까지 성수역 맷멀(MatMul)에서 관람이 가능하다. 미술에 조예가 깊은 편이 아님에도 다섯 작가분의 관심사와 색깔이 다 달라,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동시에 모두가 '틔움'의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는 은은한 공통 분모도 있었다.
단단함이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일정하게 눌러 담아 두드리는 것보다 손 가는 대로 빚어내는 것이 더 매력적이다. 무른 기운에서 더 강한 생명력이 느껴지기도 한다. 저마다의 세상에서 그러한 틔움의 나날이 이어지길 바란다. 제2회, 제3회로 이어져 나갈 기획전을 향해서도 기대와 감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