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벽>은 직장 동료 분이 자신의 '인생 뮤지컬'로 망설임 없이 꼽으시는 걸 보며 알게 된 작품이다.
그때 판소리 뮤지컬이라는 걸 알고는 조금 놀랐었다. '판소리 뮤지컬인데 재밌다고..?' 하하. 잘 모르는 것에 의심부터 품는 나의 좁디좁은 식견이 드러나버렸다.
그러나 웬걸. <적벽>은 마니아가 많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진짜... 멋있기 때문이다. 나의 표현력 또한 좁지만, 이 말만큼 <적벽>에 적확한 게 없다. 정말 '멋'이 살아있다.
인생 처음으로 공연 굿즈를 사보며, 나도 적벽 팬덤에 합류했다. (멋진 포즈를 취하고 있는 '자룡' 배지를 샀다. 아래 사진은 배지와의 비교샷이다.)
판소리 뮤지컬 <적벽>은 3세기 한나라 말, 삼국의 혼란한 정세 속에서 벌인 적벽대전을 배경으로 한다. 원전은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 그리고 조선 시대에 불렸던 판소리 ‘적벽가’이다.
판소리 합창과 현대 무용을 결합해 만들어진 판소리 뮤지컬 <적벽>은 친절한 극이다. 판소리의 세련된 편곡 덕분에 지루하지 않다.
또한 현대 무용이 곁들여져 댄스 공연을 보는 느낌도 든다. 삼국지를 몰라도 서사를 따라가기 쉽게 편집해 즐기기 어렵지 않다. 또한 내한공연처럼 한글 자막과 영어 자막이 화면으로 띄워진다. 그래서 판소리에 나오는 고어들을 알아듣기도 쉽다.
(나는 한글로 표기된 한자어가 어려워 결국엔 영어 자막을 많이 봤다.)
뮤지컬 <적벽>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머릿속에 그려지는 건 '직선'이다. 군더더기 없이 곧게 뻗은 의상, 절도 있는 안무, 유일한 소품인 부채.
<적벽>은 이 심플한 재료들로 화려함을 구현해 낸다. 부채는 인물들의 칼과 방패, 어떤 때는 바람의 방향이 된다. 빨강, 하양, 검정 세 가지 색으로만 구성된 무대와 의상은 마치 체커 게임을 연상케 한다. 물론 이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훨씬 복잡하고 치열하다.
강렬한 붉은 조명 아래, <적벽>의 인물들은 생존과 의리를 걸고 전투를 벌인다.
그 외에 또 눈에 띄는 것은 젠더프리 캐스팅이다. 유비, 조조, 자룡, 공명, 정욱 굵직한 인물들이 성별에 관계없이 카리스마만으로 승부한다.
특히 유비의 충신 조자룡의 무예 장면에서는 유독 환호성이 많이 터진다.
온갖 위험을 뚫고 유비의 아들을 구해내는 장면에서, 자룡은 유비의 부인에게 말한다. “부인께서 고생함은 소장의 불충”이라고. 막이 내리기 직전의 마지막 자세까지도 인상 깊다. 고도의 심리전을 펼치는 다른 인물들에 비해 온몸으로 용맹함을 증명하는 자룡.
삼국지에서 '성공한 리더' 셋은 주로 손권, 유비, 조조로 꼽힌다. 손권은 현실주의, 유비는 이상주의, 조조는 능력주의다.
나는 이 셋 대신 자룡의 '충의주의'를 지지하고 싶다.
조자룡이 워낙 멋있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육연 동안 자룡을 연기해 온 김하연 배우의 힘도 컸다. 앞으로 김하연 배우가 나오는 뮤지컬이라면 관심을 가지게 될 것 같다.
하지만 유비도, 조조도, 자룡도, 공명보다도... <적벽>에서는 배우가 앙상블의 일원일 때 가장 빛난다.
<적벽>은 마치 대극장 뮤지컬 같이 느껴지는데 그건 앙상블의 힘에 있다. 앙상블이 중심이 되어 펼쳐지는 판소리 합창, 그와 어우러지는 현대무용. 마치 '메가 크루' 댄스에서 볼 법한 퍼포먼스들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정동길을 걷다 우연히 <적벽>의 휘날리는 포스터를 만나게 된다면, 망설이지 말고 정동극장에 들어가 보시길. 적벽대전이 불같은 춤판으로 펼쳐진다.
무아지경으로 몰입하게 되는 판소리를 느껴보시라.
웰메이드 창작 뮤지컬 <적벽>은 사실 중앙대학교 학부 워크숍 무용극 '적벽무'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학생들의 손길로 시작되었다니, 더욱 감탄이 나오는 부분이다.
마찬가지로 퓨전극이자 서울예대 학생들의 학사 창작 뮤지컬이었던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이 떠오른다. <스웨그 에이지: 외쳐 조선!>의 경우 작년 11월 런던에서 영어 버전 쇼케이스를 선보였다. 웨스트엔드나 브로드웨이 정식 공연을 펼치는 것이 제작사의 목표라고 들었는데, <적벽> 또한 K-뮤지컬 수출의 길을 걸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공연 시놉시스
위, 한, 오 삼국이 분립하고 황금 권좌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난무한 한나라 말 무렵.
유비, 관우, 장비는 도원결의로 형제의 의를 맺고 권좌를 차지한 조조에 대항할 계략을 찾기 위해 제갈공명을 찾아가 삼고초려한다.
한편 오나라 주유는 조조를 멸하게 할 화공(火攻) 전술을 펴기 위해 전전긍긍하는데, 때마침 그를 찾아온 책사 공명이 놀랍게도 동남풍을 불어오게 한다.
이를 빌어 주유는 화공 전술로 조조군에 맹공을 퍼붓고, 조조는 아무런 반격도 하지 못한 채 적벽에서 크게 패하고 만다.
백만군을 잃고 도망가는 조조를 가로막는 것은….