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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초등학생 때, 2년 정도 대금 부에서 활동했던 경험이 있다. 그 덕분에 국악과 판소리에 흥미를 갖고 있었다.
 
<적벽>이라는 공연을 처음 알았을 때도 판소리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참신해서 언젠가 꼭 한 번은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좋은 기회로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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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한, 오 삼국이 분립하고 황금 권좌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난무한 한나라 말 무렵. 유비, 관우, 장비는 도원결의로 형제의 의를 맺고 권좌를 차지한 조조에 대항할 계략을 찾기 위해 제갈공명을 찾아가 삼고초려 한다.
 
한편 오나라 주유는 조조를 멸하게 할 화공(火攻) 전술을 펴기 위해 전전긍긍하는데, 때마침 그를 찾아온 책사 공명이 놀랍게도 동남풍을 불어오게 한다. 이를 빌어 주유는 화공 전술로 조조군에 맹공을 퍼붓고, 조조는 아무런 반격도 하지 못한 채 적벽에서 크게 패하고 만다.
 
백만군을 잃고 도망가는 조조를 가로 막는 것은….
 
*
 
텅 빈 흰 무대와, 강렬한 붉은 조명, 무대 중앙을 가로지르는 천 하나.
 
무대의 첫인상은 당황스러움이었다. ‘무대에 이렇게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생각이었다. 동시에 이 무대를 어떻게 채워나갈지에 대한 기대감이 밀려왔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어릴 때 삼국지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아마 어린이의 입장에서 익숙하지 않은 한자어와 반복되는 전쟁이 조금 어렵게 다가왔던 것 같다. 부끄럽지만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라를 맺었다.’, ‘유비가 제갈공명에게 삼고초려했다.’ 정도의 아주 작은 지식만을 가지고 있던 터라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적벽>에는 작품의 이해를 돕는 다양한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새로운 장이나 대목이 시작될 때 무대에 크게 떠오르는 제목들과 무대 양 옆에 준비된 스크린의 한글과 영어 자막은 삼국지를 잘 몰라도 작품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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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판소리라고 하면, 소리꾼 한 명과 고수 한 명이 올라와 있는 무대를 생각할 것이다.
 
이 작품은 대부분이 판소리 합창으로 이루어진다. 소리와 아니리를 가리지 않고 배우들이 호흡을 맞춰 합창할 때의 압도감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특히, 그 많은 배우가 모두 같은 타이밍에 숨을 멈추고, 소리를 시작하며 심지어는 소리를 꺾을 때의 타이밍과 그 높낮이까지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점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라이브 세션도 마찬가지다. 전통악기인 북, 거문고, 대금에 아니라 드럼과 기타까지 더해진 연주는 소리를 훨씬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때로는 바람 소리 같기도, 때로는 거센 파도 소리같기도 한 연주를 감상하는 재미가 있었다. 특히, 북과 거문고가 무대 뒤편에서 중앙으로 나와 배우들과 직접 합을 맞추는 장면에서는 제4의 벽이 깨지고 내가 마치 적벽대전 속 한 장면에 함께 하고 있는 듯한 느낌까지 받았다.

배우들의 군무도 빼놓을 수 없는 포인트다. 무대 내내 맨발로 등장하는 배우들은 현대무용뿐만 아니라 스트릿 댄스까지 소화해 낸다. 특히 ‘동남풍’이라는 대목은 아마 모두가 인정할 최고의 장면일 것이다. 다 함께 북을 치는 장면과 말을 타는 장면에서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배우들의 의상과 소품도 주목해 볼 필요가 없다. 흰색, 붉은색, 검은색으로 짜여진 의상은 군사들의 갑옷처럼 보이기도 한다. 안무를 할 때마다 펄럭이는 천은 동작을 풍성하게 만들어줌과 동시에 동양의 아름다운 ‘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유비, 관우, 장비의 성격에 따라 의상을 달리 한 점도 눈에 들어왔다. 유비는 차분하고 수려한 의상이었다면, 관우는 강렬한 민소매 의상, 장비는 기개를 보여주는 듯 하는 어깨 장식이 포인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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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사용도 눈에 띄었다.
 
공연 내내 부채는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때로는 칼과 활이 되기도, 방패나 갑옷이 되기도, 혹은 세찬 파도와 거친 바람이 되기도 한다. 적색 부채는 피바다를 표현하기도 한다. 적색과 백색의 부채를 사용해 부채는 부채의 색은 조조와 유비의 군대를 구분한 연출은 작품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도록 돕는다. 부채를 펼치고 접을 때 나는 소리 역시 관객들의 이목을 끄는 매력 포인트이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서 굉장히 감탄했다.

<적벽>은 국립정동극장의 대표 작품으로 2017년 초연된 이래 올해 벌써 6연을 맞이하였다. 오랜 기간 공연된 만큼 작품성을 인정받고 마니아층을 형성해온 <적벽>은 한 번만 봐도 그 이유를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공연이었다.
 
판소리라는 이유로 적벽 관람을 망설이는 누군가가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꼭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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