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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어릴 적, 아버지가 사다주셨던 책들 중 유일하게 읽지 않았던 것은 삼국지 시리즈였다. 조금 매니악하게 느껴질 정도로 많은 전투가 포함되어 있었고, 지금까지도 이해하기 어려운 한자어와 표현들이 잔뜩 있었기에 더욱 어렵게만 느껴졌던 것 같다.

 

때문에, 이 후기는 삼국지의 스토리를 얼마나 매끄럽게 반영했는지, 어떤 인물을 얼만큼 변형시켜 이야기에 녹여내었는지 등 기존의 '삼국지 덕후'가 말할 수 있는 것들보다는, 무대를 통해서만 가볍게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위주로 작성되었다는 점을 미리 참고하길 바란다. 또한, 글에 앞서 삼국지라는 장르에 대해 일면식이 거의 없거나, 아주 조금만 알고 있는 이들도 즐겁게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미리 덧붙이고 싶다.

 

뮤지컬 [적벽]은 2017년을 시작으로 시즌을 거듭하여 현재 6연을 공연 중일 정도로 두터운 매니아층을 보유한, 오랜 기간 순항 중인 공연이다. 주변의 친구들 중에서도 이 공연을 굉장히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 마침 아트인사이트 공연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와 즐거운 마음으로 공연 관람을 신청했다.

 

관람을 신청하며 삼국지에 대해 (적어도 공연에 나오는 부분만이라도) 알아보고 공연을 보려고 했으나, 결국 계획대로 사전 공부를 진행하지는 못했다. 학교 수업을 듣고 급하게 시청역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모 관객 분께서 정리해주신 가사와 대사 정도만을 간신히 읽고 공연장에 착석하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적벽]이 공연 중인 국립정동극장은 양편에 달린 화면에서 한국어와 영어로 번역된 가사와 대사를 띄워 준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한자어 및 고(故)어에 익숙하지 않은 나도, 영어 듣기 평가를 하는 느낌보다는 (솔직히, 영어 듣기 평가처럼 될까 싶어 조금 걱정했다.) 편안히 공연에 집중할 수 있었다.

 

 

[국립정동극장] 판소리 뮤지컬_적벽 poster.png

뮤지컬 [적벽] 포스터

6연에 의상이 크게 바뀐 것으로 알고 있는데, 포스터에서도 마찬가지로 한국적인 미를 살리려 했다는 인터뷰대로 선적이면서도 절제된 아름다움이 눈에 띈다.

 

 

[적벽]은 삼국지 중에서도 대중적으로 알고 있을 부분을 주로 하여 이야기를 전개한다.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를 맺는 장면과 제갈공명에게 삼고초려를 하는 장면, 적벽대전에서 조조와 그의 백만군을 물리치는 장면 등 사자성어의 유래가 된 장면, 혹은 매체 등에서 언뜻 보았을 내용이 주를 이루어 생각 만큼 어렵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덕분에 스토리를 쫓아가려 노력하기보다도 극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에 집중할 수 있었는데, 뮤지컬 적벽이 주는 특유의 아름다움은 화려한 안무와 삼국지의 유명 인물들에 국한되지 않은, 일반적인 인물들까지 조명하려 한다는 점이었다.

 

우선 안무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하자면, 배우와 의상이 가지는 이점을 충분히 활용하려 한다는 점이 무척 흥미로웠다. 뮤지컬 적벽의 의상은 검정과 붉은색, 혹은 흰색이 격자무늬로 짜여진 천의 조직을 가슴팍에 달고 있고, 거기에서 늘어진 긴 천이 동작을 할 때마다 나풀거린다는 것이 특히 눈에 띄었다. 동양적인 미가 무엇인가? 라고 물었을 때,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선의 유려함이라는 점처럼 적벽의 의상은 그러한 지점을 크게 활용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타 공연보다 배우 전부가 참여하는 큰 동작의 안무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고 느꼈는데, 한 명이 아닌 다수가 무대 위를 꽉 채웠을 때 느껴지는 큰 움직임과, 그러한 움직임이 이루어질 때 나부끼는 천의 느낌만으로도 굉장한 만족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색과 재료를 사용하는 무대와 의상 또한 아름답지만, 미니멀함을 토대로 만들어낸 의상을 입은 배우들 사이의 알맞는 호흡이 만들어내는 시너지란 다른 무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이어서 일반적인 인물들마저 조명한다는 점을 다시금 시사하며 글을 끝마치고자 한다. 이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삼국지를 잘 알지 못하는 나에게조차 유비, 관우, 조조 같은 영웅들의 이야기는 익숙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그들의 이야기가 와닿지 않았던 것은,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여서도 있지만, 그들이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라기 보다는 너무도 비범한 이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적벽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이유는 조조의 군사들로 전쟁에 참여했던, 평범한 백성들의 이야기도 극중에서 조금이나마 조명하고 있어서 였다. 영웅의 군사로서 전쟁에 참여하여 용맹히 싸우다가도, 집에 홀로 있을 노모와 아내, 아이들을 걱정하는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를 판소리로 해학적으로 풀어낸 덕에 마냥 무거운 이야기에서 벗어나기도, 혹은 들뜨던 기분을 넘어 무거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 덕분인지 마냥 눈과 귀가 즐거웠던 느낌만이 아니라, 조금 깊이 있는 구석까지도 생각해볼 수 있어 뮤지컬 [적벽]이 조금 더 가슴에 남고,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뮤지컬 [적벽]은 4월 20일, 시청역에 위치한 국립정동극장에서 관람할 수 있다. 삼국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이에게도, 삼국지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이에게도, 혹은 선적이지만 폭발적인 미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모두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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